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론(各論)의 시대, 한국현대건축
SPACE 200911, no.504, pp.44-47.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새로운 제국주의』를 쓴 도시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와 동석한 적이 있었다. 그가 한 말, “한국의 인문학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놀랄 만큼 현학적이다. 어려운 개념과 용어를 척척 구사한다.” 듣기에 따라 칭찬 같기도 하고 서양학문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꼬집는 것 같기도 했다.
“건축은 심오한가 봅니다. 모두들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쓰니까요?” 가깝게 지냈던 인문학분야 한 교수가 하던 말이다. 자신들의 인문학보다 건축이 더 어렵다는 그의 말 역시 학문적 깊이에 대한 경외보다는 냉소로 들렸다. 나 스스로도 글을 쉽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그래서야 대중과 소통하겠냐”는 질책을 많이 받는다. 건축은 정말 어려운 언어로 포장될 수밖에 없는가?
경험을 통해 나는 글이 어려워지는 두 가지의 이유를 달 수 있다. 첫째, 사람 살아가는 복합한 현실을 담으면서도 인문학, 예술과 밀월관계인 건축은 형식이 곧 내용이다. 공학에서 수사는 중요치 않다. 수사를 다 벗겨내도 명제, 논리, 수식과 같은 핵심은 그대로 있다. 반면 건축의 복합성은 언어에 화학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분해하면 의미를 잃는 요소만 남는다. 둘째, 쓰고자 하는 내용을 내 스스로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언어로 포장하는 경우다. 이 경우 형식과 내용은 물리적으로 어설프게 붙어있을 뿐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호한 것이다.
문제는 난해함이든 모호함이든 정작 읽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긴 글보다는 키워드가 대안으로 등장한다. 건축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미지와 키워드는 두터운 독자층과 시장이 있다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국 현대건축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00년 이후 건설과 건축산업은 큰 변화를 겪었다. 지구단위계획의 법제화, 공공사업의 일괄계약방식과 건설관리의 본격적 시행, 민간투자유치사업, 프로젝트파이낸싱의 도입, 부동산 개발업자의 등장,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사업과 같은 경제,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 도시개발단위와 건축물이 급격히 대형화되었다.
대형화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건축은 꾸준히 커져왔다. 그러나 최근의 대형화는 국제 금융자본의 개입과 산업구조의 변화와 같은 보다 거시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결과 대형 상업자본과 정부가 기존의 개미 건축주를 대체했다. 개미 건축주는 중소 건축설계시장을 떠 받쳐주었던 우군이었다. 건설-건축의 종속구도가 더욱 심해지고, 건축사사무소가 대형-영세규모로 양극화되고 있다.
건축학교육 인증제도가 도입되고 건축기본법이 제정되어 건축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지만 건축가가 직면한 현실은 녹녹치 않다. 5년제 대학문을 나선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은 홀로서는 건축가가 아닌 안전한 직장인이다. 반면 작품성을 추구하는 소규모 설계사무실의 건축가들은 대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직을 운영하며 작품에 전력하는 건축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학계는 어떤가? 교육인증, 대학평가, 승진기준 강화 등으로 교수사회는 경쟁구도로 바뀌었다. 공개된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해야 하고 논문을 생산해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넉넉하게 논문 쓰던 시절은 가고 까다로운 논문형식과 심사를 거쳐야 한다. 설사 논문을 게재했더라도 연구진실성위원회가 버티고 있다.
새로운 학회와 협의회가 만들어졌고 연구주제가 세분화되었다. 건축설계의 고객이 대형민간자본과 정부로 쏠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회를 후원하는 큰 손도 관련 산업과 정부다. 돈에 따라 연구의 방향이 움직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건축학계에서 생산하는 논문과 보고서의 양이 이를 실천하는 건축설계 시장보다 방대하다는 점이다. 역 피라미드 구조다. 건축지의 이미지와 글이 실제 건축설계 시장보다 화려한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학문과 산업이 결속된 영역간의 벽이 과거 보다 높아지고 있다.
각론(各論)의 시대다. 제도화된 형식을 중요시하는 학계는 영역 안에서의 전문성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영역과 영역사이의 공백지대는 커지고 있다. 학제간 융합의 시대라고 하지만 건축과 건설, 건축과 도시의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건설과 건축의 종속구도는 바람직한 것인가?’ ‘건축의 대형화는 도시문화에 어떤 파장을 주는가?’ ‘건축사무소의 양극화 구도는 건축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건축의 글로벌화와 지역성의 양극화 구도에서 가능성은 무엇인가?’ 한국현대건축 전체를 아우르는 이런 공동의제를 제기할 공간이 좁아지고 있다. 중간지대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간지대의 질문을 던진 시대가 있었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성’ 담론과 여러 단체가 주도한 일련의 현실참여운동이 그랬다. 전자는 전통건축과 변화하는 서양건축과의 갈등과 모순, 역사이론과 실천계의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였으며, 후자는 건축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무, 건축생산의 과정, 건축외적 힘에 대한 문제제기와 연대를 통한 실천운동이었다. 성격과 방식은 전혀 달랐으되 학계와 실천계의 주목을 받았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였지만 돌이켜보면 개인의 문제 이상의 집단적 질문을 던졌던 낭만의 시대였다.
