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와 한국현대건축의 지형도
Yi Jongho in a Topographic Map of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C3 Korea: 건축과환경, 0410 No.242 pp38-39.
“국토의 정중앙(正中央)”이라는 슬로건으로 변방성을 애써 만회하려는 양구는 한반도의 내륙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 양구의 산자락에 한 건물이 역시 벌판을 등지고 웅크리고 앉아 있다. 몇 번의 고사 끝에 건축가 이종호특집의 서평을 수락하고 홍천, 신남, 인제를 거쳐 빗길에 찾은 박수근미술관이었다. 한해에 이만여명의 관람객이 찾는다는 큐레이터의 설명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막한 미술관을 혼자 둘러보았다. 박수근 생가 터에 지어졌지만 정작 그의 대표작을 소장하지 못한 그 곳은 미술관이라기보다는 박수근의 세계와 기억을 자연에 새긴 음각(陰刻)처럼 느껴졌다. 박수근의 그림은 난해한 비평이나 주석 없이도 한국인의 저 밑바닥에 숨어있는 페이소스를 여지없이 드러내어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각지고 투박한 선으로 드러난 서민들의 뒷모습은 캔버스에 무수히 찍힌 거친 점들 속으로 다시 녹아들어 간다.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한 거장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영구미술관에 자신의 건축언어를 각인한다는 것은 건축가에게 커다란 축복인 동시에 숙제다. 산자락 꼬리를 따라 내려와 대지를 한번 딛고는 다시 자연을 감싸 들어가는 돌무덤에 이종호는 박수근의 캔버스를 포개려고 했다.
이종호의 대표작 바른손센터, 홍천휴게소, 혜화동사옥, 명지대 방목기념관, 박수근미술관에서 보듯이 대지, 프로그램, 기하학적 원칙, 조형언어, 재료에 이르기까지 일견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빠롤(parole)의 피부를 벗겨내면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일관된 랑그(langue)의 뼈대가 드러난다. 열어젖힘 혹은 감싸 앉기의 독특한 공간모폴로지다. 바른손센터에서 김수근으로부터 체득한 공간과 조형언어를 그의 것으로 만드는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수직, 수평의 다양한 공간의 겹을 만들고 이를 열고 닫는 수법이 그것이다. 도로에서 입구플라자를 거쳐 선큰코트에 이르는 수직사선방향의 열린 공간은 서울의 도시풍경에서 보면 하나의 이단이다. 책에 실린 선큰코트의 투시도를 보고난 후 가보게 되면 그 스케일에 적잖게 실망하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진부한 사무소 전형을 깨려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바른손센터의 수직사선의 열림을 홍천휴게소에서는 수평사선으로 전환한다. 대부분의 국도변 흉물스런 휴게소는 뒷산이나 계곡을 가로막고 뜨내기 여객에게 호소한다. 도로와 평행하는 스트립몰(strip mall)의 전형을 따랐다면 묻혔을 대지의 잠재력을 이종호는 절묘하게 살려냈다. 주차장-계단-포디움-일자형매스를 해체하고 그 안에 마당을 담았다. 동시에 보강블럭조, 목조트러스, 침목을 써서 값싸고 거친 구축의 미를 그는 누구보다 먼저 시도했다. 달리는 차창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는 홍천휴게소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단골들이 꾸준히 찾아와 여행의 속도를 늦추고 들뜸을 가라앉히는 장소가 되었다.
