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계간『건축과 사회』, 2013 특별호, 제25호, 「특집 한국 현대건축 운동의 흐름」, 2013. 12, p.10-27.
특집 ‘한국 현대건축 운동의 흐름’은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2013년 초 새건축사협의회(약칭 새건협) 회의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던 자리였다. 모두들 약간의 취기가 오른 가운데 건축 운동에 몸 담았던 선배, 동료 건축인들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물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 안주삼아 나왔다. 테이블 멤버가 이리 저리 바뀌는 가운데 『건축과 사회』의 특집으로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분위기로 옮겨갔다. 새건협의 기관지인 『건축과 사회』는 학술 논문집과 건축 잡지 사이의 공백지대에서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다루는 계간지로 자리매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압박으로 인공호흡기를 끼고 연명하는 상태였다. 다행히 문화예술위원회의 비평활성화 지원사업에 힘입어 소생의 기력을 얻은 시점이었다. 그 후 발 빠른 몇 명의 편집위원들은 블랙북이라는 이름을 붙인 단행본 『한국 현대건축 운동의 흐름』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편집위원들은 가주제를 정했지만 ‘한국 현대건축 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에 부닥치게 된다. ‘현대건축’과 ‘운동’을 합성한 개념을 한국적 상황에서 정의하는 문제는 긴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지만 논점을 압축한다면 건축에서의 운동을 서구(유럽)의 예술 운동, 특히 모더니즘을 전후 한 아방가르드 운동과 비슷한 틀에서 바라볼 것인가, 1980년대 후반 정점을 이루었던 사회 운동의 연장선에서 볼 것인가, 혹은 직능인을 위한 권익 보호와 개선을 향한 운동으로 볼 것인가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세 갈래의 흐름은 시대적 간극이 있고, 목적과 실천 방법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비단 건축만의 문제는 아니며 인문사회와 예술계의 담론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통적인 현상일 것이다. 세 흐름은 ‘운동’의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개인 차원을 넘어 집단적 움직임이었으므로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명쾌하게 정의되지 않은 ‘한국 현대건축 운동’이라는 이름을 감히 붙이기로 한 것은 한국 건축계에 내재되어 있는 복합성, 이질성, 딜레마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특집호의 중립성을 위해 새건협 밖에서 박정현 건축평론가를 특집 주간으로 모셨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편집위원들은 ‘직능 단체 활동’ ‘대학 동문 그룹 활동’ ‘사회 운동’ ‘건축의 내적 혁신’ ‘사회적 여건 개혁’으로 특집의 장을 나누고, 이에 해당하는 각 단체 혹은 집단으로부터 대표 원고를 받기로 결정했다. 시간적 범위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에서 현재까지로 길게 열어두었지만, 제도적 틀을 갖춘 직능 단체들이 등장한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했다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또한 ‘운동’ 이라는 개념을 중첩할 때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올랐던 1987년 이후, 이른바 87체제 이후에 무게 중심을 두게 되었다.
이번 특집은 집필진이 함께 연구하면서 발전시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끄럽게 조율된 글 모음을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또한 각 영역의 대표 필자들이 쓴 글이 해당 단체 혹은 모임의 공동 지향점과 기록을 온전히 담아낸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결이 다른 여러 글을 모아 하나의 기록물로 남기는 것 자체가 앞으로 있을 논의의 장을 여는데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각 단체의 글 모음 뒷부분에 이를 아우르는 몇 편의 글을 싣기로 했다. 필자는 고사 끝에 뒷부분의 한 꼭지를 맡게 되었다.
필자는 1988년부터 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인 1996년까지 9년 동안 국내를 떠나 있어서 건축계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글쓰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멀리서 변화를 지켜 본 것이 특집의 다양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었다. 이 점에서 이 글은 각각의 운동에 대한 각론적(各論的) 비평이라기보다는 전체를 하나의 줄거리로 꿰어 본 총론적(總論的) 해석 혹은 주석(註釋)에 가깝다고 하겠다. 시대에 따라 글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동시대에 전개된 주요한 운동과 흐름을 비교하면서 서술했다.
