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건축, 이상한 아이콘
중앙일보, 2011.8.16, 오피니언, [삶의 향기]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306/5978306.html
산자락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유리로 감싼 건물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앞 뒤 창문을 열면 마파람이 시원하게 통하련만 아예 개폐 창문이 없거나 쪽창이 고작인 경우가 많다. 작열하는 태양열을 고스란히 받는 유리 상자를 에어컨으로 어렵게 식혀야 한다. 최근 유리 건축을 둘러싼 찜통 논란이 일고 있다. 주변의 건축인들에게 “왜 유리 건축에 집착할까요?”라고 물어 보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못 얻었다.
서양건축 역사에서 가장 큰 숙제는 더 크고, 더 높고, 복잡하면서도 햇볕이 드는 따사한 내부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창을 크게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딕 교회의 창을 크게 하다 보니 지붕이 주저앉는 사고도 다반사였다. 이런 기술의 딜레마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19세기의 철근콘크리트와 철골구조였다. 이제 벽에 큰 구멍을 내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름이 1.5미터가 넘는 판유리를 생산하자 건축 혁명이 가속화됐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두꺼운 벽에서 해방된 서양건축을 과시했다.
유리창에 대한 갈망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대 말 떨리는 목소리로 현인은 <서울야곡>에서 이렇게 불렀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쇼윈도. 절대 빈곤에 허덕이던 시대에 얼마나 낭만적인 말이었던가.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투명한 창은 소비 공간의 상징이 되었다. 커피숍, 부티크, 헤어살롱 앞에서 상품만이 아니라 소비하는 사람들의 실루엣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봄과 보임의 스펙터클. 쇼윈도의 덕분이다.
고층 건물의 투명 창은 조망을 권력화하기도 한다. 창이 커지고 높이 올라갈수록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장벽은 오히려 높아진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꼭대기 층의 사무실이나 주상복합 아파트의 거실을 보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기에 창은 얼마든지 투명해질 수 있다.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밖의 경치를 소유한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유지태는 이런 창을 배경으로 고독한 몸짓을 한다.
공공 건축에 감초처럼 따라다니는 ‘랜드마크’와 유리가 결합하자 ‘이상한 아이콘’이 되었다. 공공 건축의 설계안은 한 번에 그것도 짧은 시간의 심사로 선정한다. 매끈하고 세련된 이미지, 저녁노을을 반사시키는 환상적 분위기까지 보여주는 유리 건축을 발주처도 은근히 원했고 건축가들도 따랐다. 한때 유리 커튼월이 없는 설계안은 공모전에서 당선 가능성이 적다고 컴퓨터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건축가를 조언하는 우스운 뒷얘기가 있었다.
이론상으로 유리 커튼월은 겨울에는 태양열을 흡수하고 여름에는 차단할 수 있는 현대식 공법이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려면 치밀하고 체계적인 기술력과 팀워크가 뒷받침돼야 한다. 문제는 심사에서 뽑힌 건축 설계안이 시공 과정에서 기술은 희석되고 이미지만 남는 것이다.
최근 정부는 공공 건축의 창 면적을 50% 미만으로 제한하는 지침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깊숙한 내상의 부위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과 같다. 창의 ‘면적’보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건물의 총체적 ‘성능’이 문제다. 유리 건축의 찜통 논란을 형태의 문제로 가두지 말고 공간과 기술 혁신의 문제로 끌고 나가야 한다.
김성홍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