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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책 없는 거리 (2012.9.4)

책 없는 거리

 

중앙일보, 2012.9.4, 오피니언, [삶의 향기]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964/9225964.html

 

“책을 제값 주고 사주지 않으면 자국어로 쓴 문화콘텐츠는 결국 소멸”
“무목적 배회를 허락하는 거리의 책방과 도서관은 상상력의 저장고”

 

2006년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에서 이렇게 썼다. “코쿠가 평생 동안 썼던 미완의 『이스탄불 백과사전』이 헌책방 구석에 쌓여 있었다. 독자는 고사하고 폐지로 사려는 사람도 없었다.”


파무크는 불운한 작가가 공들여 쓴 책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이스탄불 거리의 헌책방이 파무크라는 거장을 만든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사라진 헌책방을 떠올려 보았다.

 

거리의 책방이 사라지고 있다. 전국의 서점은 2000년대 서서히 줄다가 2007년 이후 매년 200개 이상 없어져 2009년 2850개만 남았다. 이는 인구 1만7000명당 한 개 꼴이며 이웃 일본의 절반 수준이다. 서울시 한 개동의 평균 서점 수는 한 개가 안 된다. 그나마 수험생 참고서와 가벼운 베스트셀러가 대부분이라 다양하고 깊이 있는 책들을 찾기가 어렵다. 서점이 줄어드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점의 대형화, 양극화와 더불어 온라인서점으로 무게 중심이 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현재 온라인 서점의 시장 점유율은 35%를 넘어섰다.

 

그런데 우리나라 동네 서점을 더욱 옥죄는 것이 있다. 바로 온라인 서점에서 제값 받고 책을 파는 ‘도서정가제’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독자는 쉽고 싸게 책을 사는 혜택을 누리는 것 같지만 컴퓨터 화면에 뜨는 소수의 베스트셀러를 편식하게 되고, 출판계는 할인액만큼 책값에 거품을 넣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 출판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신간을 펴내려 하지 않고, 독자의 선택권은 점차 줄어든다. 하지만 출판 서점계의 항의와 절규는 규제개혁과 공정거래를 내세운 논리 속에서 파묻히고 있다.


책값을 시장에 맡기자는 무한경쟁 논리는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가 주도한다. 이들은 거대 경영을 통해 출판 산업을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다. 묵직한 전문 서적을 펴내도 영어를 읽는 수억 명의 잠재적 독자가 있다. 또한 동네 서점이 사라지는 문제보다 서점의 대형화로 얻는 이익이 크다.

 

반면 인구 5백만이 조금 넘는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에서 국민이 다양한 책을 제값 주고 사주지 않으면 자국어로 쓴 문화콘텐츠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동네 서점을 지키고 도서정가제를 고수하는 이유다. 인구 1억2000만 명이 넘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닷컴은 일본에서 도서정가제를 지켜야만 한다.


한편 동네 서점이 사라지고 있는 미국의 경우 마을 단위의 공공도서관이 출판계를 지탱한다. 미국을 비롯한 G8 국가에는 인구 6000명당 공공도서관이 한 개 이상 있다. 일본은 G8에 속하지만 4만 명당 한 개로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7만 명당 한 개가 있다. 서점이 사라져 가는 마당에 이를 보완하는 공공도서관마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서점과 도서관이 없는 거리에서 도시경쟁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런 사례를 보거나 듣지 못했다. 경제와 문화가 결합되어 경쟁력을 지닌 세계적 도시는 모두 보행문화가 정착된 곳이다. 이런 거리에서 무목적 배회를 허락하는 책방과 도서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저장고다.

 

지난여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에 있는 알메르에 갔었다. 바다를 메워 만든 이 신도시의 중앙 광장에는 크고 근사한 공공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땅 값이 가장 비싼 곳에 교육문화시설이 자리 잡은 도시 구조는 도심을 상업건축이 차지한 우리의 신도시와 극명히 대비되었다.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도시는 작지만 창의적인 기업이 살아 있을 때 번성한다. 거대한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생산성이 높지만 역동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작은 서점과 도서관은 창의적 도시 네트워크의 접점이 되어야 한다.

 

서울에서 이름난 가로수길, 홍대앞, 인사동길, 북촌길, 서래마을길에 서점이 몇 개나 있나 검색해 보았더니 통틀어 두 곳이었다. 걷고 싶은 거리에서 느끼는 왠지 모르는 빈곤함은 이 때문이 아닐까.

 

김성홍 ․ 서울시립대 교수 ․ 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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