ソウルの道と都市文化 서울의 길과 都市文化
アジア遊學, Intriguing Asia, No.34, 勉誠出版, 東京, pp.70-80. 2001.12 ,
都市의 日常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길이다. 길은 사람과 자동차가 그저 지나가는 經路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비록 직접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읽어내고 소통하면서 길을 사회적 장소로 만든다. 서울의 길도 예외가 아니다. 대로에서 그리고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삶의 모습은 서울이 자랑하는 궁궐이나 기념비적 건축보다 서울을 더 진솔하게 표현한다. 서울은 6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한강변을 중심으로 선사시대에 이미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백제의 첫 수도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三京의 하나인 南京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서울이 수도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자리잡으면서이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한반도의 중심이면서 풍수가 뛰어난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고려시대의 수도 개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뒤로는 북악산 앞으로는 한강을 배경으로 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고 4대문을 내었다. 성안에는 중국의 도시규범을 따라 宮闕과 宗廟社稷을 배치했으나 唐의 長安이나 일본의 京都와 달리 격자형 가로체계를 따르지 않았다. 몇 개의 주요 도로를 내고 자연지형, 방위개념, 풍수사상 등에 따라 집을 짓고 작은 길을 내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 후 서울은 숫한 외침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경제성장 등 격변의 시대를 거쳐왔다. 궁궐의 절반이상이 파괴되고 조선시대의 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성벽도 철거되었다. 1960년대 이후 강남이 개발되면서 한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의 이원구조로 변모한다. 단층한옥이 경관을 압도하던 서울은 이제 고층 아파트 숲으로 바뀌어졌다. 1980년대에는 서울의 주위로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서서 거대도시로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는 굽었던 길은 곧아지고 넓어졌다. 옛길이 없어지고 새 길이 들어섰다. 길의 변모는 도시의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600여년 전의 도시구조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사대문 안의 길과 서울의 또 다른 중심으로 떠오른 강남신도시의 길을 조명해보는 것은 서울의 삶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鐘路 - 600년 歷史都市의 現場
종로는 조선시대 서울의 등뼈 역할을 하는 길이었다. 사대문안에는 옛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종로의 역사에 견줄 바가 아니다. 종로는 조선시대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설치된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중에서도 종로1가 부근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雲從街라고 불리었다. 조선초 종로1가에서 종묘앞, 창덕궁앞에서 종로3가, 종각에서 광교까지의 길 양편에는 市廛行廊이라고 불리는 어용상점들이 들어섰다. 시전상점 하나의 규모와 형태는 당시 궁궐, 관아, 종묘, 사직에 비해 작고 초라했으나 행랑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가로경관은 수도 서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시전은 풍수지리와 같은 우주론적 질서보다 길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조선시대의 유일한 都市建築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종로거리로 행차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종로는 중세 유럽의 상업가로와 달리 경제, 정치, 문화를 통합한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와 전후복구기를 거치면서 종로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明洞이 종로를 견제하는 일본인 상업지로 등장하면서 종로는 민족자본의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하게된다. 종로는 정치와 문화면에서도 서울의 중심이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 정치의 중심, 문인과 예술인의 보금자리, 대학생의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 뒷골목 주먹의 각축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1970대 초에 본격화된 江南開發과 서울의 확장때문에 종로는 서서히 중심기능을 잃어갔다. 지게꾼, 우마, 전차의 느릿느릿함이 편리와 속도를 내세운 자동차에 압도당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사회를 통제했던 규범과 질서, 일제하의 공권력이 지나간 자리는 상업자본의 힘으로 대체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도심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어 서린동, 청진동, 공평동의 작고 불규칙한 필지가 재정비되었고, 그 자리에 대형 고층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시전행랑이 자리잡았던 곳에는 아직도 중층의 상업건축이 즐비해 있다. 건물의 전면 폭이 깊이보다 긴 평면은 격자형 도시에서 보여지는 폭이 좁고 깊이가 긴 평면과 대조를 보인다. 600여년전의 조선시대 시전행랑의 도시조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뒤에는 왕이나 고급관리들의 행차시 평민들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避馬길이 여전히 남아있다. 밤이 되면 이 곳은 음식점, 주점이 불을 밝혀 먹자골목으로 변신한다. 종로2가에는 육의전의 흔적인 주단가게가 남아 있다. 종각이 놓인 종로2가 네거리에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자본과 한국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던 최초의 화신백화점이 위용을 자랑했으나 1987년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헐리고 지금은 하이테크 이미지의 종로타워가 들어서서 새로운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건축가가 설계한 이 건물이 한국의 근대상업건축의 주춧돌 자리에 세워진 사실은 건축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창덕궁, 운현궁, 종묘와 같은 역사적 건축이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종로는 여전히 서울의 寶庫이다. 민주화운동, 시민운동과 같은 거리의 정치가 아직 살아있고 시민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鐘路는 아직 雲從街의 위용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과 北村의 韓屋住居地
