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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한국 건축계, 산학의 현주소 (2010.03)

한국 건축계, 산학의 현주소

「건축과 사회」, 제19호․2010 봄, 권두언, pp.12-15.

지난 해 12월 23일부터 올해 3월 7일까지 (75일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메가시티 네트워크 : 한국현대건축 서울전』에는 총 38,472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었다. 매일 513명이 이 전시를 찾은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한 지 40년 동안 건축전은 메가시티 전을 포함해 단 10차례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 중에는 일본건축가전과 세계미술관전 등 해외에서 기획한 전시를 유치한 경우도 있었으니, 한국에서 기획한 해외그룹 전이 귀국전 형식으로 돌아온 것은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술관의 입지조건이나 폭설과 추위를 생각하면 예상 밖의 호응이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 마련한『건축가와의 대화』에는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은 관객들로 붐볐다.

그런데 이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느낀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건축'과 가장 가까운, 아닌 넓은 의미에서 같은 영역인 ‘건설계’에 건축전시회의 가치와 의의를 전달하고 설득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노력은 하지만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아예 무관심 하거나, 취지는 좋지만 냉혹한 현실에서 ‘한가한 여가 활동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형 건설회사 입장에서는 해마다 십시일반 후원을 해야 하는 백여 개의 건축학과 졸업작품전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둘째는 서울전의 개막식, 건축가와의 대화, 특강 등 부대행사에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는 젊은 건축가들의 모습이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주중 근무 시간에 행사가 열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주말에 전시장에서 머물렀을 때에도 중고등학교 학생이나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보다도 ‘젊은 건축가’들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정확한 통계가 아니기 때문에 필자의 주관적 견해일 수 있다. 그러나 대학 문을 나서는 순간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은 대학에서 품었던 열정과 호기심을 급격히 잃어버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래 전 경험이지만 미국의 건축대학에서 여는 특강 시리즈는 학생과 건축가들이 만나는 정기적 이벤트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최근 일간지들은 건축물 탐방 시리즈, 명소 소개, 건축가 대담 등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건축이 ‘문화’영역으로 대접을 받기 시작한 모양이다. 또한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건축 잡지는 여전히 많은 신작 이미지를 내보내고 있다. 밖에서 보기에 건축계는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고 건축가는 근사해 보인다. 하지만 정작 건축 안에서 ‘건축가’의 입지는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워 보인다.

건축가의 본보기(role model)

열심히 일하면 자격증을 따고 홀로서는 ‘건축사’가 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게다가 대가 밑에서 묵묵히 수련을 하면 ‘건축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대기업에 비해서 얇은 봉급 봉투를 받으면서도 철야와 야근을 반복했던 것은 그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정 부분 그것은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을 지나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 믿음은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안정된 생활을 유보할 만큼 ‘꿈’을 주는 건축의 아우라가 힘을 잃어버렸다. 그 힘을 잃자 건축의 오랜 ‘도제 시스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한 만큼 보상 받아야 한다고 믿는 시대가 되었다.

5년제로 전환한 건축학은 건축공학과 분리되어 건축사를 양성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많은 실무 건축사들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건축설계’의 교육방법도 혁신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5년차가 되면 미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과연 홀로서는 건축가가 될 수 있을까? 좁고 험난한 과정을 견딜 수 있을까? 결국 우수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학생들은 대형 건축사사무소로 가고, 극소수만이 아틀리에 건축사사무소의 문을 두드린다.
 
필자를 포함한 기성 건축가들은 앞길을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안주한다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당장의 금전적 차이가 아니다. 봉급 차이를 상쇄할 미래의 건축가상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5년을 고생하면 그 뒤 10년을 더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선다면 학생들은 진로에 대한 고민은 하되 혼돈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돈은 5년제 교육의 문제로 부메랑이 되어 온다. 설계과제에서 다루는 작은 주택, 중규모의 도시건축은 대학의 문을 나서는 순간 접해볼 기회가 거의 없어진다. 우리 도시와 건축에 대한 비판, 성찰, 논의를 통해 건축이 대형화, 복합화되는 현실을 교과과정에 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숙제다. 치열한 도시건축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지 못하는 교육 현실 때문에 학생들은 사회에 발을 디디는 순간 예상치 못한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배운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만,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정치가 개입되는 현실을 보고 대학에 배반감마저 느끼게 된다.

단순히 건축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안에서 기인한 문제만도 아니다. 글로벌 경제체제와 우리 사회와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다. 그러나 이를 하나로 압축한다면 건축학도의 피부에 와 닿는 본보기(role model) 건축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얻은 대가로 먹고 사는 프로페셔널(직업인)이 건축가다. 생존은 프로페셔널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건축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치열함 속에서 좋은 건축을 만드는 프로페셔널이 건축가다. 열심히 일하면서 배우면 스승이 동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 건축계의 현주소다. 대형 건축사사무소와 극소수의 선두 건축가 그룹 사이의 중간지대에 포진하는 건축가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의제를 생산하는 학계

신문, 방송, 건축 잡지에 나타나는 건축계의 이미지가 화려한 것처럼, 대학과 학계도 풍성해 보인다. 학문 영역이 여러 갈래로 세분화되고 새로운 학회와 저널이 생겨났다. 대학 평가와 교수집단에 대한 곱지 않은 사회적 인식은 보다 많은 논문을 생산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학술 논문지의 기준이 엄격해지고 탈락률도 높아지고 있다. 양 중심에서 질 중심으로 평가의 방식이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이다.

