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례와 진례다반사
『진례다반사』, Jilye,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2013.7.15., pp.20~27.
경부선 열차에서 내려 처음 만난 진례는 여느 소읍과 별반 다른바 없는 곳이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간 한 주민은 진례라는 이름은 “동네라기보다 어떤 촌 아가씨 같았다”고 했다. 나도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천천히 흐르는 하천을 내려다보는 정취 있는 마을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런 느낌과 거리가 멀었다. 마침 내린 봄비에 들판도 집들도 젖어 을씨년스러웠다. 기차역에서 진례로 이어진 길옆에는 평범한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었고 그 뒤에 철골조 공장들이 가끔씩 스쳐지나 갔다. 들판 사이로 나 홀로 아파트가 불쑥 불쑥 나타났고, 개발을 기다리는 부지에는 잡초들이 산만했다.
갑자기 좁아진 읍내의 길에 들어서자 슬레이트와 함석지붕 아래 미세기 창문을 댄 떡·참기름 방앗간과 같은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옛 풍경을 환기시키는 것은 다방이었다. 전시 참여 건축가 임태병은 읍내 다방을 감칠 맛나게 읽어냈다. “통통한 아주머니의 유쾌한 수다, 둥글레와 쌍화차, 이층집 아래 현대다방” “사장님의 넘치는 카리스마 청운다방” “깨 뿌린 율무차, 한번만 가도 이모라고 부르게 되는 미용실 옆 미미다방” “커피와 더불어 든든해지는 식사, 때로는 시장의 간이 슈퍼 같은 궁전다방.”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누구나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읍내 삼거리의 풍경이다. 하지만 다방 옆에 ‘땅·개발’이라고 간판을 내건 사무실은 이런 풍경이 곧 사라질 것을 짐작케 했다.
진례는 마을의 중심을 지나는 구불구불한 옛길과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이후 생겨난 격자형 도로가 포개진 구조위에 서 있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이하 클레이아크) 역시 이러한 이중적 도시 구조와 대면한다. 널찍한 산업화 도로와 만나는 미술관의 앞 얼굴과 구불구불한 골목길 끝에 갑자기 나타나는 옆 얼굴은 작은 ‘진례’와 큰 ‘미술관’의 만남만큼 생경하다. 부산, 마산, 창원에서 30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한 진례는 34개 마을로 이루어진 농촌이면서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은 공장지대이기도 하다. 이런 농지와 공장이 혼재된 진례의 존재는 분청도자의 고향이라는 자존심에 있다. 아직도 크고 작은 80여 곳의 분청도자 공방이 산재해 있다. 인구 만 명도 안 되는 이 작은 읍내에 도자와 건축의 만남을 표방한 국제적 미술관이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2006년 문을 연 클레이아크는《세계건축도자전(2006)》, 《건축도자, Now & New, 디자인 그리고 도시전(2009-2010)》, 《벽돌, 한국 근대를 열다(2010)》, 《건축도자 경계에서(2010)》를 열었다. 그 후 본격적인 건축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을 생각하다(2011)》, 《한옥, 현대도시에서 함께 살다(2012)》를 잇따라 개최했다. 《진례다반사》는 건축가들이 참여한 세 번째의 기획전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한 후 지금까지 40년 동안 건축전을 11차례 밖에 열지 않았던 것에 비교하면 7년 역사의 클레이아크는 한국에서 가장 건축지향적인 미술관이라 할 수 있겠다.
클레이아크의 숙제
클레이아크가 지향하는 목표는 두 가지의 태생적 숙제를 던지고 있다. 첫째, 삶을 담는 은유적 그릇으로서의 건축과 직유적 그릇으로서의 도자를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과 도자는 모두 흙으로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궁궐, 사찰, 관아, 사대부집은 목구조 방식으로 지었지만 나무로 만든 구조재를 감싸고 지붕을 덮기 위해서 흙이 반드시 필요했다. 민가에서는 흙은 피복재뿐만 아니라 구조재 역할까지 했다. 더 나아가 마을을 잇는 길옆의 토담은 농촌 경관을 형성하는 재료였다.