종로2가와 이어진 인사동에는 회화, 고서, 골동품이 밀집하여 문화의 거리로 불린다. 인사동은 조선시대에 北村과 鐘路 사이에 위치하여 주로 中人들이 살았던 곳이었다. 1930년대에 인사동길 주변에 서적, 고미술상가가 계속 들어서면서 골동품거리로 자리잡게 되었고 1970년대에는 근대적 상업화랑이 들어서서 미술문화거리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1층 한옥의 앞을 열어 붓, 종이, 서화, 책자, 기념품을 진열하여 옛 정취를 풍긴다. 서울시는 바닥을 전통재료로 깔고 돌로 만든 벤치를 설치하여 걷고싶은 거리고 조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畵廊과 茶房이 점차 늘어나 골동품과 현대미술이 접목되는 거리로 바뀌고 있다. 인사동길을 따라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북촌이라 불리는 삼청동과 가회동이 나타난다. 간판으로 덮인 거리전면의 상점건축을 뒤로하면 기와로 덮인 단층 한옥들이 빼곡이 들어찬 동네가 펼쳐진다. 북촌은 도심을 동서로 흐르는 청계천 이북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북촌에는 궁궐 주변에 고급관리와 아전들이 살았고 남촌에는 빈한한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삼청동, 가회동일대는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에 놓인 지역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와 관청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1920-30년대에는 대규모 전통한옥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소규모로 개조한 도시형 한옥이 등장했는데 북촌은 도시한옥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당시 지어진 한옥들은 가운데 마당을 두고 ㄷ字나 ㅁ字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상류주택과 달리 담이 없이 건물자체가 곧 인접건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릉지의 한옥 지붕과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개화기 서양인들에게는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 1970년대 개발붐 곳에서도 북촌은 다행스럽게 살아남았고 현재 서울시는 이 곳을 전통한옥지로 보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가 문인들과 지식인이 입주하면서 부활했듯이 신도시로 빠져나갔던 사람들이 삶의 향기를 찾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貞洞길 - 舊韓末 風雲의 거리
정동길은 德壽宮 남쪽 돌담길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신문로와 만난다. 정동은 조선시대 太祖의 繼妃 神德王后의 貞陵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정동은 조선말 격동기에 열강의 공관, 호텔, 학교 등이 있었던 곳으로 정치와 외교의 주무대였다. 덕수궁에는 많은 전각과 누각이 있었으나 甲申政變후 영국, 미국, 러시아에게 분양하면서 줄어들었다. 1910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면서 신문로로 통하는 길이 덕수궁을 관통하게 된다. 덕수궁 바로 옆에는 미국대사관저가 높은 담으로 에워싸여 있어 정치거리의 흔적을 보여준다. 국내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이 왕궁을 떠나 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사건이 俄館播遷인데 그 현장이 정동길에 있었다. 이외에도 정동길에는 19세기말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가 들어서서 기울어 가는 조선과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이 지역은 1970년 이후 불어닥친 도심재개발의 영향을 받지 않아 도심에서 가장 걷고 싶은 거리로 바뀌었다. 서울시는 최근 정동길의 보도를 넓히고 공원을 만들었다. 덕수궁 남쪽에는 시청별관이 자리잡고 길을 따라 공적성격의 저층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정동길은 대형 호텔과 인접하여 서울을 찾는 외국인이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시청앞 광장의 자동차물결을 피해 정동길로 들어서면 도심속의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구한말 아픈 역사의 거리가 역설적으로 도시민의 쉼터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大學路 - 象牙塔에서 商業街路로
종로5가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한 블록을 올라가면 대학로와 그 오른쪽 동숭동을 만나게 된다. 동숭동은 도로 폭이 10M를 넘지 않는 서울 최초의 보행자 중심의 격자형 계획街區이다.
이곳에는 일제시대에는 경성제대가, 해방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이전하면서 이 지역은 고급주택지 필지로 분할되어 팔려나갔다. 동숭동에는 기존의 간선도로변 도시설계와는 구별되는 街區중심의 도시설계가 최초로 적용되었다. 70년대 후반에는 강북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장과 전시장이 들어선다. 수많은 지사, 문인,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아 한국의 지성과 예술을 논한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이 지역은 급속한 지가의 상승으로 주택가로서 더 이상 남지 못하고 급속히 상업화 되어간다. 1985년 서울시가 이곳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하면서 역설적으로 대학로가 고수하고자 했던 고급문화는 희석된다.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붉은 벽돌의 문예회관이나 샘터사옥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카페와 식당과 대조를 이룬다. 이곳의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에는 미국의 MTV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 실려있다.
동숭동이 80년대 중반이후 강북 소비문화의 집결지로 떠오르는 것은 순수건축을 표방하는 건축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곳이 한국 현대건축의 실험장에 적합한 도시조직으로 변화되어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75년 당시 필지의 크기와 건축법의 적용은 건축물의 새로운 배치를 가능하게 했다. 남북축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100평 정도의 장방형 필지는 주택을 북측에, 마당을 남측에 놓는 배치형태를 만들어 낸다. 자연히 진입은 동측 혹은 서측으로 결정된다. 필지의 모양이나 주택의 내부평면은 기존의 도시조직이나 전통주택과 달라졌지만 向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취향은 그대로 남아 특이한 건축물의 배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도심의 고급주택지로서 건축가에게는 매력있는 실험의 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태생부터 인구 천만이 넘은 서울에서 단독 주택지로는 적합하지 않는 도시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문예회관, 미술회관 등의 기존 공연전시 시설과 연계되어 걷기에 적당한 보행자 망을 형성하게 된다.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면서 보행자 망으로서의 성격은 폭발적인 가속이 붙는다. 자연히 지가가 상승하고 주택지로서의 매력은 떨어진다.
