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문화의 함정과 한국 현대건축의 담론들
이상건축, 9910, pp.146-149.
건축에 ‘문화’라는 단어가 붙는 시대, ‘제도사’, ‘설계사’란 이름 대신 건축가라고 불러주는 시대, 건축가의 일대기가 대중매체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고, 해외초청 건축가의 강연회를 가득 메우는 젊은 건축도의 열정, 각종 건축공모전과 워크샵의 열기, 미달 없는 117개의 4년제 대학 건축학과, 99개의 2년제 대학 건축학과, 건축의 최대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를 누리던 건축잡지가 재정악화로 폐간되는 상황에서도 십 여개가 넘는 건축잡지를 유지해오는 사회. 적어도 한국건축계는 가시적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경제위기로 건축설계시장이 극도로 좁아진 상황의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처럼 기이한 현상은 건축이 수요 공급의 경제논리에 위축되지 않고 자생적 시장을 형성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시장이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은 구체적 건축물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넓은 범위의 건축행위를 포함해 나가고 있다. 비평, 논의, 토론, 혹은 담론이라고 일컬어지는 행위와 그 결과물인 글이다. 90년대 이전 건축계의 질문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지을 것인가?”로 귀결되었다면 이제 “짓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왜 지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으로 확장되고 있다. 담론의 주체는 ‘창조자’나 ‘창조자’의 작품에 주석을 달아주는 ‘보조자’에 국한되지 않고 제3의 행위자로 열려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제3의 행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조혜정은 “글읽기와 삶읽기”에서 지식인을 이론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좋은 사회란 어떤 면에서 그 사회의 지식인이 만들어 내는 이론이 현실을 보다 잘 보게 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현실과 유리된 이론으로 먹고사는 지식인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인 것이다. ...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회, 자신의 사회를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어가지 못하는 사회를 식민지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p.22)." 조혜정의 글은 우리사회를 보는 이론을 외부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자기성찰의 목소리이지만 이것은 비단 인문과학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사회 현상을 하드웨어, 지식인의 이론을 소프트웨어에 비유한다면 인문과학의 식민지성은 제3의 문화로 이식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가 분리될 수밖에 없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인문과학은 사회현상이라는 하드웨어를 가져오지 않는다. 반면 건축역사, 이론, 비평은 소프트웨어를 다른 문화로부터 가져오지만 이는 사회현상을 읽는 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건축기술, 유형, 규범, 원리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문과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건축에서의 식민지성은 지식인의 식민지성을 떠나 물리적 환경의 식민지성으로 보다 쉽게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한국 건축계에 잠복하는 식민지성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싶다. 제1의 식민지성은 비트루비우스, 알베르티, 로지에, 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 이론, 서구 현대건축가의 방법론, 서구철학과 미학이론이 한국건축역사와 이론을 오랫동안 변방으로 밀어내었던 ‘상황의 식민지성’이다. 제2의 식민지성은 우리의 도시와 건축에 스며들어 고착된 타 문화이데올로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읽지도 못하는 ‘인식의 식민지성’이다. 두 가지 식민지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지만 태도와 가치관은 매우 다르다고 본다. 나는 조혜정의 글이 궁극적으로 식민지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에서 출발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삶을 읽어내는 자생적 틀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식민지성은 한국사회만이 처한 문제도 아니며 주체적 글읽기와 삶읽기에 관한 노력 역시 우리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 한국의 사회상황을 보는 자생적 이론을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1990년 한국사회를 서구로부터 구별되게 도려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만 온전히 속해 있고 유지되는 현상을 밝혀내는 작업이 그 사회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물리환경, 인문환경은 지역과 문화가 만들어내는 특수성을 넘나드는 보편성을 가진다. 