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의 춤: 로댕 갤러리 글래스 파빌리온
Choreography on Taepyungro: Rodin Gallery - Glass Pavilion
백년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347년 8월 3일 계속된 영국군의 공격 앞에 프랑스의 항구도시 깔레는 무릎을 꿇는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시민 지도자 여섯 명에게 밧줄을 목에 메고 맨발로 깔레의 열쇠를 바치게 명령한다. 항복의 공포와 굴욕에 잠겨있는 군중을 헤치고 이들은 시장에서 출발하여 영국군 진지를 향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죽음의 공포보다는 앞으로 견뎌내야 할 고난 때문에 우스따쉬 드 쌩 삐에르(Eustache de Saint-Pierre)는 머리를 숙이고 눈을 반쯤 감은 채 걷는다. 그의 왼쪽에 열쇠를 잡은 쟝 데르(Jean d'Aire)는 영국왕 앞에서 당할 굴욕을 생각하며 몸이 굳는다. 절망감에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진 앙드리외 당드레(Andrieus d'Andres)가 그를 따른다. 그의 오른쪽에 순교를 달갑게 받기를 결심한 쟈끄 드 비쌍(Jacques de Wissant)이 성급히 걷고 있고, 그의 동생 삐에르(Pierre)는 끔찍한 악몽을 내쫓는 몸짓을 한다. 이들 중 가장 젊은 예한 드 피엔느(Jehan de Fiennes)가 바삐 앞사람을 따른다. 깔레의 항복 후 500여 년이 지난 1895년 오귀스트 로댕에 의해서 재현된 조각 ‘깔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의 모습이다.
최근 남대문과 태평로가 만나는 곳에 ‘깔레의 시민’과 로댕의 다른 조각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을 영구히 전시할 로댕갤러리가 개관되었다. 삼성생명빌딩 1층 전면에 증축된 세 개의 동(棟)으로 구성된 갤러리에서 건축적 관심을 끄는 것은 유리벽으로 에워싸인 글래스 파빌리온이다. 서로 다는 각도로 기울어진 이중 반투명 유리벽은 모체인 삼성생명과 대조되는 공간구성과 건축어휘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댕갤러리에 대한 관심은 건축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태평로빌딩, 삼성본관, 삼성생명으로 이어지는 외피와 지하상업공간 개보수의 정점을 이루고 있어 도시에 대한 건축가와 대기업 삼성의 의도가 집약된 곳이기 때문이다. 로댕갤러리는 1998년 3월에 완성되었지만 글래스 파빌리온의 주인이 될 “지옥의 문‘이 제 자리에 놓여 개관된 것은 지난 5월 12일이다. 건축이라는 그릇이 만들어 졌지만 그 속에 담길 내용인 조각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축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건축가에게 가장 매력있는 대상은 단연 주택과 미술관일 것이다. 주택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일상의 삶을 담아내고, 미술관은 그 사회의 문화의 잣대가 되지만 그 보다도 건축가는 여기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건축실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각은 그림과 달리 관조적인 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삼차원의 시각예술이다. 멀리서 가까이 에서 혹은 그 주위를 맴돌면서 조각은 체험되고 심지어 촉각에 호소하기도 한다. 로댕의 두 대표작을 한 지붕 아래에 놓기 위해 두 작품이 지닌 팽팽한 흡인력과 인장력, 이에 다가갈 사람들의 상반된 움직임을 머릿속에서 그리면서 건축을 시작한다는 것이 건축가에게 얼마나 매력있는 작업일까? 더구나 로댕의 조각품만을 위해 한 국가의 간판기업이 쏟아 부은 막대한 돈과 의지는 건축가에게는 살이 떨리는 희열이자 부담이었을 것이다. 설계사무소 역사상 최단기간 내에 최고의 사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작품성 부재”라는 비평을 의식해야만 하는 KPF(Kohn Pedersen Fox)로서는 로댕갤러리는 고층건물과 맞바꿀 수도 있는 호기였을 것이다.
로댕은 여섯 명의 깔레의 시민 행렬을 나선형으로 구성한다. 주인공을 피라미드의 정점에 두고 나머지를 그 밑에 앉히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로댕은 전체 윤곽을 정육면체에서부터 출발한다. 주인공은 있지만 그 역시 나선형의 궤적에 선 한사람에 불과하다. ’깔레의 시민‘을 에워싼 현대의 군중인 우리들 역시 지치고 절망한 얼굴표정, 손동작, 몸짓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천천히 때로는 빨리 그 주위를 맴돌아야 한다. 그것도 몇 바퀴씩. ’깔레의 시민‘ 저편에 서있는 ‘지옥의 문‘은 사뭇 다르다. 깔레의 항복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였다면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Inferno)이라는 가공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전자가 실물보다 큰 환조인 반면 후자는 200여명의 군상이 모여있는 부조이다. 전자의 주인공들이 고통이 패배의 굴욕 때문이라면 후자는 육욕과 탐욕에 대한 죄악 때문이다. 현재 ’깔레의 시민‘은 글래스 파빌리온의 중앙에 ‘지옥의 문‘은 가장자리에 앉혀져 있어 두 작품의 구심성과 전면성을 설득력있게 건축공간화하고 있다. 지옥의 문 앞에 설치된 마름모꼴의 석회석의자의 방향도 세심하다. 그러나 건축가의 직관적인 생각이 두 작품을 처음부터 제자리를 놓이게 한 것은 아니다.
