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 속의 상상력
중앙일보, 2012.1.17, 오피니언, [삶의 향기]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702/7150702.html
요즘 날씨에 잘 어울리는 책 한 권을 붙잡고 있다. 50세의 나이로 요절한 스웨덴의 스릴러 작가 스티그 라르손이 쓴 ‘밀레니엄’ 시리즈의 첫 권이다. 최고 선진국으로 꼽히는 스웨덴에 도사리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을 소설 형식을 빌려 고발한 세 권의 소설은 전 세계에 무려 6500만 부가 팔렸다. 최근 이 소설의 스웨덴판과 할리우드판 영화가 모두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그런데 묵직한 사회 비판 메시지만 갖고는 그의 소설이 이처럼 인기를 끌 수 없었을 것이다. 개성이 뚜렷한 남녀 주인공과 치밀하면서도 긴장감이 넘치는 이야기 구조, 여기에 영․미권 블록버스터 작가들에게서 맛보기 어려운 북유럽 특유의 스산함이 녹아 있다. 첫 책의 영문판은 손바닥 크기의 ‘페이퍼백(문고판)’으로 644쪽에 달한다.
전 세계 주요 공항 서점에서 이런 문고판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화려한 표지, 좋은 종이, 짧은 글, 큰 서체에 익숙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이런 문고판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영문판 ‘해리포터’ 한 권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네 권으로 나누어야 할 정도로 두꺼운 책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툼한 소설을 견디는 독자는 상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림이 없어도 머릿속에서 시각을 불러일으키는 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많은 책은 이런 자발적 연상작용을 반감시킨다. 연상의 힘은 창의력과 맞물려 있다.
2년 전 뉴스위크지는 창의력의 위기를 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 텔레비전과 비디오게임이 어린이들의 창의력 지수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주어진 이미지를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사람은 자발적 ‘시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창의력의 저하로 이어진다. 창의력은 추상과 구상, 분석과 상상의 영역을 좌뇌와 우뇌가 분주히 오가는 순간에 발생한다고 한다. 리더십을 위한 미래의 최고 역량은 단연 창의력이 될 것이라는 CEO 1500명의 의견도 실렸다.
학기가 끝날 무렵 학생들은 방학 동안 어떤 건축 책을 보면 좋겠는지 묻곤 한다. 새내기 선생 시절과 달리 나는 주저 없이 사진과 그림 위주의 건축 작품집을 피하라고 한다. 또 장르는 상관없으니 며칠 만에 읽기 어려운 두꺼운 책과 씨름해보라고 권한다. 건축의 창의력은 ‘눈’과 ‘손’이 아니라 ‘머리’와 ‘엉덩이’에서 나온다는 말을 덧붙인다. 머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하는 생각의 힘이고, 엉덩이는 의자에 오랫동안 붙어 앉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이때 책은 머리와 엉덩이를 훈련하는 훌륭한 도구다. 세계적 건축가 중에는 다른 분야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꽤 있다. 현재 가장 혁신적 건축가로 평가되는 네덜란드의 렘쿨하스는 건축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시나리오 작가와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그의 독보적 존재감은 저술과 설계라는 두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하버드대학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린 책 목록이 보도된바 있는데 조지오웰의 ‘1984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토스토엡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인내가 필요한 두꺼운 인문서적, 그것도 고전이 10위권에 들어있다. 기본을 갖춰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다.
서점가는 1월이 비수기라고 한다. 이번 겨울 방학 동안 자녀의 창의력을 돋우고자 한다면 거실의 텔레비전을 치우고 무채색 종이에 쓰인 초장편 소설에 함께 빠져보는 것이 어떨까.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 / 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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