이론의 역할과 힘은 이러한 특수성에 잠재된 보편성을 찾아내고 이를 담론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점에서 서구의 건축역사와 이론을 탐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필요한 작업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의 목적과 방법론에 있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론을 기성품처럼 포장해서 들여온 다음 현실을 투사하는 안경으로 간주하는 행위와, 빌려온 사유의 틀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자기발견적 장치로 사용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전자의 관심은 현상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론 자체에 있기 때문에 추론이 앞서는 사유의 방법을 택한다. 현상이 바뀌어도 새로운 이론이 수입되기 전에는 그 틀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이점 때문에 제1의 식민지성은 끊임없이 다른 이론을 수입하면서 그 당위성을 유지하려 든다. 반면 이론을 자기 발견적 장치로 삼는 것은 이론이 지니는 보편성을 검증하고 확인하면서 궁극적으로 현실을 읽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론은 논증 가능한 관점이며 인간은 관점 없이는 사물을 볼 수는 있어도 읽을 수는 없다. 이론이 축적되지 않은 우리현실에서 백지상태로부터 현실을 읽어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글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독해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한국건축계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힘은 건축시장의 활황도 제도적 인센티브도 아닌 건축인의 자발적 동기이다. 과거와 달리 한국의 토양 밖에서 교육과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함이 여기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때문에 순수하게 우리 것이 무엇인가를 던지는 질문 자체가 모호한 것이다. 나는 서구의 건축이론을 더 많이 가져오면 올수록 담론이 오히려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론이 한국의 건축환경 안으로 용해되는 한 제1의 식민지성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문제는 이론을 가져오기 위해 포장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다양한 현상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내기 위해 이론은 단순화되고 추상화되는 속성을 지닌다. 이를 받아들일 때 이론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구체적 사실, 과정, 도시문화와 같은 특수성은 생략되고 포장된 이론을 다른 속에서 펼쳐질 때 그 본질이 왜곡되는 것이다. 한국 건축계의 담론에 떠도는 무수한 이론들이 용해되기 전에 사라지고 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아방가르드와 도시건축적 담론
1960년대에 시작되어 오랫동안 화두가 되었던 전통논쟁이 내실 있는 논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유 중에는 서구의 건축작품, 건축이론을 받아들였던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한국 건축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꼬르뷰지에, 라이트 등의 거장의 건축은 19세기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형태, 양식을 제시하였지만 형태주의에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건축이 사회, 문화, 경제가 만들어낸 총체적 산물의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들의 관심은 건축을 넘어 도시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이들이 꿈꾸었던 도시를 다소 장황하지만 서술하여 본다.
1920년대 말 라이트는 19세기 도시와는 다른 새로운 도시 브로드에이커를 구상한다. 말 그대로 넓은 땅의 도시였다. 19세기 중엽 대도시의 문제는 유럽과 미국이 처한 공통된 문제였다. 런던의 인구는 90만에서 450만으로, 빠리는 50만에서 250만으로, 베를린은 19만에서 200만으로, 뉴욕은 6만에서 340만으로, 시카고는 조그만 마을에서 19세기말에는 170만으로 인구가 급격히 팽창된다. 도시는 더 이상 건강한 유기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라이트에게 밀집된 도시는 악의 상징이었고 악을 조장하는 것은 임대(rent)라고 보았다. 첫째는 땅의 임대, 둘째는 돈의 임대, 셋째는 사고의 임대였다. 라이트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방법으로 이상적 커뮤니티를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 모든 사람은 도시지옥을 벗어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브로드에이커는 임대가 없는 인구 3만의 도시로 모든 사람은 1에이커의 땅을 소유한다. 사람들은 특정 직업으로 분류되지 않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겸한다. 그들은 농부이자 기술자이자 지식인이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 정신 노동의 구분, 일과 휴식의 구분이 없는 곳, 즉 현대인의 일상이 분해되는 것을 복원하는 곳이 브로드에이커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동차였다. 자동차의 대수는 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족 수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가주택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한 주택에 사는 노동자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파트타임으로 타인에게 노동을 제공하더라도 그는 경제적으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어떠한 경제적, 사회적, 물리적 외압으로부터 가족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 집인 것이다. 