건축주 삼성문화재단은 두 손을 형상화한 로댕의 작품 ‘성당(The Cathedral, 1908)'에서 글래스 파빌리온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깔레의 항복자나 지옥의 문에 걸터앉아 있는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처럼 근육이 넘쳐나는 남성적인 손이 아니라 부드럽게 포개어진 여성스러운 손이다. 로댕이 의미하는 ‘성당’은 외피가 지니는 힘찬 외형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앙을 대신하는 조용하고 충만한 공간이다. 그러나 KPF의 케빈 케논(Kevin Kennon)은 디자인 의도를 다르게 설명한다. 그는 우선 ‘성당’의 두 손을 로댕의 작품 중 가장 진부한 조각으로 일축한다. 남자무용수는 가운데 서고 여자무용수가 그의 주위를 도는 전통발레의 동작 빠드드(pas-de-deux)에서 착상을 얻었다는 것이다. 다른 각도와 높이로 서 있는 두 유리벽은 중심성과 회전성을 각기 포용한다는 것이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설명에는 흥미로운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건축형태가 내포하거나 지칭하는 어떤 대상을 설정하는 유추(Analogy)를 전제로 하고 있다. 대리석과 유리로 매끈하게 포장된 모체에 붙어 있는 파격적인 형태에 의미를 부여해야하는 것은, 기업의 이미지를 극대화 해야하는 건축주나, 자신의 건축어휘에 논리를 세워야 하는 건축가 모두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케논이 눈앞에서 춤을 추다가 이내 사라지는 남녀무용수의 궤적을 그렸다면, 건축주는 건축가가 만들어낸 비정형의 유리관(館)을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로댕의 손을 택했다는 추론을 해본다. 건축가는 형태의 출처를 논리화하기 위해, 건축주는 결과물을 논리화하기 위해 각기 다른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자가 건축가의 ‘사전동기(事前動機: Priori)'라면 후자는 건축주의 ’사후절충(事後折衷: Posteriori)'인 것이다. 손의 모양을 구체적 상(像)을 구체적 형태로 변환한다는 것은 설계의도를 그 만큼 대중에게 쉽고 명백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육과 피부에서 시작해서 유리벽이 도출되었으니 ’인용‘이 선행되고 ‘변형’이 다음인 것이다. 반면 발레의 유추는 극장이 갖는 구체적 건축적 특징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글래스 파빌리온이 지니는 극적(劇的) 요소는 무대장치나 객석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 발레리나의 추상적 공간관계에 있다. 즉 ‘구성’이 먼저이고 ‘정제(精製)’가 다음인 것이다. 전자 건축의 표피적 형태에 바탕을 둔 직유(Simile)라면 후자는 추상적 공간성에 바탕을 둔 은유(Metaphor)이다.
손의 직유는 발레의 몸동작보다 대중에게 강하고 직설적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로댕의 ‘성당”은 이미 고착화된 고유명사이다.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는 불특정 발레리나의 움직임은 아직 일반명사다. 비영속적 발레행위를 영속적 실체로 바꾸는 것은 대중에게는 쉽지 않는 작업이다. 성당의 직유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전파될 수 있지만 발레의 은유는 관찰자의 자율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성당의 직유는 상업화된 아이콘을 전제로 하고, 발레의 은유는 이미지의 단편적 복제를 거부한다.