80년대 이후 동숭동에 새로이 세워지거나 주택에서 개조된 복합상업건축물은 기존의 필지를 유지하거나 합필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향이 주택의 배치를 결정했다면 길은 상업시설의 공간구성을 지배하는 요소다. 주택의 남측마당이 카페나 식당의 야외공간으로 바뀌고 주택의 측면이었던 곳이 얼굴로 바뀐다. 도로와의 관계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합필되고, 관통통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건축물의 깊이가 전면의 폭보다 큰 細長型 평면이 나타난다. 도로와는 독립적으로 지상층의 공간분화와 간판이 붙지 않는 외피의 표현도 가능해진다. 종로에 얼굴만 있는 건축물이 병렬해 있다면 동숭동에는 여러 면의 얼굴을 가진 건축물이 가능해 졌음을 뜻한다. 80년 이후 한국 현대 건축가들이 그 이전에는 주목을 끌지 못했던 소, 중형 규모 상업시설을 통하여 자신의 조형언어를 실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도시조직에 힘입은 것이었다.
70년대 중반의 동숭동 남쪽의 공연전시시설이 官주도 내지는 건축가의 의지로 이루어 졌다면 80년대 후반의 동숭동 북쪽의 상업화의 주역은 민간이다. 그들에게 '문화'는 정부에서 하달된 지침 같은 것도 아니고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이나 조각품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문화의 거리'에서 '소비의 거리'로의 변화는 건축법이나 행정력으로 막을 수 없고, 문인, 예술가, 건축가의 비판으로는 고쳐질 수 없는 사회, 경제적 법칙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칙은 동숭동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공간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다에 섬처럼 고립된 강남의 예술의 전당이나, 전철과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서도 코끼리 열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자동차에 소외된 젊은이에게는 먼 곳의 이야기이다. 젊은이들은 걷고 싶고, 걸으면서 일상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동숭동의 거리는 그 자체로도 공연장이며 전시장이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보다 그 시대의 문화를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관객이자 스스로 배우가 되는 것이다.
동숭동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동시에 흡수하여 만들어 낸 한국판 탈근대주의의 단면이다. 우리가 문화를 물질적, 정신적, 지적, 그리고 삶의 방식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동숭동은 문화의 거리에서 퇴행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문화의 범주가 다양해지고 광범위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곳을 찾는 10대들에겐 미술회관에서 산수화를 감상하고 국적불명의 식당에서 파스타나 피자를 먹는 것에 아무런 문화적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파스타나 피자는 산수화 때문에 존재가 가능하고, 산수화는 파스타나 피자 때문에 대중에게 더 다가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숭동은 이미 일제강점부터 조선시대와는 다른 도시조직을 경험하기 시작하여 70년대 후반 서구의 도시조직을 부분적이나 이식 받아 왔다. 지금도 동숭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비공간의 변화는 광고나 잡지에서 보이는 이미지보다 냉혹한 사회, 경제적 법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일상의 문화는 이 곳이 지닌 학문과 고급예술의 전당으로서의 역사와 함께 역동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압구정동과 로데오거리: 消費文化의 排出口
현대 서울의 가장 큰 특징은 한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이 서로 다른 社會文化地圖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550년 이상 서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했던 강북은 1960년대 이후 새롭게 개발된 강남에 의해 불과 20여년만에 그 중심역할을 내주게 된다. 1970년대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한국에는 신흥부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주로 강남을 무대로 삼았다. 강남은 이제 단순한 지리적 명칭을 넘어 한국사회의 특정한 문화를 지칭하는 코드로 인식되고 있다. 압구정동은 강남-강북의 이분법적 도시 패러다임이 시작된 진앙지이자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소비공간을 대표하는 곳이다. 1960년대 이전 논바닥에 불과 했던 압구정동은 영동개발로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75년 23개동의 현대아파트가 1978년에는 33개동의 한양아파트가 들어서서 이른바 압구정동 아파트지구를 형성하게 된다. "押鷗亭"이라는 이름은 세조반정에 참여한 정난공신 한명회가 부귀공명을 버리고 갈매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의 정자를 세운 것에서 에서 유래되었다. 현대아파트는 1980년대 중반에 강북을 누르고 한국 최고의 부촌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곳이 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주거공간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는 도시구조가 한 몫을 하게된다. 불규칙하고 구불구불한 강북과 달리 압구정동은 격자형 街區로 계획되었고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압구정로를 맞대어 처음부터 사회계층의 분리가 용이한 도시구조를 하고 있었다. 한강은 강북의 옥수동과 같은 중산층의 주거로부터 압구정동을 차별시키면서 자연조망을 제공해 주는 이중기능을 해왔던 것이다. 1979년과 1985년에 놓여진 성수대교와 동호대교, 그리고 지하철 3호선은 이 곳을 교통의 요지로 만들었다. 이곳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분당선 지하철이 완공되면 압구정동과 강남을 잇는 축이 강해질 전망이다.