집과 땅, 주위가 맺는 관계는 가족과 그들의 일터, 휴식공간과 맺는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대지를 따라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라이트의 건축은 브로드에이커에 구상한 집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935년 유럽대륙의 건축거장 건축가 꼬르뷰지에는 ‘현대도시’에 이어 ‘빛나는 도시’를 구상한다. 라이트가 계획가가 만든 도시환경이 사회 병리현상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꼬르뷰지에는 이러한 자연적 경제질서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사회는 피라미드로서 그 구조의 가장 밑에는 노동자, 화이트칼라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최상층에는 엘리트들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를 대체하는 이러한 피라미드 사회를 염두에 둔 것은 인간의 권력은 생산구조에 대한 책임과 비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사회의 질서와 이름다움은 구성원의 완벽한 협동의 결과이므로 그 구성원은 자유를 얻는다. ‘현대도시’에서 중심을 엘리트, 주변을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한 반면 ‘빛나는 도시’에서는 더 이상 계층의 구분이 없다. ‘빛나는 도시’ 중심에 서있는 유니떼라고 불리는 고층 아파트에서는 1914년 그가 구상한 도미노이론이 구체화된다. 유니떼는 노동자의 지위에 따라 배정되지 않고 가족 수와 요구에 따라 배정된다. 그가 생각하는 가족개념도 라이트와 달랐다. 남성은 일터로 여성은 가사를 책임지는 브로드에이커와 달리 남성과 여성은 똑 같이 일하고 육아에서부터 가정의 허드렛일을 사회가 책임지는 도시였다. 라이트의 도시에서 노동과 여가가 하나라면 꼬르뷰지에의 도시에서 분리된다. 가정은 경제단위의 의미를 상실하고 여가의 공간으로 남는 것이다. 아침에 부부는 일터를 향해 자녀들은 학교와 탁아소로 각자 향한다. 점심시간에 그들은 수영장, 체육관 혹은 카페에서 잠시 해후한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이미 청소와 빨래가 되어 있고 아침에 주문된 음식이 배달된다. 가족이 빨래, 청소, 요리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원을 가꾸는 것처럼 여가활동이 된다.
두 사람이 계획하였던 도시를 유토피아라고 역사가들은 부른다. 사회변혁을 전제로 했던 두 도시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계층의 불균형을 비판하고 인간다운 삶을 역설했지만 정작 당시의 맑시스트 사회운동이나 전문 도시계획가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미스,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건축가들이 디자인과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현실적 접근을 취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라이트나 꼬르뷰지에와 달리 이상적 도시를 계획하지 않았다. ‘빛나는 도시’와 ‘브로드에이커’는 현실에 발을 담그지 않은 거장들의 주관과 상상에 철저히 의존한 것이다. 생각과 실천의 문제가 그들의 일생을 통하여 제기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였던 이상도시의 숨은 목적은 도시의 건설이 아니었다. 건축이론, 건축원리가 갖는 우월성을 도시라는 거대한 필지에다 그려 보였던 것이다.
‘빛나는 도시’와 ‘브로드에이커’는 그림과 글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비록 보습을 달리하고 있지만 북미와 유럽의 도시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고 생산, 재생산, 변형, 이식의 과정을 거쳐서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도시의 근저에 이미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꼬르뷰지에와 라이트에게 건축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형태미학과 공간개념은 건축의 자율적 영역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와 맺는 가치는 도시라는 더 큰 틀 속에서 파악될 때
뚜렷해지는 것이다. 전원교외에 사는 미국인에게 라이트 주택의 의미는 굳이 설명 할 필요도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고, 빠리의 교외에 세워진 사보이 주택이 왜 혁명적이었는지는 밀집된 빠리에 사는 사람들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미노이론과 대지를 향해 뻗어나가는 라이트의 프레리 주택은 건축사와 건축이론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뒤에 숨어있는 문화, 사회, 가치관 등은 왜 타자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건축계에서 잠재된 소비문화
나는 한국건축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건축과 도시의 분리현상이 생산적 담론을 가로 막아왔던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 김수근과 김중업이 해외에서 습득한 이론과 경험을 실험했던 하나의 사례를 들고자 한다. 최근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바래진 두 장의 흑백사진이 그것이다. 김수근이 설계하여 1964년 개관된 자유센터와 김중업이 설계하여 1965년 지어진 용산동 군인아파트의 전경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층 주택가의 중간에 우뚝 선 두 건물군은 ‘브로드에이커’와 ‘빛나는 도시’가 다른 모양과 색깔의 옷을 입고 그 위용을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 건물이 세워지는 과정, 현실적 여건, 정치이데올로기 등을 연구한 바 없지만 사회적 평등, 자유, 건축과 자연과 같은 가치관과 철학이 건축이라는 하드웨어로 전환되어 다른 사회로 이식되면서 얼마나 왜곡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건축지를 통하여 물밀 듯 들어오는 건축 이미지들로부터 우리들은 과연 그 이면의 과정과 가치를 논의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데리다, 라캉, 료따르의 사유가 우리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조혜정이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츄미의 라빌레뜨공원에서 렘 쿨하스의 섬득이는 내부공간에서 우리는 서구의 현대도시가 직면한 위기와 실험을 읽고자 하는 인내를 가지고 있는가? 