박수근미술관도 앞의 두 건축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열어젖힌 공간을 다시 감아 내향적 공간구조를 만들고 여기에 박수근의 세계를 은유화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수줍은 안마당을 쉽사리 내보이지 않기 위해 거친 마티에르의 벽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개입한다. 그러나 이종호의 건축모폴로지와 은유는 양보할 수 없는 형태의 자율성이나 아프리오리(a priori)가 아니라 땅과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다. 도시에서, 국도변에서, 산자락에서 그는 대지가 갖는 잠재력과 범접할 수 없는 것을 솎아내려고 한다. 그래서 그만이 소유하고 표방하는 빠롤이 많지 않다. 자신만의 빠롤을 선점하고, 코드화하고, 대중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작가는 없다. 이종호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욕망이 그에게는 땅과 프로그램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우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의 건축은 태생적으로 대중성과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열고 닫는 이종호의 공간모폴로지는 또 다른 태생적 문제를 안고 시작된다. 열고 닫음은 안과 밖, 중심과 주변, 절대기하와 유기, 인공과 자연의 양성(兩性)을 전제하기 때문에 둘 사이의 변곡점을 절묘하게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른손센터의 휜 외벽, 홍천휴게소의 뒷담, 방목기념관의 상부지붕선, 박수근미술관의 안으로 누운 벽들은 모두 절대성을 제어하려는 무의식적 장치로 읽혀진다. 이 장치가 변곡점에서 절묘하게 곡예하고 있는 순간 긴장과 유희를 주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애매한 절충으로 전락한다. 그는 이 시지각적 아슬아슬함, 혹은 애매함을 ‘장소’라는 공간의 차원으로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건축과 회화, 음악, 공연 등 타장르와의 경계 허물기, 지방 소도시의 공간전략 찾기, 정보시대의 새로운 건축유형 모색 등 일련의 외도는 건축을 시지적적, 개인적 영역에서 사회집단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이는 제1, 제2의 공간을 탈피하려는 르페브르의 구도와 닮았다. 제1의 공간은 자본주의 시장과 계량학문이 주도하는 영역이다. 제2의 공간은 문화권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예술영역이다. 르페브르는 제1, 제2의 공간은 교묘히 결탁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한다고 보았다. 제3의 공간은 그 주인공 자리를 건축이나 예술이 아닌 “공간의 재현”을 통해 만들어진 삶에 양보하는 곳이다.
이종호의 특집서문을 처음에 고사한 것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식’의 지인(知人)간의 비평을 거부해왔던 이유도 있었지만, 대학선배, 직장상사, 프로젝트 공동기획으로 늘 그와 가까이 지내오면서 비평에서 전제되는 관조적 거리를 두고 그의 건축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우선하는 것은 며칠 씩 밤을 지새우는 그의 테이블위의 스케치와 메모, 스타디모형이다. 그래서 이 글은 그의 건축보다도 한국현대건축의 지형도에 그가 서 있는 지점을 가늠해보는 의도로 시작했다. 그의 건축이 양성의 변곡점에 있듯이 그 역시 한국현대건축 지형도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종호는 소위 스타건축가 집단에서는 이례적 존재다. 다양한 활동과 영역과 달리 그의 경력은 학부를 졸업하고, 김수근에게 수학한 후, 홀로서서 일해오고 있는 것이 전부다. 웬만한 건축가들이 내미는 석사학위도 외국유학 경력도 없다. 실무에 발을 담근 이래 이 땅에서 오로지 자습으로 커 온 독특한 존재다. 그는 학습력과 흡인력이 가장 뛰어난 건축가중의 하나다. 90년대 초반 이른 나이에 작가 휘장을 받았던 그는 ‘인문학’과 ‘실천적 공간’을 통해 매너리즘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 때문에 이종호에게서는 한국현대건축의 2세대쯤으로 부를 수 있는 포스트김수근 엘리트집단과 90년대 중반이후 등장한 3세대 건축가의 색깔이 동시에 배어 나온다. 포스트김수근 엘리트 집단은 확고한 이념이나 이론이 없이 맺어진 기계적 연대에 보다 가깝다. 건축을 통한 공공성과 윤리를 내세우지만 방법론은 하향식 문화운동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상업자본의 힘과 메커니즘을 폄하하지만 미디어 문화권력에 의존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이들을 결속하는 것은 안티제도권 공감대 뒤에 숨어 있는 일종의 동질의식으로, 집단속에서 작가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공고화하려한다. 문제는 이러한 엘리트집단은 대학이나 미디어의 영향권 밖의 대중과 소통하려는 의지도 방법론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90년대 이후 유학파를 중심의 제3세대는 제2세대의 가부장적 태도보다는 기업형사무실의 조직, 자본, 기술, 관리의 위력과 잠재력을 맛 본 세대다. 위계적 연대보다는 수평연대에서 익숙하다. 그러나 3세대는 생존의 험한 파고 속에서 공공성, 윤리, 실천과 같은 거대담론을 논할 여유가 없는 세대다. 시대양심과 직업윤리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이종호는 제2세대지만 개인중심의 운동을 의심하고 정보시대의 새로운 건축지형도를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는 제3세대다.