1960~70년대의 직능 단체와 대학 동문 그룹
한국 현대건축의 시작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는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정치 사회적 틀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를 논의의 시발점으로 잡는 데는 큰 반론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최초의 공식적 건축단체는 ‘한국건축가협회(약칭 가협회)’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4년 뒤인 1957년 ‘한국건축작가협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건축가협회는 “건축가 상호간의 친목과 건축가의 사회적 지위향상과 권익을 옹호하며 발전 도상의 한국건축계에 공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후 2년 뒤 ‘한국건축가협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1962년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공식적 기구가 되었고, 1963년에는 국제건축가연맹(UIA)에 가입했다. ‘건축가=건축작가’라는 등식은 기술의 영역으로만 간주되어 왔던 건축을 예술과 창작의 영역으로 바꾸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회원의 가입도 제도적인 기준에 따르기보다는 “지식과 경력, 인격”을 판단함으로써 진입의 문을 좁혀 놓았다. 나이와 위계에 따라 1번부터 일련 번호를 붙인 회원 목록을 보면 소수 엘리트 클럽을 유지하려고 한 초창기의 의도가 드러난다.
가협회에 이어 ‘대한건축사협회(약칭 사협회)’가 3년 후에 등장했다. 사협회가 구협(舊協)이라고 칭하는 대한건축사협회의 전신이 발족된 것은 1955년 이지만, 현재의 사협회는 1963년 건축사에 관한 법률인 ‘건축사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근거해 1965년 최초로 건축사시험이 시행되면서 설립되었다. 사협회는 같은 해 말 법인으로 인가됨으로써 공식 단체가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가협회는 건축 작품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건축사법을 정부에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성토하고 반대하였다. 건축사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건축허가 서류 대행을 주 업무로 해왔던 행정서사를 포함 약 1,500명이 시험을 치르지 않고 건축사 자격을 얻는 특혜를 받았다. 그 후 사협회는 소수만을 합격시키는 방법으로 신규 건축사들이 진입할 수 있는 문을 좁혔다. 이때부터 법적인 지위를 가진 ‘건축사’ 중심의 사협회와 ‘작가(건축가)’를 표방하는 가협회가 대립하면서 직능계를 양분했다.
한편 건축학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의 조선건축회는 해방 후 조선건축기술단, 조선기술건축협회, 대한건축기술협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54년 대한건축학회(약칭 건축학회)로 발족되었고, 1967년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삼대 건축 법인체인 건축가협회, 건축사협회, 건축학회가 1967년에 이르러 모두 공식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삼단체는 이후 2002년 새건축사협의회(새건협)가 등장하기 전까지 약 40년 동안 건축계에서 각각의 축을 형성해 왔다.
세 단체의 성격과 활동은 정부의 어떤 부서에 등록되어 있는가에 따라 뚜렷이 구별된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가협회의 1990년대 이전 활동은 전시, 출판, 토론회, 세미나, 강연회 등 건축의 문화적 위상에 무게를 두었다. 특히 미술계 중심의 국전에서 독립한 대한민국건축대전은 1990년 이후 여러 공모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건축가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등용문으로 자리 매김했다. 1990년 이후에는 한국건축가학교(SAKIA)을 통한 교육으로 활동을 확장했다. 대외적으로는 UIA의 한국 대표 창구였다.
반면 국토해양부에 등록된 사협회는 건축사시험, 등록, 관리 등 정부 위탁업무와 법령연구 및 제도 개선 등 건축사의 권익 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다. 현재 건축사협회는 조직력과 예산규모에서 건축가협회를 압도한다. 건축이 법과 제도의 틀 속에서 자리 잡고 권익을 위해 집단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사협회의 관점과 건축가 개인의 역량을 높임으로써 문화적 위상을 제고할 수 있다는 가협회의 관점 차이는 건축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국토해양부에 등록되었지만 건축학회는 정관에서 밝히고 있듯이 연구 사업, 논문집과 연구보고서 발간, 교육 과정 개발 등 연구와 교육이 주목적인 학술단체로 가협회와 사협회가 당면한 현안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
건축사와 건축가의 이름에 농축된 대립 구도는 UIA의 복수 가입 논란으로 2007년 절정에 올랐다가, 새건협을 포함한 4개 단체가 임시 연합체인 한국건축인협회(FIKA)로 한 몸이 되는 것으로 일단 봉합이 되었다. 그 후 가협회, 사협회, 새건협의 통합은 결실의 문턱까지 갔다가 좌초되었다. 2012년 한국건축가연합 (한국건축가협회+새건축사협의회)이 출범함으로써 불씨를 살렸지만 직능 단체의 완전한 통합 노력은 10년간의 과정을 겪으면서 추동력을 잃은 상태다.