소비문화는 이러한 인내를 한물가고 따분한 것으로 치부하게 한다. 소비문화는 백화점 매장이나 텔레비젼의 오락프로그램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점을 가득 메우는 서적, 학술지, 잡지들이 양산해내는 담론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건축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건축개념이나 이론이 미처 우리도시를 배경으로 한 담론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다른 것에 의해 묻혀버리고 만다. 이상건축이 기획한 ”20세기의 건축: 성찰과 반성“의 한 부분으로 실린 이 글을 쓰면서 ”20세기의 건축“이라는 문구가 가지는 함정을 먼저 생각했다. 나는 1999년과 2000년을 가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1999년 12월 이전에 금세기의 건축을 정리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2000년 1월이 되면서 정리된 것을 문서고나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으로 느껴진다. 기록, 성찰, 반성을 위한 작업이 자칫 지속적 담론이 필요한 곳에 작위적 금을 긋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건축지, 강연회, 워크샵에 등장하는 무수한 언어와 개념이 진부해져서 건축가가 더 이상 주눅이 들지 않는 상황이 올 때 비로소 건강한 담론이 시작될 수 있는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담론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축가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 자신이 속한 건축과 도시환경의 밑바닥까지 발을 담그고, 관찰하고, 이론을 검증하고, 해석하는 연구자와 학자가 주류를 이루는 곳이 건강한 건축계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엄격함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중간지대, 회색지대에 선 건축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건축계의 담론은 우리 것이 되고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김성홍)
이상건축, 9910, pp.146-149.
건축에 ‘문화’라는 단어가 붙는 시대, ‘제도사’, ‘설계사’란 이름 대신 건축가라고 불러주는 시대, 건축가의 일대기가 대중매체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고, 해외초청 건축가의 강연회를 가득 메우는 젊은 건축도의 열정, 각종 건축공모전과 워크샵의 열기, 미달 없는 117개의 4년제 대학 건축학과, 99개의 2년제 대학 건축학과, 건축의 최대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를 누리던 건축잡지가 재정악화로 폐간되는 상황에서도 십 여개가 넘는 건축잡지를 유지해오는 사회. 적어도 한국건축계는 가시적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경제위기로 건축설계시장이 극도로 좁아진 상황의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처럼 기이한 현상은 건축이 수요 공급의 경제논리에 위축되지 않고 자생적 시장을 형성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시장이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은 구체적 건축물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넓은 범위의 건축행위를 포함해 나가고 있다. 비평, 논의, 토론, 혹은 담론이라고 일컬어지는 행위와 그 결과물인 글이다. 90년대 이전 건축계의 질문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지을 것인가?”로 귀결되었다면 이제 “짓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왜 지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으로 확장되고 있다. 담론의 주체는 ‘창조자’나 ‘창조자’의 작품에 주석을 달아주는 ‘보조자’에 국한되지 않고 제3의 행위자로 열려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제3의 행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조혜정은 “글읽기와 삶읽기”에서 지식인을 이론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좋은 사회란 어떤 면에서 그 사회의 지식인이 만들어 내는 이론이 현실을 보다 잘 보게 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현실과 유리된 이론으로 먹고사는 지식인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인 것이다. ...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회, 자신의 사회를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어가지 못하는 사회를 식민지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p.22)." 조혜정의 글은 우리사회를 보는 이론을 외부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자기성찰의 목소리이지만 이것은 비단 인문과학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사회 현상을 하드웨어, 지식인의 이론을 소프트웨어에 비유한다면 인문과학의 식민지성은 제3의 문화로 이식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가 분리될 수밖에 없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인문과학은 사회현상이라는 하드웨어를 가져오지 않는다. 