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지대에 답이 있다
『문화/과학』 69, 문화이론전문지, 2012 봄, 문화과학사, 98-105쪽
2012년 한국, 우리가 사는 꼴_공간 경험의 변화
지난 해 건축·도시 분야의 신간 서적에서 나타난 큰 흐름은 단연 아파트에 대한 각성과 대안 모색일 것이다. 그 중에서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책은 ‘땅콩 집’으로 잘 알려진 『두 남자의 집짓기』와 아파트 전문가 교수 둘이 쓴 『아파트와 바꾼 집』이다. 1) 두 책은 단독주택에 대한 중산층의 갈망이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땅 고르기와 건축가 찾기부터 관리비 내역까지 집짓기에 관한 모든 정보를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줌으로써 모험을 감행할 용기를 주었다. 이 책에 영향을 받아 실제 모험을 성공한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책이 던진 의미는 가족 단위의 ‘아파트 탈출 성공기’보다는 아파트에 대한 무작정 비판을 넘어 주거 형식의 대안을 실천의 방식으로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실제 두 책의 저자들은 아파트를 싸잡아서 비난하지 않는다. 아파트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분하고, 아파트 이외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점에서 두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이제는 아파트 대신 전원주택의 시대가 왔구나’ 식의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실제 땅콩 집과 아파트와 바꾼 집은 전원주택이 아니라 택지개발지구로 조성된 도시 지역에 지은 다가구주택과 한 쌍의 단독주택이다. 즉 두 책은 도심의 대단지 아파트와 전원에 홀로 선 단독주택의 중간쯤에 있는 집합형 주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과학』의 이번 특집 의도는 ‘우리가 사는 꼴’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냄으로써 그 메커니즘을 바꿔낼 필요성을 공감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소재는 아파트, 초고층건물, 도시화다. 하지만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아파트 공화국』에서 반복적 상자에 중독된 한국인을 타자의 시선으로 신랄하게 두드린 이후 아파트는 사회, 문화학계의 비판의 단골 메뉴가 된지 오래다. 아파트에 대한 원론적인 비판은 이제 충분하다고 본다. 필요한 것은 현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다양한 삶의 꼴을 제시하는 것이다.『두 남자의 집짓기』와 『아파트와 바꾼 집』이 던진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30개 꼭지로 엮여질 이번 특집에서 건축학자로서 나는 왜 아파트와 초고층 건물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두 건축 유형의 어떤 점이 문제인지를 다시 한 번 짚고자 한다. 대안을 말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아파트 단지와 길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서울의 인구는 157만 명이었다. 1960년에는 245만 명에 이르더니, 산업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5년에는 347만 명, 1980년에는 837만 명, 1991년에는 1,090만 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시의 도시 계획 구역이 1963년 2배로 확장된 이유도 있지만 세계 도시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폭발적 도시화였다. 도시화를 이야기 할 때 예로 드는 곳이 런던, 파리, 뉴욕이다. 19세기 초 90만 명이던 런던의 인구는 19세기 말에는 450만 명으로 늘어났다. 100년 간 360만 명이 늘어난 것이다. 같은 기간 동안 파리는 200만 명, 뉴욕은 334만 명이 늘어났다. 유럽과 미국이 인구 집중으로 인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새로운 도시 모델을 구상한 시기다. 한 세기 늦게 도시화를 겪기는 했지만 서울이 겪은 도시 인구 집중은 런던, 파리, 뉴욕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60년부터 1980년까지 불과 20년 동안 무려 592만 명이 늘어났던 것이다.