한편 초창기 건축 삼단체인 가협회, 사협회, 학회가 공식적 기구로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 중후반 대학의 건축과 동문 모임인 목구회(서울대, 1965), 한길회(한양대, 1967), 금우회(홍익대, 1968)가 만들어 진 것은 흥미롭다. 세 대학은 건축과가 가장 먼저 생긴 대학이었다. 용마루(인하대)는 몇 년 늦은 1975년 만들어졌다. 동문간의 친목과 유대가 주목적인 이런 모임을 ‘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앞의 직능단체와 달리 구체적인 목표를 표방하지 않았을 뿐더러 회원 자격을 동문에 한정하고 있어 운동이 지향하는 확장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동문 모임은 당시 제도권 대학과 직능 단체에서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을 풀어가는 통로였다. 건축공학과 건축학이 모호하게 공생하던 1960~1970년대에 대학 울타리 밖에서 전시, 출판, 세미나, 강연, 답사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학습 방법이었다.
대학 동문 그룹은 그 후 등장한 새로운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짚고 넘어야 할 배경이기도 하다. 학연의 그늘은 건축계 발전을 위해서 늘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동문의 결속은 각종 단체장 선거에서 표를 결집시키는 왜곡된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폐쇄성과 위계성을 비판하고 열린 연대를 표방하고 있는 단체와 모임의 밑바닥에 방식은 다르지만 학연 네트워크가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현실에서 동문 그룹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동문간의 교류, 연대, 학습을 통하여 차별화된 학풍, 정체성, 색깔을 만들어 냈거나 시대적 흐름을 읽고 의제를 생산했는가에 있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동문 그룹 연대는 학연이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이 점에서 한국 건축가들이 운동의 모델로 삼기도 했던 일본의 ‘메타볼리즘’이 도쿄대를 중심으로 한 좁은 서클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엘리트적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메타볼리즘은 유럽의 영향을 받았지만 역으로 유럽에 영향을 끼쳤던 운동이었다. 목구회, 한길회, 금우회, 용마루를 포함한 대학 동문 그룹과 서클이 이런 역량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가협회, 사협회, 학회의 제도권 진입으로 비워진 공간에서 나름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당시 건축 산업을 둘러싼 열악한 조건과 위상을 돌이켜 볼 때 그들 활동의 의미를 간과하거나 축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건축단체와 대학 동문그룹이 기지개를 켠 때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62~66년) 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전력·석탄 등의 에너지공급원의 확보, 농업생산력의 증대, 기간산업의 확충이 정부의 역점 사업이었듯이 이 시기는 한국 경제의 토대를 마련하는 걸음마 단계였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연평균 성장률 7.8%의 고도성장을 했지만, 1966년 1인당 국민총생산이 125달러에 불과한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후진국의 굴레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 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72~76)이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연평균 성장률 9.7%를 유지하면서 농업국가에서 신흥공업국가로 바뀌었던 10년이었다. 이 과정에 건설은 한국경제 성장의 한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건설투자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5%를 기록한 1972년 이후 30년간은 건설이 주도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같은 개발 시대에 사회는 건축의 질보다 양을 요구했다. 건축 문화적 위상을 기대하기에 앞서 기술과 디자인, 건축과 건설을 구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질주의 시대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새로운 건축 운동
건축을 정치 사회적 공간으로 끌어내었던 촉발제는 1987년 정점에 올랐던 민주화 운동이었다. 6월 항쟁의 열기가 식기 전인 10월 청년건축인협의회(약칭 청건협)가 결성되었다. 청건협의 주축은 소장파로 분류된 73학번과 78학번이었고, 뒤이어 이론으로 단단히 무장된 82학번이 적극 동참했다. 원로와 선배들이 배제되고 몇 년 터울의 세대가 모인 인적 구성은 파격적이었다. 또한 도시빈민 주거 설계와 같은 활동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빨간 딱지’가 붙여질 만한 것으로, 서슬이 시퍼렇던 군사독재 시대에 직능인들이 감히 꺼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과격세력으로도 비춰졌던 청건협의 활동을 새로운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격동하는 사회 안에서 건축의 좌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실천을 선언한 최초의 직능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청건협은 그때까지는 건축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던 주거, 도시, 환경 문제를 중심적 실천 강령으로 내걸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청건협의 목표와 실천 방법은 현실적이지도 않았고, 건축의 질적 수준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현장에서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은 이전 시대의 단체, 모임, 심지어 1세대 주자 건축가들의 인식과 다른 것이었다.