그러나 ‘사전동기'와 ’사후절충'에 대한 논쟁이 보다 당위성을 얻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논리적 작업과정이 드러나야 한다. 고층오피스, 호텔, 대형상점건축 등을 주로 다루어온 KPF의 설계과정은 작품성을 추구하는 아틀리에 건축가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건축가의 직관은 집합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절충될 수밖에 없고, 이 점이 바로 높은 생산성과 기술적 정확성을 추구하는 대형조직의 속성이다. 1987년에 발간된 KPF의 작품집에는 건축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어떠한 시각적 매체도 찾을 수 없다. 흑백으로 정교하게 그려낸 배치도나 평면도 같은 표현도면(Presentation Drawing)과 사진이 전부이다.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거쳤던 무수한 자기발견적 장치(Heuristic Device)인 스케치나 모형이 이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매끈하게 다듬어진 결과물이다. 이점에서 1988년 KPF에 합류하여 파트너로 성장한 케빈 케논의 글래스 파빌리온은 예외이다. KPF가 보내온 단면도와 평면도 스케치는 초기의 것인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유기적 곡선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시공도면으로 옮겨진 평면은 달라진다. ’깔레의 시민‘을 감싸는 바깥쪽 유리벽은 네 개의 원의 중심으로부터, ‘지옥의 문‘을 품은 안쪽의 유리벽은 세 개의 원의 중심으로부터 그려진 기하학적 호와 직선으로 치환된다. 곡면으로 계획되었던 유리벽도 기술적, 경제적 문제로 평판유리로 대체된다. 발레의 주인공이 춤을 추었을 법한 어둡지만 현란했을 것 같은 실내는 반투명한 유리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미니멀리스트의 공간으로 바뀐 셈이다.
글래스 파빌리온의 모티브가 무용수인지 손인지를 그리고 이것이 사전동기였는지 사후절충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밝히는 것처럼 공허한 논쟁일지도 모른다. 건축가 케논이 주장하는 무용수의 유추조차도 논리적 절충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안내책자에 실린 두 손의 유추는 건축물에 옷을 하나 더 입혀 보고자 하는 시도 이상이 아닐지 모른다. 올림픽 주경기장의 모양을 전통 도자기에서, 월드컵 주경기장의 지붕을 돛대에서 따 왔느니 하는 주장과 반론이 본질을 가리는 부차적 이름 붙이기에 불과한 것처럼. 목적과 대상이 다를지는 모르나 요즈음 건축계에서도 “무슨 무슨 당,” “무슨 무슨 재”하는 식의 이름 붙이기를 흔히 볼 수 있다. 글래스 파빌리온이 한국의 건축계에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발레의 동작이나 인간의 신체부위로부터 건축실험을 시작하는 자유로움이나 신선함은 결코 아니다. 그 보다는 자본을 가진 삼성문화재단과 건축주의 전폭적인 지원과 기술과 경험의 양 날개를 단 KPF가 삼성전자제품처럼 건축완제품을 뽑아낼 수 있다는 데 있다. 설계자 KPF를 제외하면 구조담당은 영국의 오브 애럽社(Ove Arup) 유리제작과 시공은 독일의 가르너社(Garner), 판유리는 불란서의 생-고뱅社(Saint-Gobain), 독일의 베글라社(Vegla), 유리가공은 오스트리아의 에켈트사(Eckelt Glas)등 유럽의 회사가 참여했다. 바닥재는 불란서 석회석을 사용했다. 지구를 펼친 몰바이데도법처럼 곡면 벽을 사다리꼴의 조합으로 변형한 KPF의 입면전개도와 기울어진 유리벽 사이를 정교하게 고정시키는 시공상의 기술 등은 불행하게도 한국의 다른 설계사무소나 엔지니어링 회사가 할 수 없는 고난도의 작업이다. 더구나 이러한 값비싼 작업을 후원할 대기업은 그리 흔하지 않다. 삼성문화재단과 KPF 파트너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현대화된 유럽 귀족문화 이미지이다. 로댕의 조각은 입셍로랑이나 샤넬과 달리 대중이 소유할 수 없는, 삼성이 말하는 이른바 ‘명품’이다. 본사의 건물 앞에 현판을 걸거나 큼지막한 돌에 회사의 이름이나 로고를 새기는 70, 80년대식 기업홍보는 입셍로랑 상표가 가슴에 달린 옷을 과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보다 전세계에 몇 개밖에 없다는 태평로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기업총수의 거실을 슬쩍 보여주는 전략과 같은 것이다.