서울 격동의 50년을 기록한 손정목은 1960년에서 1980년까지 매일 800명이 농촌에서 서울로 들어왔다고 환산했다. 매일 20층 아파트 한 동을 지어야한 수용할 수 있었던 인원이었다는 것이다.2) 800명을 4인 가구로 나누면 200채가 필요하고, 이를 20층으로 나누면 10채가 된다. 즉 한 층에 4인가구가 살 수 있는 10채가 20층으로 쌓인 아파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가 서울에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가 아니라 1970년대 이후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는 1962년 마포구 도화동에 들어선 마포아파트였다. 아파트를 질이 낮은 저소득층 주택으로 여기던 때였다. 그러다가 1970년 한강맨션 아파트, 1972년 반포1단지 주공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대단위 아파트가 봇물처럼 건설되기 시작했다.3)
그렇다면 대단위 아파트 건설 이전에 서울을 크게 바꾼 것은 무엇이었을까. 불규칙한 필지를 합치거나 나누어 반듯반듯한 도시 조직으로 정리하고 그 위에 집을 짓게 했던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이다. 사업자는 여러 필지에서 땅을 조금씩 떼어 내어 길, 광장, 공원, 하천과 같은 공공의 땅을 만든다. 소유자는 자신의 필지는 줄어들지만 도시 기반 시설로 땅값이 상승하는 혜택을 받고 사업자 역시 많은 여분의 땅을 확보하여 이익을 보는 것이다. 재정이 부족하던 공공 기관의 입장에서 큰돈 없이 택지와 공공부지도 확보하고 민간 택지도 조성하는 최선의 도시계획 수법이었다. 1960년대 강북에 집중되었던 구획 정리 사업은 1970년대에는 강남으로 옮겨 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구획 정리 사업 지구의 면적을 합하면 현재 서울 시가지 면적의 절반에 육박한다. 구획 정리는 엄청난 양의 택지를 공급하는 위력을 발휘했지만 1970년대 후반 토지 투기라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낳았다.4)
뿐만 아니라 구획정리 사업으로 조성한 땅에 지은 단독주택은 주택난과 부동산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근본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했다. 한국에서 건축물의 경제적 가치를 환산하는 가장 쉬운 잣대는 땅값과 용적률이다. 용적률은 주어진 땅의 면적과 그 위에 서는 건축물의 연면적의 비율을 의미한다. 용적률은 도시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용적률이 낮은 단독주택은 높은 인구밀도와 낮은 건축 밀도의 괴리를 해소하지 못했다. 결국 집을 쌓아서 높게 많이 짓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바로 해답이었다.
아파트 공급의 주된 수단은 1980년 제정한「택지 개발 촉진법」(택촉법)으로 도시 계획의 위에 군림했던 무소불위의 법이었다. 택촉법은 구획 정리 사업과 달리 땅의 소유권을 완전히 지우고 백지 상태에서 도시를 그리는 방식으로 1980년대 아파트의 대량 공급의 수단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기존 아파트를 부수고 더 높고 크게 짓는 재건축 사업이 아파트 건설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이렇게 지은 아파트 단지의 용적률은 200% 이상으로 단독주거지에 지었던 단독주택, 다가구 주택, 다세대 주택 연립주택의 평균 용적률보다 높다. 예를 들어 강남구와 서초구의 6개 아파트 지구의 전체 평균 용적률은 236%이다.
아파트를 비판할 때 흔히 무미건조한 상자 갑 모양을 이유로 든다. 그래서 꼭대기에 이상한 모자를 쓴 것 같은 아파트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처방은 아파트의 문제점을 시각적 형태에 가두는 단견이다. 대단위 아파트의 문제는 비슷한 구조의 집을 반복시키는 건축설계가 아니라 길을 소멸시키는 폐쇄적 단지계획에 있다. 나는 다른 책과 글에서 구체적 사례를 들어 왜 아파트 단지가 길을 없애고 있는지 해부한 바 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엄밀히 말해 공적인 도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는 재개발과 재건축 단지의 일부를 기부채납 받아서 단지 밖의 길을 넓히고, 개발업자와 건설사는 땅을 떼어 주는 대신 단지가 조성되기 전에 있었던 길을 없애고 ‘사도’를 만든다. 이렇게 하면 여러 높이와 층수를 제한하는 법적 요건을 피할 수도 있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서울의 많은 땅에서 좁은 길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대로는 더 넓어지고 곧게 펴졌지만 도시의 깊숙한 곳 까지 스며들었던 길의 세포조직은 지워졌다.5) 그 결과 우리 도시에는 수많은 도시의 섬이 생겨나고 있다. 단지가 커질수록 단지 내의 집값은 올라가고 경제적 이익에 기초한 주민의 결속력은 강해진다. 그러나 도시 공간은 점차 단절되어 간다. 상자모양의 판상형 아파트가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모여서 만드는 단지 안에 공적인 길이 없다는 데 있다. 길의 쇠퇴는 공동체의 쇠퇴를 의미한다.