1980년 초반부터 압구정 아파트 건너편의 단독주택 필지에 카페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한다. 1980년 대 중반에는 유명 패션샵, 미용실, 모델에이전시, 광고제작사, 이벤트회사, 사진스튜디오가 강북에서 이전해 오면서 압구정동은 부촌에서 새로운 소비공간으로 변모하게된다. 압구정동으로 지칭되는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보면 압구정동의 범위를 넘어선다. 동쪽으로 로데오거리의 일부는 청담동에 속하며, 서쪽으로 현대백화점 건너편에서 시작되는 패션샵, 화랑, 사진스튜디오가 밀집한 한나래길의 일부는 신사동에 속한다. 이 범주 내에는 학교, 공원, 교회, 소규모아파트, 단독주택이 있지만 이는 압구정동을 지배하는 상업화에 힘에 언제라도 함락될 수 있는 것들이거나 이미 상업자본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실제로 압구정동의 진면목은 이면도로에 나타난다. 갤러리아 백화점 동관과 서관 건너편에서 평행으로 펼쳐지는 로데오거리는 선릉로의 이면도로이며, 압구정로와 도산대로의 이면도로인 보람길과 꽃다이길 역시 단독주택에서 고급 음식점, 카페들로 변해가고 있다. 현대백화점 건너편 700여 미터의 한나래길은 논현로의 이면도로이다. 대로와 대로를 끊기지 않고 연결하는 것이 이들 이면도로의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로데오 거리는 압구정동의 소비공간을 압축하는 길이다. 로데오거리는 미국 로스엔젤리스의 비버리힐스에 있는 유명한 패션 거리의 이름을 본떠 지은 것이다 로데오 거리의 진면목은 밤에 드러난다. 10대와 20대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서로 확인하고자 소비하며 밤을 보낸다. 동경의 하라주꾸(原宿)과 시부야(涉?谷)를 섞어 놓은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도시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도시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압구정동 소비공간의 특징이다.
압구정동의 소비문화는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이후 새로운 개념의 건축을 태동시키는 우군 역할을 한다. 청담동 사거리에서 갤러리아 백화점에 이르는 압구정로 양편은 하나의 패션샵으로 구성되는 중층상업건축이 군집을 이룬다. 상점, 식당, 사무실, 유흥시설이 혼재되어 간판으로 뒤덮인 타 지역과 다르게 단일화된 이미지의 도시경관을 보인다. 새로운 재료로 포장된 새로운 건축유형이 압구정동을 비롯한 강남 일대에 속속 등장했다. 90년대 등장한 압구정동 건축은 상업자본주의에 의존하면서도 그 힘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하는 이중의 숙제를 안고 있다. 그 힘에 쉽게 굴복할 경우 건축은 사회계층을 공간으로 가르는 불평등 공간구조에 일조하게 될 것이나 반면으로 그 저항의 힘이 지나칠 경우 소비공간을 만드는 건축행위는 처음부터 불가능 할 것이다. 압구정동 건축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긴장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歷史都市와 未來의 길
도시의 매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물리적, 문화의 총체적 힘에서 나온다. 서울은 계획도시이지만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도시와 다른 독자성을 지녀왔다. 중국의 고대도시에서 도성의 구성원리를 본 받았지만 산과 강의 지형과 경관, 국가의 이념과 철학에 부합하는 유기적 도시를 구축했다. 근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도시계획이 기존의 도시위에 중첩되었고 그후 구미의 도시계획이 강남에 실험되었다. 위에서 아래로의 거시적 도시계획 이면에는 도시민 각자가 만들어내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미시적 도시변화도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제 서울은 하나의 유형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모자이크의 도시이다. 강북에는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골목길이 남아 있는 반면 강남에는 곧은 대로가 나 있고 그 위로는 자동차 전용고가도로가 달린다. 간판과 노점상이 난립한 상인들의 외침이 여전한 재래시장 옆에는 초현대식 고층건물이 불을 밝힌다. 왕과 사대부를 위한 작은 수도로 시작된 서울은 인구천만이 넘는 거대도시이면서 면적은 이웃나라 동경의 1/3밖에 되지 않아 세계에서 손꼽는 초고밀도시로 변했다. 서울의 길에서 펼쳐지는 일상은 절제되고 안정되었다기보다는 급속한 변화와 대면하고 있고 때로는 갈등을 분출한다. 더 좋은 삶과 자녀들의 교육환경을 쫒아 사람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유목민처럼 이동한다. 그러나 거대 서울의 활력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속도 그리고 잠복된 갈등에서 우러나온다. 역사도시 서울은 거대한 자본과 도시민의 욕구 앞에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金成洪 ソウル市立大學校 建築學部)
アジア遊學, Intriguing Asia, No.34, 勉誠出版, 東京, pp.70-80. 2001.12 ,
都市의 日常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길이다. 길은 사람과 자동차가 그저 지나가는 經路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비록 직접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읽어내고 소통하면서 길을 사회적 장소로 만든다. 서울의 길도 예외가 아니다. 대로에서 그리고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삶의 모습은 서울이 자랑하는 궁궐이나 기념비적 건축보다 서울을 더 진솔하게 표현한다. 서울은 6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한강변을 중심으로 선사시대에 이미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백제의 첫 수도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三京의 하나인 南京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서울이 수도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자리잡으면서이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한반도의 중심이면서 풍수가 뛰어난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고려시대의 수도 개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뒤로는 북악산 앞으로는 한강을 배경으로 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고 4대문을 내었다. 성안에는 중국의 도시규범을 따라 宮闕과 宗廟社稷을 배치했으나 唐의 長安이나 일본의 京都와 달리 격자형 가로체계를 따르지 않았다. 