이제 무한경쟁의 시대다. 높은 담이 쳐진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것도 팍팍한데 한가한 이야기에 정신을 팔 여유가 없다. 사람들은 집단에서 개체로 파편화되고 주어진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가를 평가받는다. 탈근대주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요즈음 한국 건축계의 풍경이 이러하다. 공장에서 잘 돌아가는 기계의 부속품 같은 것이다.
건축학계는 나름대로 정부와 산업계가 요구하는 많은 논문, 세미나, 보고서를 생산하고, 건축가들은 비평과 함께 건축지에 신작을 끊임없이 싣고 있다. 그런데 경제, 사회, 문화, 도시의 큰 지형도 위에서 좌표를 묻는 목소리는 언제부터인가 작아져서 들리지 않는다. 건축 밖의 큰 힘에 쉽게 순응한 나머지 건축 안의 이야기에 자족한다. ‘기술’과 ‘예술’로 포장한 각론, 고증과 형식 때문에 예봉이 무뎌진 주장, 우리끼리 감싸고 비평하는 글들로 한국 건축계는 힘겹게 풍성하다.
1966년 창간한 이래 500호를 넘긴 [공간]은 한국 현대건축의 궤적이다. 산업화시대, 개발시대에 권력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지만 공간은 연극, 미술, 건축, 도시 등 다양한 장르를 융합한 최초의 종합문화지이였다. 건축안․밖의 이야기를 주도했고 어떤 의미에서 제도권 대학보다 영향력이 컸다. 미국의 주요 건축대학 도서관에서는 두꺼운 장정을 한 빛 바랜 [공간]지를 발견할 수 있다.
2008년 [공간]이 톰슨 로이터 예술․인문과학 인용색인(A&HCI, arts & humanities citation index)에 등재된 것은 학계가 축하할 일이다. 국내 건축학 저널이 포용할 수 없는 중간지대에 공간이 서 있다는 것은 단순한 신작 소개나 건축가의 프로모션의 역할을 넘어 통섭의 건축을 주도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건축과 도시, 역사와 현실, 이론과 실천의 중간지대에 마당을 깔아주고 논문집에서, 보고서에서, 신문에서 담을 수 없는 냉혹한 현실과 풍성한 상상력의 아슬아슬한 지대를 탐침했으면 한다. 난해하지도 모호하지도 않는 글, 넓은 독자층과 소통하는 글을 쓸 용기를 주는 건축지가 되었으면 한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SPACE 200911, no.504, pp.44-47.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새로운 제국주의』를 쓴 도시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와 동석한 적이 있었다. 그가 한 말, “한국의 인문학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놀랄 만큼 현학적이다. 어려운 개념과 용어를 척척 구사한다.” 듣기에 따라 칭찬 같기도 하고 서양학문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꼬집는 것 같기도 했다.
“건축은 심오한가 봅니다. 모두들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쓰니까요?” 가깝게 지냈던 인문학분야 한 교수가 하던 말이다. 자신들의 인문학보다 건축이 더 어렵다는 그의 말 역시 학문적 깊이에 대한 경외보다는 냉소로 들렸다. 나 스스로도 글을 쉽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그래서야 대중과 소통하겠냐”는 질책을 많이 받는다. 건축은 정말 어려운 언어로 포장될 수밖에 없는가?
경험을 통해 나는 글이 어려워지는 두 가지의 이유를 달 수 있다. 첫째, 사람 살아가는 복합한 현실을 담으면서도 인문학, 예술과 밀월관계인 건축은 형식이 곧 내용이다. 공학에서 수사는 중요치 않다. 수사를 다 벗겨내도 명제, 논리, 수식과 같은 핵심은 그대로 있다. 반면 건축의 복합성은 언어에 화학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분해하면 의미를 잃는 요소만 남는다. 둘째, 쓰고자 하는 내용을 내 스스로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언어로 포장하는 경우다. 이 경우 형식과 내용은 물리적으로 어설프게 붙어있을 뿐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호한 것이다.
문제는 난해함이든 모호함이든 정작 읽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긴 글보다는 키워드가 대안으로 등장한다. 건축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미지와 키워드는 두터운 독자층과 시장이 있다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국 현대건축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00년 이후 건설과 건축산업은 큰 변화를 겪었다. 지구단위계획의 법제화, 공공사업의 일괄계약방식과 건설관리의 본격적 시행, 민간투자유치사업, 프로젝트파이낸싱의 도입, 부동산 개발업자의 등장,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사업과 같은 경제,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 도시개발단위와 건축물이 급격히 대형화되었다.
대형화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건축은 꾸준히 커져왔다. 그러나 최근의 대형화는 국제 금융자본의 개입과 산업구조의 변화와 같은 보다 거시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결과 대형 상업자본과 정부가 기존의 개미 건축주를 대체했다. 개미 건축주는 중소 건축설계시장을 떠 받쳐주었던 우군이었다. 건설-건축의 종속구도가 더욱 심해지고, 건축사사무소가 대형-영세규모로 양극화되고 있다.