청건협은 1990년대 초반을 넘기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3대 공동의장을 맡았던 함인선이 밝혔듯 직능단체이기를 원했던 다수의 “쁘띠부르주아지이자 사용자인 건축가”들과 건축내의 진보세력이기를 원했던 소수와의 엉거주춤한 동거는 결국 파열될 수밖에 없었다. 단명으로 끝났지만 금기시되었던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한국 건축의 현실과 접목하려고 했던 청건협의 시도는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 민족건축인협의회 (민건협, 1992, 1995), 건축운동연구회 (건운연, 1990), 한국도시건축연구원 (도건연, 1992), 건축과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건미준, 1993), 새건축사협의회 (새건협, 2002)와 같은 다양한 갈래의 운동에 불을 지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청건협의 추동력이 떨어지면서 구심점에 있었던 구성원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는데 진보적 계열이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이 민건협이었다. 1988년 12월 예술계의 진보 세력 연합체인 민족예술인총연합(약칭 민예총)이 창립되었는데, 이때 건축계를 대표해 '민족건축위원회'가 참여했다. 이 위원회가 몇 단계의 변화를 거쳐 상호 협의체를 지향하는 민건협(1995)으로 바뀌었다. “자본가와 소유주를 위한 예쁜 건축이 아닌 착한 건축”을 내걸었던 민건협은 건축의 진폭이 얼마나 넓을 수 있는지, 다른 말로 건축의 간극이 얼마나 벌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건축계의 가장 ‘왼쪽’ 지점에 서 있었던 민건협의 실제 활동은 청건협보다 현실적인 것이었다. 민예총 아카데미 강좌를 이은 건축 강좌와 여름캠프가 그것이었다. 민건협을 지탱해온 한 사람인 양상현은 민건협의 여름캠프가 서울건축학교의 모델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후 민건협의 활동은 고등학생 건축학교와 어린이 건축학교 뿐만 아니라 시민참여 운동, 연구 및 출판 사업으로 확장되지만 핵심은 현장 중심의 교육이었다. 민건협을 포함해 1990년대 중반 건축계의 화두가 교육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흐름이다.
청건협의 등장과 소멸에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했던 또 하나의 집단이 건운연이었다. 건운연은 “청건협의 활동이 구체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해진 상황”에서 진보적 건축운동이론을 견지하는 모임으로 규정했다. 대학원생이 주축이었던 활동은 자연스럽게 “진보적 건축역사 및 건축이론에 대한 연구”가 중심이었다. 민건협의 ‘민족’보다 이념적 농도가 진한 ‘민중’을 회칙에 내걸었던 건운연은 러시아 혁명, 구성주의, 소비에트 건축을 공부하면서 한국 건축을 보다 넓은 이념적 지평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건축운동이라는 추상개념은 아직 관념 속의 안개”라고 토로한 건운연은 대학원생이 중심이었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들이 넘고자 했던 청건협처럼 단명으로 끝났다.
이처럼 짧은 수명으로 사그러들었지만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20년이 지난 후 학자들이 심포지엄의 주제로 삼을 정도로 건축계에 영향을 끼친 집단은 4.3 그룹(약칭 4.3)이었다. 1990년 4월 3일 당시 30, 40대 건축가들이 모여 결성한 4.3은 김인철이 밝혔듯이 “자신의 주관을 세우고 확인하려는 동기”가 출발점이었다. 구성원 14인 대부분은 설계사무소에서 수련을 거치고 홀로서기를 시작할 지점에 서있었지만 그간 배웠던 지식과 방법론만으로는 스스로의 건축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제도권 대학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여기거나, 전수를 해준 스승을 잃었거나, 스승이 없다고 생각한 세대들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혼동과 갈증을 느낀 사람들이었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정치 경제적 맥락에서 한국 현대건축을 세 시기로 구분한바 있다. 첫째, 해방과 건국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약 40년, 둘째, 1980년대 중반부터 외환위기를 맞은 1990년대 말까지의 약 15년, 셋째 20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의 약 10년간이다. 이틀에서 보면 한국 건축의 1세대는 1960~1970년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1980년대 후반 작고를 했거나 전면에서 물러났던 세대다. 한쪽에서는 나라 전체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개최로 들떠있고, 다른 쪽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던 때에 1세대 주자로 꼽히는 김수근(1986)과 김중업(1988)이 타계했다.