반면 건축역사, 이론, 비평은 소프트웨어를 다른 문화로부터 가져오지만 이는 사회현상을 읽는 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건축기술, 유형, 규범, 원리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문과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건축에서의 식민지성은 지식인의 식민지성을 떠나 물리적 환경의 식민지성으로 보다 쉽게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한국 건축계에 잠복하는 식민지성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싶다. 제1의 식민지성은 비트루비우스, 알베르티, 로지에, 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 이론, 서구 현대건축가의 방법론, 서구철학과 미학이론이 한국건축역사와 이론을 오랫동안 변방으로 밀어내었던 ‘상황의 식민지성’이다. 제2의 식민지성은 우리의 도시와 건축에 스며들어 고착된 타 문화이데올로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읽지도 못하는 ‘인식의 식민지성’이다. 두 가지 식민지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지만 태도와 가치관은 매우 다르다고 본다. 나는 조혜정의 글이 궁극적으로 식민지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에서 출발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삶을 읽어내는 자생적 틀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식민지성은 한국사회만이 처한 문제도 아니며 주체적 글읽기와 삶읽기에 관한 노력 역시 우리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 한국의 사회상황을 보는 자생적 이론을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1990년 한국사회를 서구로부터 구별되게 도려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만 온전히 속해 있고 유지되는 현상을 밝혀내는 작업이 그 사회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물리환경, 인문환경은 지역과 문화가 만들어내는 특수성을 넘나드는 보편성을 가진다. 이론의 역할과 힘은 이러한 특수성에 잠재된 보편성을 찾아내고 이를 담론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점에서 서구의 건축역사와 이론을 탐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필요한 작업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의 목적과 방법론에 있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론을 기성품처럼 포장해서 들여온 다음 현실을 투사하는 안경으로 간주하는 행위와, 빌려온 사유의 틀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자기발견적 장치로 사용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전자의 관심은 현상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론 자체에 있기 때문에 추론이 앞서는 사유의 방법을 택한다. 현상이 바뀌어도 새로운 이론이 수입되기 전에는 그 틀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이점 때문에 제1의 식민지성은 끊임없이 다른 이론을 수입하면서 그 당위성을 유지하려 든다. 반면 이론을 자기 발견적 장치로 삼는 것은 이론이 지니는 보편성을 검증하고 확인하면서 궁극적으로 현실을 읽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론은 논증 가능한 관점이며 인간은 관점 없이는 사물을 볼 수는 있어도 읽을 수는 없다. 이론이 축적되지 않은 우리현실에서 백지상태로부터 현실을 읽어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글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독해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한국건축계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힘은 건축시장의 활황도 제도적 인센티브도 아닌 건축인의 자발적 동기이다. 과거와 달리 한국의 토양 밖에서 교육과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함이 여기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때문에 순수하게 우리 것이 무엇인가를 던지는 질문 자체가 모호한 것이다. 나는 서구의 건축이론을 더 많이 가져오면 올수록 담론이 오히려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론이 한국의 건축환경 안으로 용해되는 한 제1의 식민지성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문제는 이론을 가져오기 위해 포장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다양한 현상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내기 위해 이론은 단순화되고 추상화되는 속성을 지닌다. 이를 받아들일 때 이론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구체적 사실, 과정, 도시문화와 같은 특수성은 생략되고 포장된 이론을 다른 속에서 펼쳐질 때 그 본질이 왜곡되는 것이다. 한국 건축계의 담론에 떠도는 무수한 이론들이 용해되기 전에 사라지고 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아방가르드와 도시건축적 담론
1960년대에 시작되어 오랫동안 화두가 되었던 전통논쟁이 내실 있는 논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유 중에는 서구의 건축작품, 건축이론을 받아들였던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한국 건축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꼬르뷰지에, 라이트 등의 거장의 건축은 19세기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형태, 양식을 제시하였지만 형태주의에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건축이 사회, 문화, 경제가 만들어낸 총체적 산물의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들의 관심은 건축을 넘어 도시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이들이 꿈꾸었던 도시를 다소 장황하지만 서술하여 본다.