이종호가 서 있는 지점은 외롭고 위태로워 보인다. ‘작가’와 ‘공공성의 실천’은 본질적으로 함께 할 수 없다. 건축가는 역사상 교회권력, 정치권력, 상업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이들로부터 잠시 독립된 것처럼 보였던 서구의 모더니스트들 뒤편에는 아방가르드중심의 학구주의와 기술중심의 미래주의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었다. 역사학자 밴험은 미래주의가 승리할 것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아방가르드 학구주의는 새로운 상업자본과 미디어에 기대면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미래주의는 기술, 조직, 자본의 효용을 극대화한 기업형사무실에 편입되었다.
나는 박수근의 연필스케치와 판화, 그의 생애를 진솔하게 보여주는 사진들 앞에서 한 인간과 예술작품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어찌 보면 화가로서 수치스러운 미군부대 초상화가 시절까지도 인간 박수근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땅에서 주어진 것을 감내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한 인간의 심연을 헤아리게 한다. 그래서 진정한 비평은 한 인간의 궤적과 작품이 하나의 서사(敍事)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보면 박수근미술관의 거친 벽은 박수근의 마티에르의 은유를 넘어 암울한 시대를 묵묵히 살아갔던 노인들과 아낙네들의 뒷모습을 닮았다. 박수근의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으되 그가 남긴 것은 공공적이고 집단적인 것이다. 이종호가 추구하는 실천과 윤리 역시 외롭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직설이 아닌 새로운 은유의 몸짓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종호의 건축은 매끄럽지도, 정교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힘이 있다. 인간 이종호가 그렇기 때문이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Yi Jongho in a Topographic Map of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C3 Korea: 건축과환경, 0410 No.242 pp38-39.
“국토의 정중앙(正中央)”이라는 슬로건으로 변방성을 애써 만회하려는 양구는 한반도의 내륙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 양구의 산자락에 한 건물이 역시 벌판을 등지고 웅크리고 앉아 있다. 몇 번의 고사 끝에 건축가 이종호특집의 서평을 수락하고 홍천, 신남, 인제를 거쳐 빗길에 찾은 박수근미술관이었다. 한해에 이만여명의 관람객이 찾는다는 큐레이터의 설명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막한 미술관을 혼자 둘러보았다. 박수근 생가 터에 지어졌지만 정작 그의 대표작을 소장하지 못한 그 곳은 미술관이라기보다는 박수근의 세계와 기억을 자연에 새긴 음각(陰刻)처럼 느껴졌다. 박수근의 그림은 난해한 비평이나 주석 없이도 한국인의 저 밑바닥에 숨어있는 페이소스를 여지없이 드러내어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각지고 투박한 선으로 드러난 서민들의 뒷모습은 캔버스에 무수히 찍힌 거친 점들 속으로 다시 녹아들어 간다.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한 거장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영구미술관에 자신의 건축언어를 각인한다는 것은 건축가에게 커다란 축복인 동시에 숙제다. 산자락 꼬리를 따라 내려와 대지를 한번 딛고는 다시 자연을 감싸 들어가는 돌무덤에 이종호는 박수근의 캔버스를 포개려고 했다.