한편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등장한 분청도자는 청자, 백자와 함께 한반도에서 만들어낸 공예품 중 기능성과 예술성이 세계적 수준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건축과 도자, 두 가지 예술 형식이 물리적으로나 화학적으로 융합된 사례가 있었을까? 한옥의 지붕은 흙을 구워 만든 2차 재료인 기와가 덮고 있지만 더 이상 도자가 건축의 재료로 응용되지는 못했다. 화장실의 벽과 바닥을 마감하는 타일이나 위생도기가 있지만 이는 서구에서 유입된 것이지 우리 장인들이 자생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도자는 한반도의 목구조 건축을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시키는 인자가 될 수 없었을까?
2010년 기획한 《벽돌, 한국 근대를 열다(2010)》는 이런 질문을 던진 첫 전시였다. 기획자 권미옥 큐레이터의 말처럼 벽돌은 “가장 대표적인 건축재이자 질료적으로 도자이면서, 건축도자재로서의 역사성과 지속가능성”을 갖고 있다. 벽돌은 성인 남자의 한 손에 잡히는 인간적 척도의 재료이면서 오랜 시간의 흔적이 품격이 되는 재료이다. 개항이후 지어지기 시작한 벽돌건축은 한국 근대건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때 다양한 대체 재료가 등장하면서 벽돌은 값싼 재료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벽돌은 건축가들에게 성능과 품격을 다시 검증 받으면서 새롭게 진화되고 있다. 《벽돌, 한국 근대를 열다(2010)》는 구조재와 피복재로서 벽돌의 한계와 가능성을 살펴봄으로써 도자와의 접점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는 시도였다.
클레이아크의 첫 번째 숙제가 건축과 도자의 질료적 융합에 있다면, 두 번째 숙제는 지역사회와 공공미술관의 관계 맺기에 있다. 근사한 미술관이 들어선 것에 대해 뿌듯해하는 주민도 있지만, 그들의 일상과는 별반 관계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대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미술관은 전 세계의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상징자본’의 크기를 키워 나간다. 탈장소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공공미술관은 장소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앞에 선 문화 생산자들은 뒤에 있는 지역과 마을 사람들을 뒤돌아보고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아이, 어데 진례 촌 동네에 이런 건물이 있을 수 있습니꺼? 경남 일대 다 알리고 세계로 다 알린다 아이가?” “참 근사하지! 우리가 이 시골에선 상상도 못 했잖아요” “김해시의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서 크게 내놔도 손색이 없습니다.” 한 쪽에는 미술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런 반응이 있는가하면 다른 쪽에는 무관심 혹은 거부감도 표출한다. “저희는 지역에 있으면서 다 도대체 거 뭐하는 데고?” “자주 안가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자주 안가더라구요” “나는 진례 도자기하고 연관될 줄 알았더니 또 그건 아니더라구요”
주민들은 심상에 각인된 상징화된 미술관, 즉 건축의 표피적이고 시지각적 역할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반면 미술관의 사회경제적 역할, 즉 미술관이 자신들의 삶에 무엇인가 구체적인 것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상징화된 미술관과 삶 속의 미술관의 간극은 비단 진례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와의 소통을 중요한 주제로 설정하고 있는 현대 예술은 바로 이러한 간극에 다리를 놓는 노력일 것이다. 클레이아크가 소통을 더 절실한 숙제로 안고 있는 이유는 진례와 김해라는 매우 구체적인 공간적 경계와 대면하고 있는 공공 미술관이라는 점일 것이다.