1920년대 말 라이트는 19세기 도시와는 다른 새로운 도시 브로드에이커를 구상한다. 말 그대로 넓은 땅의 도시였다. 19세기 중엽 대도시의 문제는 유럽과 미국이 처한 공통된 문제였다. 런던의 인구는 90만에서 450만으로, 빠리는 50만에서 250만으로, 베를린은 19만에서 200만으로, 뉴욕은 6만에서 340만으로, 시카고는 조그만 마을에서 19세기말에는 170만으로 인구가 급격히 팽창된다. 도시는 더 이상 건강한 유기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라이트에게 밀집된 도시는 악의 상징이었고 악을 조장하는 것은 임대(rent)라고 보았다. 첫째는 땅의 임대, 둘째는 돈의 임대, 셋째는 사고의 임대였다. 라이트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방법으로 이상적 커뮤니티를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 모든 사람은 도시지옥을 벗어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브로드에이커는 임대가 없는 인구 3만의 도시로 모든 사람은 1에이커의 땅을 소유한다. 사람들은 특정 직업으로 분류되지 않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겸한다. 그들은 농부이자 기술자이자 지식인이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 정신 노동의 구분, 일과 휴식의 구분이 없는 곳, 즉 현대인의 일상이 분해되는 것을 복원하는 곳이 브로드에이커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동차였다. 자동차의 대수는 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족 수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가주택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한 주택에 사는 노동자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파트타임으로 타인에게 노동을 제공하더라도 그는 경제적으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어떠한 경제적, 사회적, 물리적 외압으로부터 가족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 집인 것이다. 집과 땅, 주위가 맺는 관계는 가족과 그들의 일터, 휴식공간과 맺는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대지를 따라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라이트의 건축은 브로드에이커에 구상한 집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935년 유럽대륙의 건축거장 건축가 꼬르뷰지에는 ‘현대도시’에 이어 ‘빛나는 도시’를 구상한다. 라이트가 계획가가 만든 도시환경이 사회 병리현상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꼬르뷰지에는 이러한 자연적 경제질서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사회는 피라미드로서 그 구조의 가장 밑에는 노동자, 화이트칼라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최상층에는 엘리트들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를 대체하는 이러한 피라미드 사회를 염두에 둔 것은 인간의 권력은 생산구조에 대한 책임과 비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사회의 질서와 이름다움은 구성원의 완벽한 협동의 결과이므로 그 구성원은 자유를 얻는다. ‘현대도시’에서 중심을 엘리트, 주변을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한 반면 ‘빛나는 도시’에서는 더 이상 계층의 구분이 없다. ‘빛나는 도시’ 중심에 서있는 유니떼라고 불리는 고층 아파트에서는 1914년 그가 구상한 도미노이론이 구체화된다. 유니떼는 노동자의 지위에 따라 배정되지 않고 가족 수와 요구에 따라 배정된다. 그가 생각하는 가족개념도 라이트와 달랐다. 남성은 일터로 여성은 가사를 책임지는 브로드에이커와 달리 남성과 여성은 똑 같이 일하고 육아에서부터 가정의 허드렛일을 사회가 책임지는 도시였다. 라이트의 도시에서 노동과 여가가 하나라면 꼬르뷰지에의 도시에서 분리된다. 가정은 경제단위의 의미를 상실하고 여가의 공간으로 남는 것이다. 아침에 부부는 일터를 향해 자녀들은 학교와 탁아소로 각자 향한다. 점심시간에 그들은 수영장, 체육관 혹은 카페에서 잠시 해후한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이미 청소와 빨래가 되어 있고 아침에 주문된 음식이 배달된다. 가족이 빨래, 청소, 요리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원을 가꾸는 것처럼 여가활동이 된다.
두 사람이 계획하였던 도시를 유토피아라고 역사가들은 부른다. 사회변혁을 전제로 했던 두 도시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다. 그들은 계층의 불균형을 비판하고 인간다운 삶을 역설했지만 정작 당시의 맑시스트 사회운동이나 전문 도시계획가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미스,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건축가들이 디자인과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현실적 접근을 취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라이트나 꼬르뷰지에와 달리 이상적 도시를 계획하지 않았다. ‘빛나는 도시’와 ‘브로드에이커’는 현실에 발을 담그지 않은 거장들의 주관과 상상에 철저히 의존한 것이다. 생각과 실천의 문제가 그들의 일생을 통하여 제기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였던 이상도시의 숨은 목적은 도시의 건설이 아니었다. 건축이론, 건축원리가 갖는 우월성을 도시라는 거대한 필지에다 그려 보였던 것이다.
