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전통적 경계, 허물 수 없는가?
서울건축사신문 건축논단 2003.5.16 (제258호)
몇 년전 네델란드 출신 세계적 건축가 렘쿨하스의 강연회가 테헤란로의 한 오피스건물 대형홀에서 열렸었다. 연단 앞에 학생들이 쪼그리고 앉을 정도로 강연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현대건축의 심오한 세계를 기대했던 렘쿨하스의 강연내용은 시작부터 예상과 달랐다. 네델란드 스키폴공항과 그 주변의 산업시설, 인구밀도, 교통빈도 등의 다이어그램과 도표가 그가 보여준 시각자료였다. 렘쿨하스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광란의 뉴욕”에서와 같은 그림을 기대했던 한국의 건축학도들은 의아해 했을 것이다. 자신이 만난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에게 이러한 통계 다이어그램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이 렘쿨하스는 변이었다. 그의 강연은 자율적 건축예술세계를 신봉하는 건축인에게 던지는 조롱과 같은 것이었다. “돈 없으면 디테일도 없다”는 말로 匠人건축을 우회적으로 비꼰 적도 있다. 나는 이보다 몇 년전 미국에서 렘쿨하스를 초청한 소규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건축이론으로 무장했다고 자부하는 교수들이 그의 현란한 수사와 논리에 주눅이 들었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는 마치 카멜레온과 같은 건축가다. 학생을 만날 때와 학자를 만날 때, 그리고 정치가와 행정가를 만날 때 각기 다른 전술과 전략을 구사한다. 그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가 근대건축의 주요흐름의 틈새를 찾는 곡예를 하고 있다고 본다. 바로 ‘예술로서의 건축’, ‘기술로서의 건축’에 집착한 나머지 간과한 ‘사회와의 소통으로서의 건축’이다. 렘쿨하스가 전통적 의미에서 좋은 건축가는 아니다. 그에게서는 예술가나 기술자보다는 능란한 건축경영자의 모습이 보인다.
2003년 건축설계 분야는 무척 힘들다. 우리보다 사정이 나은 선진국을 보면 앞날은 더욱 어둡다. 본국인이 외면하는 미국건축대학은 아시안을 포함한 외국유학생이 자리 매김하고 있다. 지식기반 산업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건축은 독자적 지식을 갖는 분야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건축고유의 영역을 다른 분야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더욱 많다. 지금까지 건축산업의 중심에는 ‘건설’과 ‘설계’가 중심이었다. 이제 그 중심에서 먼 분야가 오히려 전망이 있다. 도시와 건축의 경계, 조경과 건축의 경계, 부동산개발과 같은 기획, 건물의 사후관리와 같은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분야들은 전통적 의미의 기술도 아니며 더더구나 예술도 아니다. 그런데 건축사들보다 이런 일들은 더 잘 할 수 있는 직업인은 없다. 문제는 건축직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전공분류의 담을 넘는 것이 학문적 미아가 되는 현실에서 타전공제휴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저널리스트와 영화시나리오작가에서 출발해, 현대도시를 해부한 이론가로, 그리고 서구건축계의 전위자로 현란하게 변신하는 렘쿨하스의 모습은, 네델란드보다 결코 자원이 많지도, 문화유산이 많지도 않는 우리에게 얄미울 정도로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홍/서울시립대 건축학부
서울건축사신문 건축논단 2003.5.16 (제258호)
몇 년전 네델란드 출신 세계적 건축가 렘쿨하스의 강연회가 테헤란로의 한 오피스건물 대형홀에서 열렸었다. 연단 앞에 학생들이 쪼그리고 앉을 정도로 강연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현대건축의 심오한 세계를 기대했던 렘쿨하스의 강연내용은 시작부터 예상과 달랐다. 네델란드 스키폴공항과 그 주변의 산업시설, 인구밀도, 교통빈도 등의 다이어그램과 도표가 그가 보여준 시각자료였다. 렘쿨하스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광란의 뉴욕”에서와 같은 그림을 기대했던 한국의 건축학도들은 의아해 했을 것이다. 자신이 만난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에게 이러한 통계 다이어그램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이 렘쿨하스는 변이었다. 그의 강연은 자율적 건축예술세계를 신봉하는 건축인에게 던지는 조롱과 같은 것이었다. “돈 없으면 디테일도 없다”는 말로 匠人건축을 우회적으로 비꼰 적도 있다. 나는 이보다 몇 년전 미국에서 렘쿨하스를 초청한 소규모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건축이론으로 무장했다고 자부하는 교수들이 그의 현란한 수사와 논리에 주눅이 들었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는 마치 카멜레온과 같은 건축가다. 학생을 만날 때와 학자를 만날 때, 그리고 정치가와 행정가를 만날 때 각기 다른 전술과 전략을 구사한다. 그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가 근대건축의 주요흐름의 틈새를 찾는 곡예를 하고 있다고 본다. 바로 ‘예술로서의 건축’, ‘기술로서의 건축’에 집착한 나머지 간과한 ‘사회와의 소통으로서의 건축’이다. 렘쿨하스가 전통적 의미에서 좋은 건축가는 아니다. 그에게서는 예술가나 기술자보다는 능란한 건축경영자의 모습이 보인다.
2003년 건축설계 분야는 무척 힘들다. 우리보다 사정이 나은 선진국을 보면 앞날은 더욱 어둡다. 본국인이 외면하는 미국건축대학은 아시안을 포함한 외국유학생이 자리 매김하고 있다. 지식기반 산업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건축은 독자적 지식을 갖는 분야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건축고유의 영역을 다른 분야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더욱 많다. 지금까지 건축산업의 중심에는 ‘건설’과 ‘설계’가 중심이었다. 이제 그 중심에서 먼 분야가 오히려 전망이 있다. 도시와 건축의 경계, 조경과 건축의 경계, 부동산개발과 같은 기획, 건물의 사후관리와 같은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분야들은 전통적 의미의 기술도 아니며 더더구나 예술도 아니다. 그런데 건축사들보다 이런 일들은 더 잘 할 수 있는 직업인은 없다. 문제는 건축직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전공분류의 담을 넘는 것이 학문적 미아가 되는 현실에서 타전공제휴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저널리스트와 영화시나리오작가에서 출발해, 현대도시를 해부한 이론가로, 그리고 서구건축계의 전위자로 현란하게 변신하는 렘쿨하스의 모습은, 네델란드보다 결코 자원이 많지도, 문화유산이 많지도 않는 우리에게 얄미울 정도로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홍/서울시립대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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