4.3을 포함한 2세대들에게 1세대의 퇴조는 방패막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이론적 배경을 소화하기도 벅찬 각종 사조와 양식이 범람하며 상업주의와 결합하는 것을 혼란스럽게 지켜보았던 이들에게 작업의 뿌리를 찾는 것은 절박한 문제였다. 이들에게 건축의 사회적 역할은 도시빈민주택을 설계하고, 진보세력과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본질을 찾는 것이었다. 그것이 건축가로서 홀로서는 길이었으며, 홀로 선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학습이외에는 이 난관을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김인철이 요약했듯이 4.3의 활동은 “자습-복습-검증”이었다. 1990년 봄부터 1994년 가을까지 4년 동안 했던 23차례의 세미나, 4차례의 건축기행, 전시회와 심포지엄이 학습의 밀도를 말해주고 있다.
이중 유럽 기행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유럽의 ‘세기말’에 투영하고 동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1세대 선배들을 통해 간접 학습한 모더니즘과 직접 대면하고, 그 시대의 건축과 건축가를 참조체로 삼으려고 했다. 이는 심포지엄《전환기의 한국건축과 4.3 그룹》에서 전봉희가 지적했듯이 “한국 지식인의 공통적인 대서구 열등감의 발로,” 혹은 “스스로를 근대의 개척자와 동일시하는 엘리트적인 태도”와, 우동선이 진단했듯이 “개항 이후에 전개된 한국 근현대건축의 움직임을 부정”한 자연스런 기착점일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 현실 참여 혹은 건축교육 참여에 대한 이견이었든, 홀로 서기를 위한 수순이었든 4.3은 결별했다.
건축계가 맞이한 1990년대 초중반은 1980년대 말과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당시 누구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신자유주의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고 있었다. 곳곳에서 일이 넘쳐났고 모두가 바빠졌다. 사회적 운동을 표방했던 청건협의 투쟁 대상은 무디어졌고, 사회를 향한 목소리는 건설 현장의 소음에 묻혔다. 박정현의 표현처럼 “그들이 애초에 절감한 문제 설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던 1994년, 4.3 구성원들도 분주한 일터로 각자 돌아갔다.
스스로를 스터디 그룹이라고 자칭했듯이 이념과 실천을 공유하는 운동이 아니었고, 구성원 몇몇은 “별 것 아닌” 모임이었다고 애써 의미를 축소하고 있음에도 4.3의 잔향이 계속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배형민의 해석처럼 “언어의 대상, 그리고 대상의 언어를 설정” 했던 최초의 집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 언어와 말을 일체화하려고 했던 지극히 모순적인 시도는 역설적으로 힘을 발했다. “말과 디자인의 틈을 노출”한 것이 4.3의 영향력이라는 최원준의 평가처럼 이들은 말이 힘을 갖는 시대를 알아차리고 선점한 이들이었다. 구성원 중 여럿은 ‘말’을 하나씩 조어(造語)해서 제자리로 돌아갔고, 그 후 이들의 말은 미디어와 대학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었다. 4.3의 활동을 “경제적 논리와 문화적 현실간의 대립 구도 속에서의 위치잡기”로 본 이종우의 해석은 그들이 던진 파장의 진앙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짚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4.3이 참조체로 삼았던 세기말의 유럽보다, 1960년대의 유럽과 미국, 그리고 메타볼리즘을 잉태한 일본의 상황과 비교하는 것이 더 유의미할 것이다. 1960년대는 근대 건축의 거장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서 각종 사조와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때다. 이즈음 레이너 밴험은 모더니즘을 ‘학구주의’와 ‘미래주의의’ 모순된 결합으로 파악하고,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한 미래주의가 예술적 계보의 학구주의를 넘어설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건축계는 밴험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미학과 언어를 버린 기술이 얼마나 무력한지 건축가들은 잘 알고 있었다. 건축가들은 후기자본주의에서 강력해진 문화자본을 결코 넘지 못하며, 넘어서고 싶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학구주의의 승리가 이를 방증했다. 학구주의의 승리는 대학과 담론의 승리이기도 했다. 밴험의 기대를 저버린 미래주의는 기술, 조직, 자본의 효용을 극대화한 기업형 사무실에서 변신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래주의가 유럽과 미국에서 시들해진 반면 일본의 메타볼리즘은 서구의 호기심을 끌었다. 플로그인 캡슐과 같은 유기적 건축에서 ‘옥시덴탈’들은 마징가제트를 보는 것과 같은 묘한 ‘오리엔탈 미래주의’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밴험이 메타볼리즘이 제시했던 ‘메가스트럭쳐’ 이름을 빌어서 1976년 출간한 책 제목으로 삼았던 것은 상징적이다. 유로 아메리카적 틀에서 어떻게 비춰졌던 간에 메타볼리스트들은 자신들이 당면한 정체성의 위기를 일본이라는 국가적 울타리를 넘어 당대의 문제와 동일선상에 두고 접근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도는 운 좋게 전후 복구사업과 고도성장기와 맞물려 힘을 받았다. 출구를 100년 전의 유럽에서 찾으려고 했던 한국의 4.3과 무모할 만큼 미래주의적이었던 일본의 메타볼리스트의 간극은 시간적 차이의 몇 곱절이었다.