이종호의 대표작 바른손센터, 홍천휴게소, 혜화동사옥, 명지대 방목기념관, 박수근미술관에서 보듯이 대지, 프로그램, 기하학적 원칙, 조형언어, 재료에 이르기까지 일견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빠롤(parole)의 피부를 벗겨내면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일관된 랑그(langue)의 뼈대가 드러난다. 열어젖힘 혹은 감싸 앉기의 독특한 공간모폴로지다. 바른손센터에서 김수근으로부터 체득한 공간과 조형언어를 그의 것으로 만드는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수직, 수평의 다양한 공간의 겹을 만들고 이를 열고 닫는 수법이 그것이다. 도로에서 입구플라자를 거쳐 선큰코트에 이르는 수직사선방향의 열린 공간은 서울의 도시풍경에서 보면 하나의 이단이다. 책에 실린 선큰코트의 투시도를 보고난 후 가보게 되면 그 스케일에 적잖게 실망하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진부한 사무소 전형을 깨려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바른손센터의 수직사선의 열림을 홍천휴게소에서는 수평사선으로 전환한다. 대부분의 국도변 흉물스런 휴게소는 뒷산이나 계곡을 가로막고 뜨내기 여객에게 호소한다. 도로와 평행하는 스트립몰(strip mall)의 전형을 따랐다면 묻혔을 대지의 잠재력을 이종호는 절묘하게 살려냈다. 주차장-계단-포디움-일자형매스를 해체하고 그 안에 마당을 담았다. 동시에 보강블럭조, 목조트러스, 침목을 써서 값싸고 거친 구축의 미를 그는 누구보다 먼저 시도했다. 달리는 차창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는 홍천휴게소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단골들이 꾸준히 찾아와 여행의 속도를 늦추고 들뜸을 가라앉히는 장소가 되었다.
박수근미술관도 앞의 두 건축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열어젖힌 공간을 다시 감아 내향적 공간구조를 만들고 여기에 박수근의 세계를 은유화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수줍은 안마당을 쉽사리 내보이지 않기 위해 거친 마티에르의 벽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개입한다. 그러나 이종호의 건축모폴로지와 은유는 양보할 수 없는 형태의 자율성이나 아프리오리(a priori)가 아니라 땅과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다. 도시에서, 국도변에서, 산자락에서 그는 대지가 갖는 잠재력과 범접할 수 없는 것을 솎아내려고 한다. 그래서 그만이 소유하고 표방하는 빠롤이 많지 않다. 자신만의 빠롤을 선점하고, 코드화하고, 대중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작가는 없다. 이종호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욕망이 그에게는 땅과 프로그램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우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의 건축은 태생적으로 대중성과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열고 닫는 이종호의 공간모폴로지는 또 다른 태생적 문제를 안고 시작된다. 열고 닫음은 안과 밖, 중심과 주변, 절대기하와 유기, 인공과 자연의 양성(兩性)을 전제하기 때문에 둘 사이의 변곡점을 절묘하게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른손센터의 휜 외벽, 홍천휴게소의 뒷담, 방목기념관의 상부지붕선, 박수근미술관의 안으로 누운 벽들은 모두 절대성을 제어하려는 무의식적 장치로 읽혀진다. 이 장치가 변곡점에서 절묘하게 곡예하고 있는 순간 긴장과 유희를 주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애매한 절충으로 전락한다. 그는 이 시지각적 아슬아슬함, 혹은 애매함을 ‘장소’라는 공간의 차원으로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건축과 회화, 음악, 공연 등 타장르와의 경계 허물기, 지방 소도시의 공간전략 찾기, 정보시대의 새로운 건축유형 모색 등 일련의 외도는 건축을 시지적적, 개인적 영역에서 사회집단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이는 제1, 제2의 공간을 탈피하려는 르페브르의 구도와 닮았다. 제1의 공간은 자본주의 시장과 계량학문이 주도하는 영역이다. 제2의 공간은 문화권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예술영역이다. 르페브르는 제1, 제2의 공간은 교묘히 결탁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한다고 보았다. 제3의 공간은 그 주인공 자리를 건축이나 예술이 아닌 “공간의 재현”을 통해 만들어진 삶에 양보하는 곳이다.