건축을 전시한다는 것, 일상을 재현한다는 것
《진례다반사》 는 클레이아크의 오랜 숙제였던 사회와 건축의 관계, 지역과 미술관의 관계를 진례를 통해 들여다보는 기획전이다. 처음 글을 부탁받고 ‘진례다반사’란 제목을 들었을 때, 주제에 어울리는 영리한 조어(造語)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다반사’나 ‘김해다반사’라고 붙였다면 들지 않았던 느낌이랄까. 그리고 다반사가 막연하게 ‘多반事’ 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차(茶)와 밥(飯)을 먹는 예삿일(事)이라는 뜻인지를 처음 알게 되었다.
권미옥 큐레이터는 형태와 공간을 설계하는 좁은 의미의 건축가에서 건축연구자, 조경가, 도예가, 설치미술가 등 7팀으로 참여 작가를 넓혔다. 부산을 거점으로 근대문화유산 보존과 재생에 관한 연구를 해 온 연구 집단 ‘건전지’(建展地, 안재철, 송종목, 나춘선), 소리를 주제로 한 실험 작업을 해온 설치미술가 고영택,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 온 조경가 김아연, 공방을 운영하며 건축물, 조형물 설치작업을 해 온 도예가 김재규가 참여했다.
서울 북촌에서 ‘보통의 건축’을 내걸고 작업을 하고 있는 ‘신아키텍츠’(신호섭, 신경미), 서울의 금호동에서 건축놀이와 함께 아티스트들과 활동을 하고 있는 ‘와이즈건축’(장영철, 전숙희), 서울의 홍대 지역을 기반으로 작업을 해 온 ‘임태병+몰드프로젝트’는 모두 지난 수십 년간의 개발시대에 건축가들이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지역’ ‘동네’ ‘일상’ ‘보통’의 의미를 건축에 용해하는 작업을 해온 그룹들이다. 이들은 한국건축의 1, 2세대가 지녔던 사회적 책무에 대한 무거움과 달리 소소한 삶을 담는 프로그램(용도)의 재해석, 재료와 구법에 대한 소박하고 즐거운 실험, 건축의 기존 울타리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유연함을 택한다.
이런 태도와 작업 방식은 2000년대 후반 이후 건축을 에워싼 사회경제적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찾아오는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건물을 설계해주는 좁은 의미의 건축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구조적 변화를 맞았고, 그 후 10여년이 지난 2000년대 말 세계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대규모 민간시장은 얼어붙었고 공공시장은 자본과 인력을 축적한 대형조직의 일감이 되었다. 아틀리에 건축가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작은 일상건축으로 눈을 돌리면서 인테리어, 가구디자인, 공공미술 등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 이들에게 ‘기획’은 전통적 설계만큼이나 중요한 생존 전략이며 전시 활동은 설계의 부산물이 아니라 실험을 위한 일종의 자기 발견적 (heuristic) 도구이다.
2000년대 중반이후 건축은 대학, 공공기관, 단체의 공간에서 서서히 미술관의 문턱을 넘기 시작했다. 건축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늘어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건축전시장에서는 무엇을 보아야 하나요?” 회화, 조각, 공예, 사진, 영상, 설치미술을 전시한 미술관에서는 듣기 어려운 질문이다. 관객은 미술작품 자체가 난해하더라도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형식,’ ‘목적’과 ‘수단,’ 혹은 ‘메시지’와 ‘매체’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작품의 ‘전체성(entirety)’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반면 건축의 도면, 모형, 사진은 건축가와 건축주, 현장의 기술자, 혹은 대중과 소통을 하기 위한 매체다.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현실공간에 드러날 건축물의 형태와 공간, 그리고 구축성이다. 기존의 건축전시회에서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축약한 도면, 모형, 사진을 이용했다. 스케치와 다이어그램과 같은 매체도 있지만 주인공은 아니었다. 따라서 관객은 ‘매체’를 봐야 하는지 실제 ‘건조물’을 읽어내야 하는지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손으로 그리던 도면이 컴퓨터 화면으로 들어간 요즈음 출력한 도면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이 질문은 미술관이 무엇을 기록(archiving)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전시장에서 건축가는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창작 행위를 요구받는다. 건축사사무소에서 생산한 도면과 모형을 전시장으로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으로는 공간을 장악할 수 없다.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관객을 몰입과 교감의 차원으로 끌어내기는 어렵다. 관객을 시각적(visual) 경험에서 동적(kinetic) 경험으로 이끄는 새로운 방법을 구상해야 한다. 기획자들이 건축가에게 기대하는 것도 바뀌고 있다. 표현(presentation)의 매체보다 재현(representation)의 매체를 원한다.