대학사회의 경쟁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경쟁은 연구의 질을 높이고, 그 결과는 교육으로 환원되고, 이는 다시 실천계와 접목하는 선순환구조로 이어져야 한다. 건축은 대학과 실천계가 밀접한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분야다. 흔히 건축과 비교대상으로 의학과 법학을 꼽는데, 대학과 실무가 일체화된 의학보다는 전문 법조인을 양성하는 법학교육이 비교대상으로 적절할 것이다. (사회적 대우와 경제적 위치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법학 전문대학원을 출범시키는 이전에 학계와 법조계는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먼저 제정하였고, 가장 민감한 사항이었던 입학생 수는 변호사협회와 법학 교수회가 합의를 도출하도록 했다. 그만큼 법학교육은 국가적 현안이라는 것을 안팎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건축학교육은 법률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5년제로 전환했고, 교육과 실무를 연결시키기 위한 숙제를 남겨 놓고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건축학이 5년제로 전환된 사실을 모른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런데 건축과 법학은 그 무게중심이 다소 반대다. 법학은 실천계가, 건축은 대학이 무게중심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다. 법학 전문대학원이 출범하기 이전까지 대학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개인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적극적 주체가 아니었다. 각자 알아서 공부하고 시험에 붙는 순간부터 대학은 법조인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법학 전문대학원이 출법한 지금도 학계는 결코 법조계의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반면 건축학계와 실무계는 매우 끈끈하다. 대학의 문을 나선 졸업생들도 학교의 울타리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대학의 복도에서 건설회사와 건축사사무소의 전문인들이 서성거리는 것은 아주 흔한 광경이다. 학계가 실천계의 우위에 서 있는 묘한 구도는 이론과 기술을 주고받는 산학협동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 사회가 건축 교수들에게 준 과도한 권한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한은 건축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평가와 심사제도에 있다. 이 제도와 방식을 바꾸는 순간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학계와 실천계의 무게중심은 달라질 것이다.

미래는 융합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모두들 말한다. 기술과 디자인이 결합되고, 건축과 도시가 결합되고, 역사와 현재가 만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고 이는 산업으로 이어질 것이라 본다. 하지만 현재 건축계를 보면 이런 예측은 도식적이고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학문은 점차 세분화되고, 학술지의 형식은 점차 규범화되어 간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키워드가 등장하고, 학회가 만들어지고, 산업과 연결하려는 시도로 이어지지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비켜간다.

학문이 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대학에서 생산한 이론과 기술이 산업계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짐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효율성, 친환경, 미래의 경쟁력을 내세우면서 건축사사무소가 감당하기 어려운 요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건축설계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건축계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 지나치게 많은 나뭇가지가 줄기를 위협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현재 건축학계는 각론이 풍성하다. 융합보다는 오히려 영역의 울타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각자의 목소리가 더 정교하고 강해졌다. 그러나 문제와 가능성은 한 영역과 다른 영역이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총론을 말하는 시대가 있었다. 이론은 어설프고 논증은 부족했지만 건축계 전체를 아우르는 의제를 던졌던 시대가 있었다. 냉혹한 현실에서 소박하고 순진했지만 의제는 있었다.

변화의 중심에 서려면 의제를 선점해야 한다. 의제를 선점하려면 현실의 좌표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좌표를 읽으려면 큰 시각에서 물음을 던져야 한다. 각론의 연결고리를 포착하는 큰 틀일수록 좋다. 현재 건축계의 과제는 각론에 함몰된 중간지대의 총론을 찾아내는 것이다.

건설-건축의 공존구도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으로 도약했던 지난 50년은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진취적이고 성공적인 산업화시기였다. 고도성장의 추동력이 건설산업이었고 건축인이 숨은 주역이었다. 1980년대 후반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질적으로 괄목한 변화를 겪었던 건설산업은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 국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2007년 현재 건설투자 비율은 17.9%로 OECD 선진국보다 6~8% 이상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산업구조는 제조업에서 지식서비스 산업으로 옮겨 가고 있고, 건설산업은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한 고부가가치형 모델로 전환했다. OECD 선진국 모형이 되려면 한국의 건설투자 비율은 10% 초반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지난해 10월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국내 건설산업은 산업의 수명 주기상 성숙기 단계에 이미 진입했으며, 2015년 이후 성장 둔화가 본격화되고 2020년에는 GDP에서 건설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11% 정도로 낮아지겠다고 예상했다.” 또한 “대규모 신도시 개발, 기본적인 사회간접자본시설(SOC) 확충 등의 프로젝트는 많지 않고, 대신 도심재생이나 주택 리모델링, SOC 시설 유지 보수 등과 같은 기존 건축 및 시설물의 재생과 유지관리 분야의 프로젝트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 예측이 맞는다면 초대형과 초소형의 중간지대 프로젝트가 주력이 되며, 하드웨어 중심의 건설산업은 새로운 문화 융합콘텐츠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현재 거대-아틀리에로 양극화된 건축설계 시장의 구도는 재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계는 산업화시대의 건설신화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건설과 건축의 종속구도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것이 지금 건설-건축계가 던져야 하는 질문과 의제다.

『메가시티 네트워크 : 한국현대건축 서울전』의 부대행사로 마련한 네 차례의 『건축가와의 대화』에서는 많은 학생과 일반시민의 질문과 토론이 오고갔다. 개별 건축가의 건축관, 설계방법론, 건축어휘의 생성과 같은 현학적 이야기보다는 “어려운 시대에 건축가로서 어떻게 설 수 있는가?”, “건축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와 같은 건축 외적인 질문이 더 많았다. 여러 명의 건축가가 참여한 집담회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건축에 대한 목마름과 현실의 괴리가 가장 절실했기 때문이었을까?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 그리고 지극히 불합리한 현실과 집단적 무감각, 이 어색한 공생이 한국 건축계의 현주소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