몇 개의 주요 도로를 내고 자연지형, 방위개념, 풍수사상 등에 따라 집을 짓고 작은 길을 내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 후 서울은 숫한 외침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경제성장 등 격변의 시대를 거쳐왔다. 궁궐의 절반이상이 파괴되고 조선시대의 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성벽도 철거되었다. 1960년대 이후 강남이 개발되면서 한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의 이원구조로 변모한다. 단층한옥이 경관을 압도하던 서울은 이제 고층 아파트 숲으로 바뀌어졌다. 1980년대에는 서울의 주위로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서서 거대도시로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는 굽었던 길은 곧아지고 넓어졌다. 옛길이 없어지고 새 길이 들어섰다. 길의 변모는 도시의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600여년 전의 도시구조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사대문 안의 길과 서울의 또 다른 중심으로 떠오른 강남신도시의 길을 조명해보는 것은 서울의 삶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鐘路 - 600년 歷史都市의 現場
종로는 조선시대 서울의 등뼈 역할을 하는 길이었다. 사대문안에는 옛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종로의 역사에 견줄 바가 아니다. 종로는 조선시대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설치된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중에서도 종로1가 부근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雲從街라고 불리었다. 조선초 종로1가에서 종묘앞, 창덕궁앞에서 종로3가, 종각에서 광교까지의 길 양편에는 市廛行廊이라고 불리는 어용상점들이 들어섰다. 시전상점 하나의 규모와 형태는 당시 궁궐, 관아, 종묘, 사직에 비해 작고 초라했으나 행랑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가로경관은 수도 서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시전은 풍수지리와 같은 우주론적 질서보다 길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조선시대의 유일한 都市建築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종로거리로 행차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종로는 중세 유럽의 상업가로와 달리 경제, 정치, 문화를 통합한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와 전후복구기를 거치면서 종로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明洞이 종로를 견제하는 일본인 상업지로 등장하면서 종로는 민족자본의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하게된다. 종로는 정치와 문화면에서도 서울의 중심이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 정치의 중심, 문인과 예술인의 보금자리, 대학생의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 뒷골목 주먹의 각축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1970대 초에 본격화된 江南開發과 서울의 확장때문에 종로는 서서히 중심기능을 잃어갔다. 지게꾼, 우마, 전차의 느릿느릿함이 편리와 속도를 내세운 자동차에 압도당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사회를 통제했던 규범과 질서, 일제하의 공권력이 지나간 자리는 상업자본의 힘으로 대체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도심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어 서린동, 청진동, 공평동의 작고 불규칙한 필지가 재정비되었고, 그 자리에 대형 고층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시전행랑이 자리잡았던 곳에는 아직도 중층의 상업건축이 즐비해 있다. 건물의 전면 폭이 깊이보다 긴 평면은 격자형 도시에서 보여지는 폭이 좁고 깊이가 긴 평면과 대조를 보인다. 600여년전의 조선시대 시전행랑의 도시조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뒤에는 왕이나 고급관리들의 행차시 평민들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避馬길이 여전히 남아있다. 밤이 되면 이 곳은 음식점, 주점이 불을 밝혀 먹자골목으로 변신한다. 종로2가에는 육의전의 흔적인 주단가게가 남아 있다. 종각이 놓인 종로2가 네거리에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자본과 한국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던 최초의 화신백화점이 위용을 자랑했으나 1987년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헐리고 지금은 하이테크 이미지의 종로타워가 들어서서 새로운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건축가가 설계한 이 건물이 한국의 근대상업건축의 주춧돌 자리에 세워진 사실은 건축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창덕궁, 운현궁, 종묘와 같은 역사적 건축이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종로는 여전히 서울의 寶庫이다. 민주화운동, 시민운동과 같은 거리의 정치가 아직 살아있고 시민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鐘路는 아직 雲從街의 위용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과 北村의 韓屋住居地