이종호의 특집서문을 처음에 고사한 것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식’의 지인(知人)간의 비평을 거부해왔던 이유도 있었지만, 대학선배, 직장상사, 프로젝트 공동기획으로 늘 그와 가까이 지내오면서 비평에서 전제되는 관조적 거리를 두고 그의 건축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우선하는 것은 며칠 씩 밤을 지새우는 그의 테이블위의 스케치와 메모, 스타디모형이다. 그래서 이 글은 그의 건축보다도 한국현대건축의 지형도에 그가 서 있는 지점을 가늠해보는 의도로 시작했다. 그의 건축이 양성의 변곡점에 있듯이 그 역시 한국현대건축 지형도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종호는 소위 스타건축가 집단에서는 이례적 존재다. 다양한 활동과 영역과 달리 그의 경력은 학부를 졸업하고, 김수근에게 수학한 후, 홀로서서 일해오고 있는 것이 전부다. 웬만한 건축가들이 내미는 석사학위도 외국유학 경력도 없다. 실무에 발을 담근 이래 이 땅에서 오로지 자습으로 커 온 독특한 존재다. 그는 학습력과 흡인력이 가장 뛰어난 건축가중의 하나다. 90년대 초반 이른 나이에 작가 휘장을 받았던 그는 ‘인문학’과 ‘실천적 공간’을 통해 매너리즘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 때문에 이종호에게서는 한국현대건축의 2세대쯤으로 부를 수 있는 포스트김수근 엘리트집단과 90년대 중반이후 등장한 3세대 건축가의 색깔이 동시에 배어 나온다. 포스트김수근 엘리트 집단은 확고한 이념이나 이론이 없이 맺어진 기계적 연대에 보다 가깝다. 건축을 통한 공공성과 윤리를 내세우지만 방법론은 하향식 문화운동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상업자본의 힘과 메커니즘을 폄하하지만 미디어 문화권력에 의존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이들을 결속하는 것은 안티제도권 공감대 뒤에 숨어 있는 일종의 동질의식으로, 집단속에서 작가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공고화하려한다. 문제는 이러한 엘리트집단은 대학이나 미디어의 영향권 밖의 대중과 소통하려는 의지도 방법론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90년대 이후 유학파를 중심의 제3세대는 제2세대의 가부장적 태도보다는 기업형사무실의 조직, 자본, 기술, 관리의 위력과 잠재력을 맛 본 세대다. 위계적 연대보다는 수평연대에서 익숙하다. 그러나 3세대는 생존의 험한 파고 속에서 공공성, 윤리, 실천과 같은 거대담론을 논할 여유가 없는 세대다. 시대양심과 직업윤리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이종호는 제2세대지만 개인중심의 운동을 의심하고 정보시대의 새로운 건축지형도를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는 제3세대다.
이종호가 서 있는 지점은 외롭고 위태로워 보인다. ‘작가’와 ‘공공성의 실천’은 본질적으로 함께 할 수 없다. 건축가는 역사상 교회권력, 정치권력, 상업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이들로부터 잠시 독립된 것처럼 보였던 서구의 모더니스트들 뒤편에는 아방가르드중심의 학구주의와 기술중심의 미래주의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었다. 역사학자 밴험은 미래주의가 승리할 것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아방가르드 학구주의는 새로운 상업자본과 미디어에 기대면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미래주의는 기술, 조직, 자본의 효용을 극대화한 기업형사무실에 편입되었다.
나는 박수근의 연필스케치와 판화, 그의 생애를 진솔하게 보여주는 사진들 앞에서 한 인간과 예술작품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어찌 보면 화가로서 수치스러운 미군부대 초상화가 시절까지도 인간 박수근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땅에서 주어진 것을 감내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한 인간의 심연을 헤아리게 한다. 그래서 진정한 비평은 한 인간의 궤적과 작품이 하나의 서사(敍事)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보면 박수근미술관의 거친 벽은 박수근의 마티에르의 은유를 넘어 암울한 시대를 묵묵히 살아갔던 노인들과 아낙네들의 뒷모습을 닮았다. 박수근의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으되 그가 남긴 것은 공공적이고 집단적인 것이다. 이종호가 추구하는 실천과 윤리 역시 외롭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직설이 아닌 새로운 은유의 몸짓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종호의 건축은 매끄럽지도, 정교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힘이 있다. 인간 이종호가 그렇기 때문이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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