현실 속으로 다시 자리 잡기
민주화 운동이 타오르던 1980년대 후반 건설 경기도 불이 붙었다. 특히 1987년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탄 건설투자비율은 1990년대 초반 GDP대비 20%을 넘어섰고, 1997년 외환위기 때까지 다소의 상승과 하강은 있었지만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타오르는 건설 경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속도전과 대량전을 동반한 주택 2백만 호의 건설이었다. 1998년부터 1992년까지 5년 동안 인구 8백만 명을 수용하는 주택을 짓겠다는 무모한 정책은 정치권과 언론의 질타를 받았고, 국민들도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만, 정부는 1991년 8월말 목표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아파트는 디자인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건축계 판도는 아파트를 주특기로 하는 대형사무소들이 등장하면서 바뀌어 갔다. 아파트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조직을 키워야 했고, 덩치가 커진 조직은 더 많은 일감이 필요했다. 중소규모의 사무소도 여기에 가세하면서 ‘평당 몇 만원’에 설계한 도서가 팔려나갔다. 설계사무소는 작업실이 아니라 공장이 되어갔고, 전체 파이는 커졌지만 돌아가는 몫은 줄어들었다.
이때 설계·감리 분리, 설계비 덤핑 등 불합리한 관행과 제도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어선 것이 건미준이었다. 범 건축인의 조직을 향한 의욕적인 첫 단계로 발족된 임시기구는 1993년 6월 기자회견을 통해 ‘건축가 선언’ ‘실천약속’ ‘건축백서’를 발표하고 건축사 면허·시험, 감리·심의·인허가 등 불합리한 법과 제도를 개선해줄 것을 정부에 강력히 건의했다. 이때 118명의 건축인이 서명하고 동참했다. 같은 해 9월 건미준은 창립총회에서 정관인준 및 임원을 선출하여 공식 기구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직능의 권익 보호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면서 사회운동과 예술운동의 넓은 진폭 사이에 공유 지점이 생겨났다. 실제 건미준의 초기 주축 인사는 청건협과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던 홀로서기에 성공한 40대 중후반의 건축가들이었다. 건미준의 목소리는 건축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설계·감리 분리 제도, 건축사시험 제도를 개선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주택백서를 발간하고 새건축운동의 인증마크 제도를 만드는 등 신선한 운동을 펼쳤지만 동력을 잇지 못했다.
건미준이 만들어진지 1년 후 1994년 여름 서울건축학교 설립을 위한 모임이 시작 되었고, 4.3은 결렬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이는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는 운동이든 건축의 자율성을 향한 내적 혁신이든 ‘건축교육’이 집단과 모임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초대 교장을 역임한 조성룡이 강조했듯이 “건축교육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건축가교육”을 천명했던 서울건축학교는 30~40대의 건축가들이 튜터로 전면에 등장하는 워크숍을 1995년 한해에 4차례나 열었다. 이들 대부분은 해외에서 교육을 받고 실무를 경험한 새로운 세대들이었다. 같은 해 4월 서울건축학교는 '서울건축문화재단' 설립을 추진하여 제도권으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일부 건축계 인사들의 반대로 법인설립에 실패하고 무산”되었다. 대안으로 1997년 김수근문화재단 부설 서울건축학교(sa)를 개교하고 스튜디오와 공개강좌를 두 축으로 하는 정규교육과정을 시작했다.