종로2가와 이어진 인사동에는 회화, 고서, 골동품이 밀집하여 문화의 거리로 불린다. 인사동은 조선시대에 北村과 鐘路 사이에 위치하여 주로 中人들이 살았던 곳이었다. 1930년대에 인사동길 주변에 서적, 고미술상가가 계속 들어서면서 골동품거리로 자리잡게 되었고 1970년대에는 근대적 상업화랑이 들어서서 미술문화거리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1층 한옥의 앞을 열어 붓, 종이, 서화, 책자, 기념품을 진열하여 옛 정취를 풍긴다. 서울시는 바닥을 전통재료로 깔고 돌로 만든 벤치를 설치하여 걷고싶은 거리고 조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畵廊과 茶房이 점차 늘어나 골동품과 현대미술이 접목되는 거리로 바뀌고 있다. 인사동길을 따라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북촌이라 불리는 삼청동과 가회동이 나타난다. 간판으로 덮인 거리전면의 상점건축을 뒤로하면 기와로 덮인 단층 한옥들이 빼곡이 들어찬 동네가 펼쳐진다. 북촌은 도심을 동서로 흐르는 청계천 이북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북촌에는 궁궐 주변에 고급관리와 아전들이 살았고 남촌에는 빈한한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삼청동, 가회동일대는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에 놓인 지역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와 관청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1920-30년대에는 대규모 전통한옥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소규모로 개조한 도시형 한옥이 등장했는데 북촌은 도시한옥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당시 지어진 한옥들은 가운데 마당을 두고 ㄷ字나 ㅁ字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상류주택과 달리 담이 없이 건물자체가 곧 인접건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릉지의 한옥 지붕과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개화기 서양인들에게는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 1970년대 개발붐 곳에서도 북촌은 다행스럽게 살아남았고 현재 서울시는 이 곳을 전통한옥지로 보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가 문인들과 지식인이 입주하면서 부활했듯이 신도시로 빠져나갔던 사람들이 삶의 향기를 찾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貞洞길 - 舊韓末 風雲의 거리
정동길은 德壽宮 남쪽 돌담길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신문로와 만난다. 정동은 조선시대 太祖의 繼妃 神德王后의 貞陵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정동은 조선말 격동기에 열강의 공관, 호텔, 학교 등이 있었던 곳으로 정치와 외교의 주무대였다. 덕수궁에는 많은 전각과 누각이 있었으나 甲申政變후 영국, 미국, 러시아에게 분양하면서 줄어들었다. 1910년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면서 신문로로 통하는 길이 덕수궁을 관통하게 된다. 덕수궁 바로 옆에는 미국대사관저가 높은 담으로 에워싸여 있어 정치거리의 흔적을 보여준다. 국내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이 왕궁을 떠나 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사건이 俄館播遷인데 그 현장이 정동길에 있었다. 이외에도 정동길에는 19세기말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가 들어서서 기울어 가는 조선과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이 지역은 1970년 이후 불어닥친 도심재개발의 영향을 받지 않아 도심에서 가장 걷고 싶은 거리로 바뀌었다. 서울시는 최근 정동길의 보도를 넓히고 공원을 만들었다. 덕수궁 남쪽에는 시청별관이 자리잡고 길을 따라 공적성격의 저층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정동길은 대형 호텔과 인접하여 서울을 찾는 외국인이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시청앞 광장의 자동차물결을 피해 정동길로 들어서면 도심속의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구한말 아픈 역사의 거리가 역설적으로 도시민의 쉼터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大學路 - 象牙塔에서 商業街路로
종로5가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한 블록을 올라가면 대학로와 그 오른쪽 동숭동을 만나게 된다. 동숭동은 도로 폭이 10M를 넘지 않는 서울 최초의 보행자 중심의 격자형 계획街區이다.
이곳에는 일제시대에는 경성제대가, 해방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이전하면서 이 지역은 고급주택지 필지로 분할되어 팔려나갔다. 동숭동에는 기존의 간선도로변 도시설계와는 구별되는 街區중심의 도시설계가 최초로 적용되었다. 70년대 후반에는 강북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장과 전시장이 들어선다. 수많은 지사, 문인,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아 한국의 지성과 예술을 논한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이 지역은 급속한 지가의 상승으로 주택가로서 더 이상 남지 못하고 급속히 상업화 되어간다. 1985년 서울시가 이곳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하면서 역설적으로 대학로가 고수하고자 했던 고급문화는 희석된다.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붉은 벽돌의 문예회관이나 샘터사옥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카페와 식당과 대조를 이룬다. 이곳의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에는 미국의 MTV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 실려있다.
동숭동이 80년대 중반이후 강북 소비문화의 집결지로 떠오르는 것은 순수건축을 표방하는 건축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곳이 한국 현대건축의 실험장에 적합한 도시조직으로 변화되어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75년 당시 필지의 크기와 건축법의 적용은 건축물의 새로운 배치를 가능하게 했다. 남북축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100평 정도의 장방형 필지는 주택을 북측에, 마당을 남측에 놓는 배치형태를 만들어 낸다. 자연히 진입은 동측 혹은 서측으로 결정된다. 필지의 모양이나 주택의 내부평면은 기존의 도시조직이나 전통주택과 달라졌지만 向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취향은 그대로 남아 특이한 건축물의 배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도심의 고급주택지로서 건축가에게는 매력있는 실험의 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태생부터 인구 천만이 넘은 서울에서 단독 주택지로는 적합하지 않는 도시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문예회관, 미술회관 등의 기존 공연전시 시설과 연계되어 걷기에 적당한 보행자 망을 형성하게 된다.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면서 보행자 망으로서의 성격은 폭발적인 가속이 붙는다. 자연히 지가가 상승하고 주택지로서의 매력은 떨어진다.