초고층 건물의 저층부 6)
초고층건물의 문제도 크기와 높이가 아니라 도시와의 관계에 있다. 즉 건축과 길의 소통 문제다. 고층건물이 군집을 이루는 곳은 오히려 도시 공간의 효율성을 높이고 활력을 불어 넣는다. 마천루의 대명사 뉴욕과 시카고의 도시 경쟁력은 몇 개의 초고층건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층건물을 좁은 공간에 집약시킴으로써 생기는 상호 간의 긴밀한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이로 인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고밀도의 업무환경과 독특한 보행문화가 형성되었다. 또한 고밀도 건축군은 도시 전체의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 맨해튼과 교외 간의 자동차 통행이 21% 줄어들자 맨해튼의 교통 에너지가 무려 5백%나 줄어든 연구 결과가 있다. 도심의 밀도가 높은 유럽, 싱가포르, 홍콩, 일본 도쿄가 자동차에 의존적인 미국과 호주, 심지어 개발도상국인 태국 방콕과 인도 자카르타보다도 훨씬 적은 교통 에너지를 소비한다. 고층건물 하나가 아니라 고층건물의 집합이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최근에 지어지고 있는 초고층 건물은 이런 군집화 대신 거대 복합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높아지고, 커지면서 주변의 건물과의 멀어진다. 아파트 단지가 울타리를 치면서 도시의 섬이 되는 것처럼 초고층 거대 복합 건축은 그 자체로서 도시 속의 섬이 되고 있다. 근대건축의 거장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1935년 ‘빛나는 도시’ 개념을 통하여 고층건물과 도시 와의 새로운 관계를 제시했다. 땅의 5%에는 고층 건축물이, 10%에는 저층 주택이 들어서고 나머지 85%는 녹지다. ‘빛나는 도시’의 고층 건물 밑에는 길 대신 구불구불한 공원이 펼쳐진다. 블록의 개념도, 필지의 개념도 사라졌다. 전원 도시 위에 고층 건물을 듬성듬성 세우는 구상이었다. 그래서인지 대서양 건너편 뉴욕에서 자신의 꿈이 선점되자 맨해튼의 마천루를 격렬히 비판했다. 르코르뷔지에가 유럽의 역사도시에서 이루지 못한 꿈은 제3세계에서 현실화되었다. 하늘로 마천루가 치솟으면서 지상의 여유로운 땅은 녹지와 공원이 되었다. 산업화 도시에 염증을 느꼈던 사람들은 미래 도시의 대안이라고 반겼다. 하지만 높은 건물 아래의 길은 점차 일상의 삶과 단절되어갔다.
2010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51층 이상의 초고층이 19개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123층 높이의 잠실 제2롯데타워를 비롯해 1백 층 이 넘는 초고층건물을 5개 이상 계획하고 있거나 건설 중이다. 초고층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산업에 활용하기 위한 국제 경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높이와 크기만의 경쟁은 이제 한물간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고층건물이 모여서 이루는 도시문화의 응집성과 화석에너지의 소비를 줄이는 도시 건축적 차원의 내실이다. 땅 위에서 아무리 요란한 실험을 해도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수직 동선의 종점인 지면으로 내려와야 한다. 높은 건물이 도시와 만나는 곳은 결국은 1층이고, 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곳도 꼭대기가 아니라 저층부다. 건축의 저층부와 길이 살아야 한다.
중간건축이 살아야 한다
도시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다. 도시도 성장하고 쇠락하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이, 청년, 노인이 공존하는 곳이 생명력 있는 도시다. 하지만 속전속결로 만드는 신도시나 재개발단지, 거대한 복합건축은 하루아침에 성인들을 집결시키는 것과 같다. 이런 곳은 담금질된 문화의 깊이를 축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새로운 문화를 진동하는 힘은 적지만 다양한 것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성된다. 우리가 수십 년간 지우려고 했던 중간지대에 그 답이 있다.
