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권하는 고전, 건축을 향하여
建築: 大韓建築學會誌, 2001.2 Vol.45, No.3, pp.72-73.
1923년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아방가르드 잡지 L'Esprit Nouveau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한다. 이 책이 바로 20세기 건축에 가장 영향을 준 건축서이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건축을 향하여”이다. 이 책은 1946년 영어로 번역되면서 형용사가 하다 더 붙어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Towards a New Architecture)”로 출간되었다. 코르뷔지에는 이 책을 쓰기 전에 몇 개의 작품을 완성했지만 그의 역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의 건축 활동의 전기라는 점에서, 오랜 건축활동의 잠복기를 거친 시기라는 점에서 이 책은 그의 건축활동을 이론을 정립하고 선언한 글이다.
“건축을 향하여”를 꿰는 두 가지 주제는 기계론적 측면과 이론적 측면이다. 책의 목차에 있는 기술자의 미학과 건축, 배, 비행기, 자동차는 전자에 속한다. 건축가가 생각해야 할 세 가지의 요소, 건축형태를 조율하는 규준선 그리고 전통건축에 관한 부분은 후자에 해당한다. 본문의 첫머리에 그는 기술자의 미학과 건축을 대비시켰다. 기술자는 경제법칙, 수학적 정확성, 보편적 법칙을 따르지만 조화를 결코 잃지 않는다. 건축가는 형태를 통하여 질서를 이루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여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다. 코르뷔지에가 보았던 1920년대는 기계미학은 절정에 올랐던 반면 건축은 퇴행하는 시대였다. 사회의 변화에 따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새로운 기계시대의 건축관이다. 고전건축의 질서를 재발견하고 기계시대에 동참할 때 건축은 비로소 사회에 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르뷔지에는 기계적 기술론과 학구적 이론을 책에서 명확하게 설명하지도 순서대로 나열하지도 않았다. 책의 앞뒤가 명쾌하게 연결되지도 않았고 때로는 모순이 보인다.
“건축을 향하여”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전반을 망라하는 교본을 만드는 비트루비우스도 아니고 보편적 질서와 조화를 꾀하는 인본주의자 알베르티도 아니다. 그의 어조는 절대적이고 선언적이고 도발적이다. “로마에 건축학생을 보내는 것은 그의 일생을 망치는 것이다”, “빌라 메디치는 불란서 건축의 암적 존재이다” 와 같은 직설적 표현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어떤 문장은 마치 주문을 외는 것처럼 반복한다. 반복을 통하여 그가 꿈꾸는 건축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압권은 근대건축과 기계의 비유한 “집은 삶을 위한 기계이다(A house is a machine for living in)”라는 문장이다. 기원전 600여년의 그리스신전의 유적과 1900년대 자동차의 대비한 페이지는 건축과 기계의 관계를 극명하게 표현한 장면이다.
코르뷔지에의 책은 기계와 건축을 말하고 있지만 터를 닦고 기초를 세우고 지붕을 덮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본이 아니다. 그는 건축을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건축은 기계다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알베르티와 코르뷔지에의 책에서 나타난 간극은 근대건축이 고전건축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르네상스시대에 건축은 인체의 투사체이며 인체는 건축의 거울이었다.
400여년이 지난 후 인체는 기계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르네상스 건축처럼 기계의 비례나 형태를 투사하는 대상이 더 이상 아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바다를 가르는 거대한 배의 비례와 대비에 감탄하고 빛이 들어오는 밝은 선실을 좋아했지만 배, 비행기, 자동차의 메커니즘과 형태를 결코 자신의 건축에 직접 대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감탄한 것은 배와 비행기의 정확성과 효율이 아니었다. 19세기 인간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계 속의 미학이었다. 기계와 건축의 별개의 종(種)이지만 그것은 창조하는 정신과 힘은 같다고 보았던 것이다. 코르뷔지에의 눈에는 미(美), 용(用), 강(强)의 삼위일체가 기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냉철한 논리로 무장한 기술자임을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는 건축이 폐부를 건드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문을 반복한다. 극단적 이성과 극단적 감성의 절묘한 합일을 그는 추구했던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책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로운 건축을 말하는 선언문은 아니다. 그러나 동양의 건축학도와 건축가에게도 반세기 이전의 굵은 검은 테 안경 속에 번득이는 눈을 가졌던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의 글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있다. 지금의 우리가 보고 살고 있는 건축은 근대건축이라는 주춧돌 위에 서있고 근대건축의 핵심이 그의 글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하회마을과 창덕궁과 다산의 글이 우리의 뿌리이듯 코르뷔지에의 건축과 글은 1920년대의 조선인에게는 자신들과 무관한 서양의 것이었지만 2000년대 우리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고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金成洪/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建築: 大韓建築學會誌, 2001.2 Vol.45, No.3, pp.72-73.