80년대 이후 동숭동에 새로이 세워지거나 주택에서 개조된 복합상업건축물은 기존의 필지를 유지하거나 합필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향이 주택의 배치를 결정했다면 길은 상업시설의 공간구성을 지배하는 요소다. 주택의 남측마당이 카페나 식당의 야외공간으로 바뀌고 주택의 측면이었던 곳이 얼굴로 바뀐다. 도로와의 관계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합필되고, 관통통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건축물의 깊이가 전면의 폭보다 큰 細長型 평면이 나타난다. 도로와는 독립적으로 지상층의 공간분화와 간판이 붙지 않는 외피의 표현도 가능해진다. 종로에 얼굴만 있는 건축물이 병렬해 있다면 동숭동에는 여러 면의 얼굴을 가진 건축물이 가능해 졌음을 뜻한다. 80년 이후 한국 현대 건축가들이 그 이전에는 주목을 끌지 못했던 소, 중형 규모 상업시설을 통하여 자신의 조형언어를 실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도시조직에 힘입은 것이었다.
70년대 중반의 동숭동 남쪽의 공연전시시설이 官주도 내지는 건축가의 의지로 이루어 졌다면 80년대 후반의 동숭동 북쪽의 상업화의 주역은 민간이다. 그들에게 '문화'는 정부에서 하달된 지침 같은 것도 아니고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이나 조각품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문화의 거리'에서 '소비의 거리'로의 변화는 건축법이나 행정력으로 막을 수 없고, 문인, 예술가, 건축가의 비판으로는 고쳐질 수 없는 사회, 경제적 법칙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칙은 동숭동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공간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다에 섬처럼 고립된 강남의 예술의 전당이나, 전철과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서도 코끼리 열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자동차에 소외된 젊은이에게는 먼 곳의 이야기이다. 젊은이들은 걷고 싶고, 걸으면서 일상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동숭동의 거리는 그 자체로도 공연장이며 전시장이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보다 그 시대의 문화를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관객이자 스스로 배우가 되는 것이다.
동숭동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동시에 흡수하여 만들어 낸 한국판 탈근대주의의 단면이다. 우리가 문화를 물질적, 정신적, 지적, 그리고 삶의 방식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동숭동은 문화의 거리에서 퇴행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문화의 범주가 다양해지고 광범위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곳을 찾는 10대들에겐 미술회관에서 산수화를 감상하고 국적불명의 식당에서 파스타나 피자를 먹는 것에 아무런 문화적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파스타나 피자는 산수화 때문에 존재가 가능하고, 산수화는 파스타나 피자 때문에 대중에게 더 다가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숭동은 이미 일제강점부터 조선시대와는 다른 도시조직을 경험하기 시작하여 70년대 후반 서구의 도시조직을 부분적이나 이식 받아 왔다. 지금도 동숭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비공간의 변화는 광고나 잡지에서 보이는 이미지보다 냉혹한 사회, 경제적 법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일상의 문화는 이 곳이 지닌 학문과 고급예술의 전당으로서의 역사와 함께 역동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압구정동과 로데오거리: 消費文化의 排出口
현대 서울의 가장 큰 특징은 한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이 서로 다른 社會文化地圖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550년 이상 서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했던 강북은 1960년대 이후 새롭게 개발된 강남에 의해 불과 20여년만에 그 중심역할을 내주게 된다. 1970년대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한국에는 신흥부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주로 강남을 무대로 삼았다. 강남은 이제 단순한 지리적 명칭을 넘어 한국사회의 특정한 문화를 지칭하는 코드로 인식되고 있다. 압구정동은 강남-강북의 이분법적 도시 패러다임이 시작된 진앙지이자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소비공간을 대표하는 곳이다. 1960년대 이전 논바닥에 불과 했던 압구정동은 영동개발로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75년 23개동의 현대아파트가 1978년에는 33개동의 한양아파트가 들어서서 이른바 압구정동 아파트지구를 형성하게 된다. "押鷗亭"이라는 이름은 세조반정에 참여한 정난공신 한명회가 부귀공명을 버리고 갈매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의 정자를 세운 것에서 에서 유래되었다. 현대아파트는 1980년대 중반에 강북을 누르고 한국 최고의 부촌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곳이 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주거공간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는 도시구조가 한 몫을 하게된다. 불규칙하고 구불구불한 강북과 달리 압구정동은 격자형 街區로 계획되었고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압구정로를 맞대어 처음부터 사회계층의 분리가 용이한 도시구조를 하고 있었다. 한강은 강북의 옥수동과 같은 중산층의 주거로부터 압구정동을 차별시키면서 자연조망을 제공해 주는 이중기능을 해왔던 것이다. 1979년과 1985년에 놓여진 성수대교와 동호대교, 그리고 지하철 3호선은 이 곳을 교통의 요지로 만들었다. 이곳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분당선 지하철이 완공되면 압구정동과 강남을 잇는 축이 강해질 전망이다.