도시지리학자 에드워드 소자는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변증법적 공간을 이렇게 해석했다. 공간은 지각 공간(perceived space), 관념 공간(conceived space), 삶의 공간(lived space)로 나누어진다. 예술가와 건축가들의 관심사는 제2의 공간인 관념 공간이다. 르페브르는 제2의 공간을 일상의 직접성과 생동감이 없는 문화 권력의 도구라고 비판했다. 그 대안이 제3의 공간이다. 르페브르는 제2의 공간이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s of space)이라면 제3의 공간은 ‘재현하는 공간(representational space)’이라고 했다. 즉 주인공이 공간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진례다반사》에 참여한 7팀의 작품이 한편의 오케스트라처럼 매끄럽게 조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시의 의미는 오히려 관념 공간과 삶의 공간의 차이와 긴장을 다양한 눈과 얼개로 포착한데 있다. 건전지 팀이 종이로 만든 미니어처 자전거 수리점은 실물 크기의 자전거 수리점 모형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두 모형 모두 2차원과 3차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지대를 느끼게 한다. 반면 와이즈건축은 서울의 금호동과 진례의 집들을 1/50 축척으로 만들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매달았다. 현실과 모형의 축척 차이가 유발하는 묘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임태병 팀은 작품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자신들의 사무소에 있었던 것 같은 모형, 도면, 재료가 쌓여있는 철재 선반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고, 미술관 아트리움에는 관객을 위한 보드와 플라스틱 박스로 만든 즉석 진례다반상을 만들었다.
반면 신아키텍츠는 주민과 직접 대화를 시도한다. 전통적 건축 매체를 완전히 배제하고 진례사람들의 여과되지 않는 목소리를 320개의 원형 디스크에 담아 묵직한 공간을 연출한다. 김아연 역시 주민과 대화를 시도하지만 꿰고자 하는 것은 나무에 얽힌 스토리텔링이다. 조경가인 그에게 마을 어귀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는 근대적 ‘조경 설계’의 산물이 아닌 집합적 기억이다. 설치미술가로 고영택은 시각, 촉각과 더불어 청각을 담는 시도를 한다. 진례의 낮선 풍경을 소리로 담은 뒤 이를 다시 움직이는 거울 모자이크로 치환한다. 일상과 건축을 ‘도자’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김재규의 작업은 이 전시의 스펙트럼을 압축한다. 수백여 개의 “코딱지만 한 집” 과 나무 모양의 세라믹이 동심원을 그리며 하얀 대지위에 놓여있고, 그 위에 구름 세라믹이 떠 있다. 관객의 위치에 따라 각도가 틀어진 조감도의 풍경이 펼쳐진다.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이후 지역에는 많은 미술관이 들어섰지만 차별화된 목표와 운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빈곤한 인적자원은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이는 미술관의 위기이전에 지역의 위기이다. 글로벌 경제 체제하에 자본주의는 장소에 기반을 둔 지역 문화를 더욱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점에서 지역성의 위기를 역으로 생존 동력으로 삼은 클레이아크는 한국 공공 미술관의 새로운 전형(典刑)으로 꼽을 만하다.《진례다반사》는 로컬과 글로벌을 잇고 있는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긴 또 하나의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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