중간지대는 우리 도시의 가장 보편적인 곳이면서도 벽으로 에워싸인 거대한 아파트 단지, 상업 자본에 종속된 공룡 복합건축, 각종 이방지대에 가려졌던 사이 공간을 말한다. 용도상으로는 현재 서울시 전체 땅의 약 1/4를 차지하는 ‘제2종 일반주거지역’이 중간지대다. 서울시의 지도를 펼쳐놓고 이곳을 찾아보면 대부분 대로변 뒤쪽의 이면도로를 끼고 있는 도시의 깊숙한 곳이다. 이런 곳의 길모퉁이에 면하면서, 승강기가 없어도 오르내릴 수 있는 2~4층 높이의 건축을 나는 중간건축이라 부르고자 한다. 중간건축은 용적률이 아파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 도시가 필요로 하는 공간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중간건축은 주거·상업·업무 공간이 섞여 있어 살며 일하며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이며,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서, 미래의 젊은 건축가들을 위해서 도시의 저변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중간건축의 조합이 블록 단위의 집합적 도시 건축을 형성해나가고, 이곳이 젊은 건축가들이 새로운 디자인을 실험하는 저변이 되어야 한다. 작지만 문화를 촉발하는 방아쇠 건축이 여기에서 등장해야 한다.
이런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중간건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난관이 많다. 주차장, 소방기준 등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과 제도의 손질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대의 난관은 정치와 건설 산업계의 복잡한 이해관계다. 시장이나 구청장 등 지방자치단체장의 입장에서 보면 중간건축은 정치적 구호로 쓸 만큼의 화려함이 없는 대신 잡다하고 소소한 민원이 기다리고 있다. 건설 산업계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중대형 건설사와 대형 건축사사무소의 입장에서도 중간건축에서 별로 얻을 게 없다. 이런 작은 규모 사업으로는 대형 조직을 유지할 만큼의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미디어의 조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스타 건축가들에게도 그리 매력이 없다. 중간건축의 속성상 새로운 형태와 기술을 과감히 실험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 건축주는 눈에 띄는 건축을 원하기보다는 수익률을 꼼꼼히 따지는 실리형 사업가일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해당사자에게 중간건축은 정치·경제·문화적 상품성이 강렬하지 않다. 이익과 수혜가 서서히, 간접적으로, 저변의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중간건축이 살아야 하는 역설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지난 40년간 경제를 떠 받쳐오던 건설 신화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이제 개발과 성장 중독증, 정치적 구호가 된 요란하고 얄팍한 디자인이 묘하게 결합된 도시건축을 뒤 돌아 볼 때가 되었다. 크고 높은 건물을 많이 지을수록 삶도 풍성해질 것이라는 ‘건설신화’의 반대편에는, 삶의 공간도 상품처럼 예쁘게 꾸밀 수 있고, 곧 돈이 된다는 ‘디자인 경제주의’가 있다. 둘은 달라 보이지만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은 도시건축을 너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한쪽은 가까이서 보되 겉만 본다. 고층건물 꼭대기에서 내려가 길로 걸어가야 한다. 화장한 건물의 얼굴에 현혹되지 말고, 도시의 뒤편, 이면도로에 서 있는 중간 건축의 창과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주거와 상업, 그리고 문화가 공존하는 중간지대의 중간건축을 살려야 한다.
건축의 혁신은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는 종이(tabula rasa) 위에 완전히 새로운 것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의문을 품고, 뒤집어보고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가 만들어 낸 이론을 빌리지 않고 가장 보편적인 우리 현실의 도시공간에서 답을 찾아내야 한다. 한국 건축의 미래는 중간건축에 발을 담그고, 관찰하고, 해석하는 학자와 여기에서 실험을 모색하는 건축가들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포진하는가에 달려 있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 이글은 필자가 기존에 발표한 저서 및 기고문에서 발췌하여 특집의도에 맞도록 재집필 및 편집하였음을 밝힌다.
1) 이현욱, 구본준, 『 두 남자의 집짓기』, 마티, 2011; 박철수, 박인석 『 아파트와 바꾼 집』, 동녘, 2011.
2) KIM, Sung Hong & Schmal, Peter Cachola Eds., 『Megacity Network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Berlin: Jovis, 2007, p.43.
3) 박철수,『 아파트의 문화사』, 살림지식총서 224, 살림, 2006, p.8, p.33, p.53.
4) 김성홍,『도시 건축의 새로운 상상력』, 현암사, 2009, pp.264-266.
5) 김성홍,『길모퉁이 건축 : 건설한국을 넘어서는 희망의 중간건축』, 현암사, 2011, pp.264-272; 김성홍,『문화/과학 67호』, 문화과학사, 2011a, pp.247-259.
6) ‘초고층 건물의 저층부’와 ‘중간건축이 살아야 한다’는 다음의 책에서 주로 발췌, 편집하였다. 김성홍, 2011, p.10, pp.190-191, pp.31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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