설계가 중심이 되는 교육은 ‘디렉터 제도’라는 이름으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 1991년 처음 실험한바 있는데 타 대학에 적지 않은 파장을 주었다. 그런데 참여 건축가의 규모와 면면에서 서울건축학교의 ‘튜터제’가 제도권 대학에 준 충격은 훨씬 더 큰 것이었다. 특히 1998년 여름부터 11년간 12차례에 걸쳐 행한 여름 워크숍은 건축가를 꿈꾸는 학생이면 반드시 참여해야하는 필수 코스로 인식될 정도였다. 특강에서 겨우 만날 수 있었던 최고의 건축가들에게 크리틱을 받고 밤을 같이 새는 것은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자 자랑거리였다. 여름 워크숍은 학생뿐만 아니라 젊은 건축가들에게는 일종의 ‘검증 코스’이기도 했다. “동숭동에서 젊은 건축가들을 면접한다”는 이야기는 그 영향력을 보여 주는 뒷담화다.
서울건축학교의 힘이 공동의 철학, 이념과 이에 따른 실천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역량과 명성의 집합에 있었다는 것이 바른 진단일 것이다. 이 점에서 서울건축학교 역시 운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념은 선명하고 주장은 강했지만, 실천의 구체성은 갖지 못했던 이전에 비해서 분명 더 전략적이었고 성숙된 움직임이었다. 2002년부터 시작된 건축학교육의 5년제 전환과 인증제도의 직접적인 계기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의 국가 간 교육의 상호 인정이지만, 서울건축학교 동심원에 있었던 건축가들이 자극과 경쟁을 불러온 것도 큰 요인이었다. 설립 10년째인 2004년 서울건축학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약칭 예종)의 틀 안으로 들어갔다. 제도권 밖에 있던 많은 건축가들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학 안과 밖의 차별성이 희석되기도 했고, 법인화에 실패한 비제도권 학교를 더 이상 끌고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post-sa’라고 할 수 있는 차세대 건축가들의 모임, ‘as’가 2012년 말 발족되었다.
서울건축학교가 개교했던 때는 수십 년간 지속된 건설의 시대가 IMF 외환위기 앞에 종언을 고하던 때였다. 위기와 재충전은 동전의 양면이듯 젊은 건축가들에게 서울건축학교는 좁은 서클로 들어가는 테스트 베드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건축계에는 건축인들의 운동과 노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힘이 개입되기 시작했다. 건축주가 의뢰하고, 건축사가 설계하고, 건설사가 짓는 전통적인 구도는 IMF 사태 이후 깨졌다. 구조조정을 거치며 강력해진 금융자본이 건설투자의 맛을 보고 건설시장에 직접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부동산 개발업자(시행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공공부문도 민간투자유치사업(BTL)을 시작하고 지방자치단체는 대형 사업을 앞 다투어 유치했다. 이렇게 몸집을 키운 시장 안으로 일괄계약방식(턴키방식)과 건설관리(CM)가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를 틀었다. 건축설계 시장은 골리앗과 다윗의 구도로 양극화 되어갔다. 건축설계의 위상은 금융자본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의 밑바닥으로 처참하게 내려앉았고, 건축설계비는 10년 전 보다 낮아졌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들렸다.
스스로의 작업에 충실한 것만으로는 또는 건축교육을 통한 건축계 내부의 혁신만으로는 건강한 건축이 존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축사들이 ‘건축의 공공성과 건축의 사회성의 실현’ 이라는 더 이상 자극적이지도 않는 슬로건을 내걸고 결집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화를 실천하는 건축사협의회’이라는 긴 이름으로 시작한 새건협은 2004년 국토해양부의 법인인가를 받아 공식적 활동을 시작했다. 출발은 2002년 ‘100인 선언대회’에 서명한 선배 건축가들이었지만 결실을 이끈 것은 40대 초반의 후배 건축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문성의 표현대로 새건협의 등장은 1962년 한국건축가협회와 1965년 대한건축사협회가 법인 인가를 받은 후 39년 만의 일어난 “일대사건”이었다. 참여정부의 시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새건협은 마을 만들기, 소외계층 집짓기와 같은 현장 참여, ‘도시 및 주거 특강’, ‘건축 책을 묻다’ 등의 교육 프로그램, ‘건축과 사회’ 기관지 발간, ‘젊은 건축가상’의 전신인 ‘신인건축상’ 제정 등 활동 영역을 넓혔다. 무엇보다 건축 관련 법령 개정, 정부사업의 기획과 운영의 싱크 탱크로 참여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그러나 새건협은 한쪽으로는 건축계의 분열을 부추기는 집단으로 다른 쪽으로는 건축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문제를 업고 또 다른 형태로 제도화한 세력이라는 눈총을 받았다. 또한 새건협은 차세대 건축가들 사이에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 현장에 뛰어든 세대들은 건축의 공공성과 사회성뿐만 아니라, 2세대 건축가들이 씨름했던 문화적 정체성과 뿌리 찾기와 같은 무거운 이야기를 논할 여유가 없거나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건축이 처한 현실을 비판하지만 왜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지, 왜 자신들이 나서야 하는지 쉽게 수긍하지 않는 세대다. 새건협이 표방한 ‘새건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젊은 건축가들의 피부에 다가가는 모습과 색깔을 보여주는 것이 새건협의 큰 숙제다.