1980년 초반부터 압구정 아파트 건너편의 단독주택 필지에 카페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한다. 1980년 대 중반에는 유명 패션샵, 미용실, 모델에이전시, 광고제작사, 이벤트회사, 사진스튜디오가 강북에서 이전해 오면서 압구정동은 부촌에서 새로운 소비공간으로 변모하게된다. 압구정동으로 지칭되는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보면 압구정동의 범위를 넘어선다. 동쪽으로 로데오거리의 일부는 청담동에 속하며, 서쪽으로 현대백화점 건너편에서 시작되는 패션샵, 화랑, 사진스튜디오가 밀집한 한나래길의 일부는 신사동에 속한다. 이 범주 내에는 학교, 공원, 교회, 소규모아파트, 단독주택이 있지만 이는 압구정동을 지배하는 상업화에 힘에 언제라도 함락될 수 있는 것들이거나 이미 상업자본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실제로 압구정동의 진면목은 이면도로에 나타난다. 갤러리아 백화점 동관과 서관 건너편에서 평행으로 펼쳐지는 로데오거리는 선릉로의 이면도로이며, 압구정로와 도산대로의 이면도로인 보람길과 꽃다이길 역시 단독주택에서 고급 음식점, 카페들로 변해가고 있다. 현대백화점 건너편 700여 미터의 한나래길은 논현로의 이면도로이다. 대로와 대로를 끊기지 않고 연결하는 것이 이들 이면도로의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로데오 거리는 압구정동의 소비공간을 압축하는 길이다. 로데오거리는 미국 로스엔젤리스의 비버리힐스에 있는 유명한 패션 거리의 이름을 본떠 지은 것이다 로데오 거리의 진면목은 밤에 드러난다. 10대와 20대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서로 확인하고자 소비하며 밤을 보낸다. 동경의 하라주꾸(原宿)과 시부야(涉?谷)를 섞어 놓은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도시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도시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압구정동 소비공간의 특징이다.
압구정동의 소비문화는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이후 새로운 개념의 건축을 태동시키는 우군 역할을 한다. 청담동 사거리에서 갤러리아 백화점에 이르는 압구정로 양편은 하나의 패션샵으로 구성되는 중층상업건축이 군집을 이룬다. 상점, 식당, 사무실, 유흥시설이 혼재되어 간판으로 뒤덮인 타 지역과 다르게 단일화된 이미지의 도시경관을 보인다. 새로운 재료로 포장된 새로운 건축유형이 압구정동을 비롯한 강남 일대에 속속 등장했다. 90년대 등장한 압구정동 건축은 상업자본주의에 의존하면서도 그 힘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하는 이중의 숙제를 안고 있다. 그 힘에 쉽게 굴복할 경우 건축은 사회계층을 공간으로 가르는 불평등 공간구조에 일조하게 될 것이나 반면으로 그 저항의 힘이 지나칠 경우 소비공간을 만드는 건축행위는 처음부터 불가능 할 것이다. 압구정동 건축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긴장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歷史都市와 未來의 길
도시의 매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물리적, 문화의 총체적 힘에서 나온다. 서울은 계획도시이지만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도시와 다른 독자성을 지녀왔다. 중국의 고대도시에서 도성의 구성원리를 본 받았지만 산과 강의 지형과 경관, 국가의 이념과 철학에 부합하는 유기적 도시를 구축했다. 근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도시계획이 기존의 도시위에 중첩되었고 그후 구미의 도시계획이 강남에 실험되었다. 위에서 아래로의 거시적 도시계획 이면에는 도시민 각자가 만들어내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미시적 도시변화도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제 서울은 하나의 유형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모자이크의 도시이다. 강북에는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골목길이 남아 있는 반면 강남에는 곧은 대로가 나 있고 그 위로는 자동차 전용고가도로가 달린다. 간판과 노점상이 난립한 상인들의 외침이 여전한 재래시장 옆에는 초현대식 고층건물이 불을 밝힌다. 왕과 사대부를 위한 작은 수도로 시작된 서울은 인구천만이 넘는 거대도시이면서 면적은 이웃나라 동경의 1/3밖에 되지 않아 세계에서 손꼽는 초고밀도시로 변했다. 서울의 길에서 펼쳐지는 일상은 절제되고 안정되었다기보다는 급속한 변화와 대면하고 있고 때로는 갈등을 분출한다. 더 좋은 삶과 자녀들의 교육환경을 쫒아 사람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유목민처럼 이동한다. 그러나 거대 서울의 활력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속도 그리고 잠복된 갈등에서 우러나온다. 역사도시 서울은 거대한 자본과 도시민의 욕구 앞에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金成洪 ソウル市立大學校 建築學部)
'Sonomad의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Urban Morphology and Commercial Architecture (2002.12) (0) | 2011.09.09 |
---|---|
鐘路의 商業建築과 空間論理 (2002.04) (0) | 2011.09.09 |
건축과 언어 (2001.10) (0) | 2011.09.09 |
내가 권하는 건축 고전 (2001.03) (0) | 2011.09.09 |
아시아의 偉大한 길 (2001.02) (0) | 2011.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