건축학교육 인증제도가 도입되고 건축기본법이 제정되어 건축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지만 건축가가 직면한 현실은 녹녹치 않다. 5년제 대학문을 나선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은 홀로서는 건축가가 아닌 안전한 직장인이다. 반면 작품성을 추구하는 소규모 설계사무실의 건축가들은 대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직을 운영하며 작품에 전력하는 건축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학계는 어떤가? 교육인증, 대학평가, 승진기준 강화 등으로 교수사회는 경쟁구도로 바뀌었다. 공개된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해야 하고 논문을 생산해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넉넉하게 논문 쓰던 시절은 가고 까다로운 논문형식과 심사를 거쳐야 한다. 설사 논문을 게재했더라도 연구진실성위원회가 버티고 있다.
새로운 학회와 협의회가 만들어졌고 연구주제가 세분화되었다. 건축설계의 고객이 대형민간자본과 정부로 쏠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회를 후원하는 큰 손도 관련 산업과 정부다. 돈에 따라 연구의 방향이 움직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건축학계에서 생산하는 논문과 보고서의 양이 이를 실천하는 건축설계 시장보다 방대하다는 점이다. 역 피라미드 구조다. 건축지의 이미지와 글이 실제 건축설계 시장보다 화려한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학문과 산업이 결속된 영역간의 벽이 과거 보다 높아지고 있다.
각론(各論)의 시대다. 제도화된 형식을 중요시하는 학계는 영역 안에서의 전문성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영역과 영역사이의 공백지대는 커지고 있다. 학제간 융합의 시대라고 하지만 건축과 건설, 건축과 도시의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건설과 건축의 종속구도는 바람직한 것인가?’ ‘건축의 대형화는 도시문화에 어떤 파장을 주는가?’ ‘건축사무소의 양극화 구도는 건축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건축의 글로벌화와 지역성의 양극화 구도에서 가능성은 무엇인가?’ 한국현대건축 전체를 아우르는 이런 공동의제를 제기할 공간이 좁아지고 있다. 중간지대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간지대의 질문을 던진 시대가 있었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성’ 담론과 여러 단체가 주도한 일련의 현실참여운동이 그랬다. 전자는 전통건축과 변화하는 서양건축과의 갈등과 모순, 역사이론과 실천계의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였으며, 후자는 건축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무, 건축생산의 과정, 건축외적 힘에 대한 문제제기와 연대를 통한 실천운동이었다. 성격과 방식은 전혀 달랐으되 학계와 실천계의 주목을 받았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였지만 돌이켜보면 개인의 문제 이상의 집단적 질문을 던졌던 낭만의 시대였다.
이제 무한경쟁의 시대다. 높은 담이 쳐진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것도 팍팍한데 한가한 이야기에 정신을 팔 여유가 없다. 사람들은 집단에서 개체로 파편화되고 주어진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가를 평가받는다. 탈근대주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요즈음 한국 건축계의 풍경이 이러하다. 공장에서 잘 돌아가는 기계의 부속품 같은 것이다.
건축학계는 나름대로 정부와 산업계가 요구하는 많은 논문, 세미나, 보고서를 생산하고, 건축가들은 비평과 함께 건축지에 신작을 끊임없이 싣고 있다. 그런데 경제, 사회, 문화, 도시의 큰 지형도 위에서 좌표를 묻는 목소리는 언제부터인가 작아져서 들리지 않는다. 건축 밖의 큰 힘에 쉽게 순응한 나머지 건축 안의 이야기에 자족한다. ‘기술’과 ‘예술’로 포장한 각론, 고증과 형식 때문에 예봉이 무뎌진 주장, 우리끼리 감싸고 비평하는 글들로 한국 건축계는 힘겹게 풍성하다.
1966년 창간한 이래 500호를 넘긴 [공간]은 한국 현대건축의 궤적이다. 산업화시대, 개발시대에 권력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지만 공간은 연극, 미술, 건축, 도시 등 다양한 장르를 융합한 최초의 종합문화지이였다. 건축안․밖의 이야기를 주도했고 어떤 의미에서 제도권 대학보다 영향력이 컸다. 미국의 주요 건축대학 도서관에서는 두꺼운 장정을 한 빛 바랜 [공간]지를 발견할 수 있다.
2008년 [공간]이 톰슨 로이터 예술․인문과학 인용색인(A&HCI, arts & humanities citation index)에 등재된 것은 학계가 축하할 일이다. 국내 건축학 저널이 포용할 수 없는 중간지대에 공간이 서 있다는 것은 단순한 신작 소개나 건축가의 프로모션의 역할을 넘어 통섭의 건축을 주도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건축과 도시, 역사와 현실, 이론과 실천의 중간지대에 마당을 깔아주고 논문집에서, 보고서에서, 신문에서 담을 수 없는 냉혹한 현실과 풍성한 상상력의 아슬아슬한 지대를 탐침했으면 한다. 난해하지도 모호하지도 않는 글, 넓은 독자층과 소통하는 글을 쓸 용기를 주는 건축지가 되었으면 한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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