글을 맺으며
운동이 체감되지 않는 시대에 운동을 논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까? 그리고 유효한 질문인가? 이 물음은 이 글의 서두에서 던진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건축에서의 운동은 예술 운동이어야 하는가, 사회 운동이어야 하는가? 직능의 권익 운동이어야 하는가? 이 셋의 교집합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기대를 접지 않는 까닭은 한국의 도시와 건축이 여전히 미완이며, 공공 자본을 필요로 하며, 깨어 있는 건축가(사)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번 특집호에 수합된 글을 읽고 정리를 하면서 내린 원론적인 결론은 운동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력을 결집하거나 제도권에 진입하는 것이 건축 운동의 지속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확인하게 되었다. 단체와 집단의 결집력과 운동의 영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운동의 수명’과 ‘운동의 공명(共鳴)’은 별개일 수도 있다. 한국 건축계의 여러 단체, 집단, 모임은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조건에 대응하면서 자리 매김을 해왔지만 건축의 경계를 넘어 사회와 공명하지는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재를 읽고, 과거를 되돌아보았지만, 미래를 향한 의제와 실험을 보여주지 못했거나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2030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 될까?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는 GDP, 인구, 국방비, 기술력을 종합한 물리력에서 한국이 세계 9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민 개개인들도 2013년 현재보다 평균 3배 이상 부유해 진다. 미국계 금융 서비스 기업 시티그룹은 2030년 한국의 1인당 GDP가 6만 달러를 넘어 세계 5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더 나아가 2025년 한국의 GDP가 5만 달러를 넘고, 2050년에는 8만 달러를 넘어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소득이 높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기 어려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편 2030년 한국은 대부분의 유럽국가와 더불어 ‘중위 연령’이 45세를 넘는 ‘후기 고령화’ 사회 군에 진입하게 되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도시형 국가가 될 것이다. 도시안의 불평등과 불균형은 심해지고, 식량, 물, 에너지의 부족과 기후 변화는 새로운 도시 환경을 만들어 갈 것이다. 고소득, 고령화, 고밀도, 저에너지, 불균형의 시대에 앞서 한국 건축이 던져야 할 의제는 무엇일까?
모든 운동의 역사는 형식과 내용은 달랐지만 변화와 미래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예술과 건축은 특히 그러했다. 미완의 한국 현대건축 운동은 무한한 가능성과 불확실성이 공존하게 될 미래에 새로운 방식으로 열매를 맺지 않을까?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이 되었지만 단군 이래 최고의 산업 기술과 건축이 만나는 접점에 한국의 건축 운동이 작열하지 않을까? 밴험이 희미하게 그렸던 기계시대의 미학이 100년 뒤 한국에서 구현되지 않을까?
거친 글을 마무리하며 지역 사회에 발을 담그고 실천한 건축인들, 사회적 의제를 찾고 잠재적인 건축가를 발굴한 건축 언론인들, 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뛰었던 정치인들을 개인 차원이라는 이유에서 포함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 한편 이 특집에서 다룬 모든 단체, 집단, 모임의 반대편에 제도권 대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쩌면 이 모든 움직임은 대학을 향한 외침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대학과 각종 학회의 변화를 건축 운동의 흐름과 포개어 본다면 한국 현대건축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건축과 사회』가 완전히 소생한 후 또 다른 블랙북에서 기대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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