‘빛나는 도시’와 ‘브로드에이커’는 그림과 글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비록 보습을 달리하고 있지만 북미와 유럽의 도시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고 생산, 재생산, 변형, 이식의 과정을 거쳐서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도시의 근저에 이미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꼬르뷰지에와 라이트에게 건축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형태미학과 공간개념은 건축의 자율적 영역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와 맺는 가치는 도시라는 더 큰 틀 속에서 파악될 때
뚜렷해지는 것이다. 전원교외에 사는 미국인에게 라이트 주택의 의미는 굳이 설명 할 필요도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고, 빠리의 교외에 세워진 사보이 주택이 왜 혁명적이었는지는 밀집된 빠리에 사는 사람들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미노이론과 대지를 향해 뻗어나가는 라이트의 프레리 주택은 건축사와 건축이론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뒤에 숨어있는 문화, 사회, 가치관 등은 왜 타자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건축계에서 잠재된 소비문화
나는 한국건축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건축과 도시의 분리현상이 생산적 담론을 가로 막아왔던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 김수근과 김중업이 해외에서 습득한 이론과 경험을 실험했던 하나의 사례를 들고자 한다. 최근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바래진 두 장의 흑백사진이 그것이다. 김수근이 설계하여 1964년 개관된 자유센터와 김중업이 설계하여 1965년 지어진 용산동 군인아파트의 전경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저층 주택가의 중간에 우뚝 선 두 건물군은 ‘브로드에이커’와 ‘빛나는 도시’가 다른 모양과 색깔의 옷을 입고 그 위용을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 건물이 세워지는 과정, 현실적 여건, 정치이데올로기 등을 연구한 바 없지만 사회적 평등, 자유, 건축과 자연과 같은 가치관과 철학이 건축이라는 하드웨어로 전환되어 다른 사회로 이식되면서 얼마나 왜곡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건축지를 통하여 물밀 듯 들어오는 건축 이미지들로부터 우리들은 과연 그 이면의 과정과 가치를 논의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데리다, 라캉, 료따르의 사유가 우리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조혜정이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츄미의 라빌레뜨공원에서 렘 쿨하스의 섬득이는 내부공간에서 우리는 서구의 현대도시가 직면한 위기와 실험을 읽고자 하는 인내를 가지고 있는가? 소비문화는 이러한 인내를 한물가고 따분한 것으로 치부하게 한다. 소비문화는 백화점 매장이나 텔레비젼의 오락프로그램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점을 가득 메우는 서적, 학술지, 잡지들이 양산해내는 담론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건축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건축개념이나 이론이 미처 우리도시를 배경으로 한 담론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다른 것에 의해 묻혀버리고 만다. 이상건축이 기획한 ”20세기의 건축: 성찰과 반성“의 한 부분으로 실린 이 글을 쓰면서 ”20세기의 건축“이라는 문구가 가지는 함정을 먼저 생각했다. 나는 1999년과 2000년을 가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1999년 12월 이전에 금세기의 건축을 정리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2000년 1월이 되면서 정리된 것을 문서고나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으로 느껴진다. 기록, 성찰, 반성을 위한 작업이 자칫 지속적 담론이 필요한 곳에 작위적 금을 긋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건축지, 강연회, 워크샵에 등장하는 무수한 언어와 개념이 진부해져서 건축가가 더 이상 주눅이 들지 않는 상황이 올 때 비로소 건강한 담론이 시작될 수 있는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담론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축가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 자신이 속한 건축과 도시환경의 밑바닥까지 발을 담그고, 관찰하고, 이론을 검증하고, 해석하는 연구자와 학자가 주류를 이루는 곳이 건강한 건축계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엄격함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중간지대, 회색지대에 선 건축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건축계의 담론은 우리 것이 되고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김성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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