1923년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아방가르드 잡지 L'Esprit Nouveau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한다. 이 책이 바로 20세기 건축에 가장 영향을 준 건축서이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건축을 향하여”이다. 이 책은 1946년 영어로 번역되면서 형용사가 하다 더 붙어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Towards a New Architecture)”로 출간되었다. 코르뷔지에는 이 책을 쓰기 전에 몇 개의 작품을 완성했지만 그의 역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의 건축 활동의 전기라는 점에서, 오랜 건축활동의 잠복기를 거친 시기라는 점에서 이 책은 그의 건축활동을 이론을 정립하고 선언한 글이다.
“건축을 향하여”를 꿰는 두 가지 주제는 기계론적 측면과 이론적 측면이다. 책의 목차에 있는 기술자의 미학과 건축, 배, 비행기, 자동차는 전자에 속한다. 건축가가 생각해야 할 세 가지의 요소, 건축형태를 조율하는 규준선 그리고 전통건축에 관한 부분은 후자에 해당한다. 본문의 첫머리에 그는 기술자의 미학과 건축을 대비시켰다. 기술자는 경제법칙, 수학적 정확성, 보편적 법칙을 따르지만 조화를 결코 잃지 않는다. 건축가는 형태를 통하여 질서를 이루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여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다. 코르뷔지에가 보았던 1920년대는 기계미학은 절정에 올랐던 반면 건축은 퇴행하는 시대였다. 사회의 변화에 따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새로운 기계시대의 건축관이다. 고전건축의 질서를 재발견하고 기계시대에 동참할 때 건축은 비로소 사회에 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르뷔지에는 기계적 기술론과 학구적 이론을 책에서 명확하게 설명하지도 순서대로 나열하지도 않았다. 책의 앞뒤가 명쾌하게 연결되지도 않았고 때로는 모순이 보인다.
“건축을 향하여”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전반을 망라하는 교본을 만드는 비트루비우스도 아니고 보편적 질서와 조화를 꾀하는 인본주의자 알베르티도 아니다. 그의 어조는 절대적이고 선언적이고 도발적이다. “로마에 건축학생을 보내는 것은 그의 일생을 망치는 것이다”, “빌라 메디치는 불란서 건축의 암적 존재이다” 와 같은 직설적 표현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어떤 문장은 마치 주문을 외는 것처럼 반복한다. 반복을 통하여 그가 꿈꾸는 건축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압권은 근대건축과 기계의 비유한 “집은 삶을 위한 기계이다(A house is a machine for living in)”라는 문장이다. 기원전 600여년의 그리스신전의 유적과 1900년대 자동차의 대비한 페이지는 건축과 기계의 관계를 극명하게 표현한 장면이다.
코르뷔지에의 책은 기계와 건축을 말하고 있지만 터를 닦고 기초를 세우고 지붕을 덮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본이 아니다. 그는 건축을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건축은 기계다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알베르티와 코르뷔지에의 책에서 나타난 간극은 근대건축이 고전건축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르네상스시대에 건축은 인체의 투사체이며 인체는 건축의 거울이었다.
400여년이 지난 후 인체는 기계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르네상스 건축처럼 기계의 비례나 형태를 투사하는 대상이 더 이상 아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바다를 가르는 거대한 배의 비례와 대비에 감탄하고 빛이 들어오는 밝은 선실을 좋아했지만 배, 비행기, 자동차의 메커니즘과 형태를 결코 자신의 건축에 직접 대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감탄한 것은 배와 비행기의 정확성과 효율이 아니었다. 19세기 인간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계 속의 미학이었다. 기계와 건축의 별개의 종(種)이지만 그것은 창조하는 정신과 힘은 같다고 보았던 것이다. 코르뷔지에의 눈에는 미(美), 용(用), 강(强)의 삼위일체가 기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냉철한 논리로 무장한 기술자임을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는 건축이 폐부를 건드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문을 반복한다. 극단적 이성과 극단적 감성의 절묘한 합일을 그는 추구했던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책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로운 건축을 말하는 선언문은 아니다. 그러나 동양의 건축학도와 건축가에게도 반세기 이전의 굵은 검은 테 안경 속에 번득이는 눈을 가졌던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의 글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있다. 지금의 우리가 보고 살고 있는 건축은 근대건축이라는 주춧돌 위에 서있고 근대건축의 핵심이 그의 글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하회마을과 창덕궁과 다산의 글이 우리의 뿌리이듯 코르뷔지에의 건축과 글은 1920년대의 조선인에게는 자신들과 무관한 서양의 것이었지만 2000년대 우리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고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金成洪/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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