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시대의 建築家像
서울건축사신문 논단
1993년 영화 “외설한 제의 (Indecent Proposal)"에서 건축가 우디 해럴슨은 백만 달러의 돈 때문에 아내 데미무어를 갑부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하룻밤 빌려주는 제의를 받아들인다. 이 영화에서 우디 해럴슨은 90년대 이전 미국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건축가像과 사뭇 다른 점을 보여준다. 건축가는 흔히 시간과 돈이 많아서 염문을 뿌리는 주인공이나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에고이스트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건축가 모습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건축가들의 현실은 영화 ”외설한 제의“에서처럼 명예와 부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건축교육과 실무를 연구한 로버트 거트만교수에 의하면 직원 20명 이내의 건축설계사무소가 전체의 93%를 차지하고 있어 구조적으로 영세할 뿐만 아니라 설계사무소에서 제공하는 지식과 기술이 의술, 법률처럼 대중이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건축가의 영역은 엔지니어, 인테리어 디자이너, 시공기술자 및 매니저, 재료전문가, 부동산 개발업자 등에 의해서 잠식되고 공유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건축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두 가지의 상반된 전문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첫째는 특정영역의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는 기술전문화이다. 둘째는 다른 영역이 잠식할 수 없는 ”건축의 예술성“을 극대화하는 디자인전문화이다. 건축가의 능력과 의지를 넘어서는 경제, 사회적 문제가 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전문화를 향한 건축가의 자율적 모색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명제이다. 건축설계시장의 경쟁은 점차 국제화되어 가는 반면 한국의 건축시장은 점차 줄어들 전망이기 때문이다. 1992년 한국의 건설시장 규모는 국민총생산량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같은 해 미국은 약 7%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의 건설시장이 상대적으로 비대했음을 알 수 있다. 설계사무소가 한때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우리의 특이한 건설시장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우리경제의 모습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과거와 같은 개발주도형 건설산업이 한계점에 이를 것이라는 것은 선진국의 예를 들어 짐작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파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설계사무소의 앞날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건축가가 어떤 종류의 파이를 먹을 것인지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 필요해 지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스케치를 하고 디테일을 그리는 경력 이십년 건축사의 모습은 우리 건축계에서는 이질적인 광경이다. 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치스러운 모습, 위상에 걸맞지 않는 모습 정도로 인식된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러한 비생산적인 모습이 무한경쟁시대에서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인지 모른다. ‘건축사’가 반드시 ‘건축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디자인하는 건축가가 설 수 없는 설계사무소는 미래가 없는 조직이다. 이런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건축사자격=독립’의 궁극적 목표만이 남고 건축가의 早老현상은 계속된다. 우리보다 더 냉혹한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은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은 이십여년 이상 책상에 앉아 고뇌하고, 그리고,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화려함과 탄탄함 뒤에는 영화 “외설한 제의”에서의 우디 해럴슨 같은 이름없는 건축도가 있다는 사실을 있어서는 안된다.
글/ 김성홍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서울건축사신문 논단
1993년 영화 “외설한 제의 (Indecent Proposal)"에서 건축가 우디 해럴슨은 백만 달러의 돈 때문에 아내 데미무어를 갑부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하룻밤 빌려주는 제의를 받아들인다. 이 영화에서 우디 해럴슨은 90년대 이전 미국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건축가像과 사뭇 다른 점을 보여준다. 건축가는 흔히 시간과 돈이 많아서 염문을 뿌리는 주인공이나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에고이스트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건축가 모습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건축가들의 현실은 영화 ”외설한 제의“에서처럼 명예와 부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건축교육과 실무를 연구한 로버트 거트만교수에 의하면 직원 20명 이내의 건축설계사무소가 전체의 93%를 차지하고 있어 구조적으로 영세할 뿐만 아니라 설계사무소에서 제공하는 지식과 기술이 의술, 법률처럼 대중이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건축가의 영역은 엔지니어, 인테리어 디자이너, 시공기술자 및 매니저, 재료전문가, 부동산 개발업자 등에 의해서 잠식되고 공유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건축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두 가지의 상반된 전문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첫째는 특정영역의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는 기술전문화이다. 둘째는 다른 영역이 잠식할 수 없는 ”건축의 예술성“을 극대화하는 디자인전문화이다. 건축가의 능력과 의지를 넘어서는 경제, 사회적 문제가 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전문화를 향한 건축가의 자율적 모색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명제이다. 건축설계시장의 경쟁은 점차 국제화되어 가는 반면 한국의 건축시장은 점차 줄어들 전망이기 때문이다. 1992년 한국의 건설시장 규모는 국민총생산량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같은 해 미국은 약 7%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의 건설시장이 상대적으로 비대했음을 알 수 있다. 설계사무소가 한때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우리의 특이한 건설시장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우리경제의 모습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과거와 같은 개발주도형 건설산업이 한계점에 이를 것이라는 것은 선진국의 예를 들어 짐작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파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설계사무소의 앞날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건축가가 어떤 종류의 파이를 먹을 것인지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 필요해 지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스케치를 하고 디테일을 그리는 경력 이십년 건축사의 모습은 우리 건축계에서는 이질적인 광경이다. 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치스러운 모습, 위상에 걸맞지 않는 모습 정도로 인식된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러한 비생산적인 모습이 무한경쟁시대에서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인지 모른다. ‘건축사’가 반드시 ‘건축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디자인하는 건축가가 설 수 없는 설계사무소는 미래가 없는 조직이다. 이런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건축사자격=독립’의 궁극적 목표만이 남고 건축가의 早老현상은 계속된다. 우리보다 더 냉혹한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은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은 이십여년 이상 책상에 앉아 고뇌하고, 그리고,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화려함과 탄탄함 뒤에는 영화 “외설한 제의”에서의 우디 해럴슨 같은 이름없는 건축도가 있다는 사실을 있어서는 안된다.
글/ 김성홍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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