’깔레의 시민‘과 ‘지옥의 문‘을 의뢰한 것은 프랑스 정부였다. 1871년 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를 침입한 독일은 빌헬름 1세의 황제즉위식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거행한다. 그후 프랑스의 조각은 쇠퇴하는 애국주의를 선동해야하는 부담을 안게된다. 공화정 시대의 깔레 역시 500여년 전의 치욕적 사건을 기념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었다. 로댕이 11년간에 걸쳐서 만들어낸 ’깔레의 시민‘은 음악과 춤, 행진과 연회 속에서 제막되었다. 조각이 놓여질 자리는 당연히 일상의 삶에 가까이 있어야 하는 깔레의 리슐리외 광장(Place Richelieu)이었다. 로댕이 죽을 때까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지옥의 문‘ 역시 파리장식미술관(Musee des Arts Decoratifs) 입구의 청동문으로 쓰여질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 프랑스의 조각은 애국주의 고취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공공광장과 묘지뿐만 아니라 귀족계급의 집에 있는 조각은 그들의 지위와 부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로댕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복제에 대한규정을 작성하여 사후 제작을 인정하였다. 삼성이 소유한 ’깔레의 시민‘은 12번째 복제품이다. ‘지옥의 문‘에 걸터앉거나 붙어있는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입맞춤(The Kiss)' '세 망령(The Three Shades)' 등도 독립된 조각으로 만들었다. 로댕의 청동조각은 분해, 반복, 재조합 등의 방법을 통하여 처음부터 복제의 길이 열려있었고, 그것은 후세에 공공영역을 넘어 개인의 소유를 가능하게 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딜레땅뜨(dilettante)의 주축인 안방마님 군단들에게 ‘고급문화’란 것이 결국 복제된 예술품의 소유로 귀결된다는 것이 로댕갤러리에서 나타난다. 문화의 생산보다도 그들에게는 이미 생산된 문화의 재생산과 관리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깔레정부와 갖은 의지를 갖고 있다면 기업의 이미지를 고양하면서도, 한국건축가에게 외국의 건축가와 동동한 실험의 기회만이라도 줄 수는 없었을까?
로댕의 조각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분명 애국심의 환기는 아니다. 일상의 혼잡함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조각가와 장인의 정신과 손으로 빗어진 인간 내면의 고통과 절망을 통하여 예술과 인간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로댕갤러리가 서울시민에게 주는 것은 이러한 침잠의 순간을 허락하는 공적 공간일 것이다. 이점에서 삼성생명에서 알을 낳은 듯 떨어져 나와 어느 데모대가 점령할 수도 있는 태평로거리에 명품을 감히 전시하고, 미관지구 후퇴선 안의 사유지와 보도 사이의 턱을 없앤 건축주의 의도는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태평로 거리를 바라보면서 나란히 서 있는 삼성소유의 태평로빌딩, 삼성본관, 삼성생명 세 건물 전면과 지하공간을 하나로 묶는 계획은 민간주체 도시설계의 혁신적 시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층의 미술관과 지하의 상업공간을 연결하여 문화와 쇼핑을 하나로 묶는 시도도 소비문화에 편승하는 대기업의 상술로 굳이 폄하할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민간이 소유한 땅을 공공공간으로 할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공공기관이 가지고 있었던 땅마저 잘라서 민간에게 파는 정부가 어떤 논리적 바탕에서 공공장소를 민간기업으로부터 얻어낼 것인가?
왕실이나 정부소유의 땅을 시민공원이나 녹지로 사수하는 유럽이나 호주의 도시 모델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정치 경제적 이유가 있다면, 남아있는 대안은 사유화된 소비공간을 길과 연계시키는 1970년대 후반의 미국 대도시의 도심살리기 모델 정도일 것이다. 쇼핑몰, 호텔로비, 운동경기장이 공공장소인지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미국에서 뜨거워진다. 반대론자 생각은 이렇다. 공공장소의 최저요건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있고 계층의 차별이 없는 곳이다. 거지의 출입을 막거나 반정부 구호를 외치거나 띠를 두르는 행동을 제지하는 쇼핑몰이나 호텔로비는 사유화된 가짜 공공장소라는 것이다. 찬성론자 입장은 이렇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공장소에서 개인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총성이 울리는 밤의 공원은 아무리 정치적 자유가 허락한다고 해도 공공장소로서의 역할을 위협받는다. 개인이 안전을 책임질 사회적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길에다 유리지붕을 덮고 감시카메라를 달아서 이용자의 안전과 쾌적함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것을 이용하는 개인은 소비를 통해서 응당 그 사용료를 내야한다는 것이다. 반대론자의 입장에서 삼성의 태평로 리노베이션은 문화를 가장한 소비공간의 활성화일 것이고 찬성론자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도시정책을 따라가는 서울에서 민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비평의 초점은 이곳이 공공장소인지 아닌지를 갑론을박하는 것보다는 보다 구체적인 설계의도와 결과물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세 건물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금속기둥을 설치하는 KPF의 안은 저층부의 이미지를 하나로 통일하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포스트모던 이미지와 상충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태평로빌딩의 설계자를 설득하는 과정이 어려웠다는 것이 케논의 설명이다. 그러나 3.3 미터 간격의 열주는 둔중한 장식이나 근엄한 대기업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기는 하였지만 또 다른 포스트모던 아이콘으로 보인다. 삼성본관 로비에 바짝 붙은 열주 안쪽은 보행자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다. 삼성생명 앞으로 이어진 스테인레스 기둥은 날렵한 지붕을 부분적으로 달고 있지만 햇볕이나 비를 피하는 우산이나 양산의 역할도 하지 않고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없는 장승같은 비공간적 장치이다. 200여 미터에 이르는 장방형 단면의 금속기둥의 진짜 역할은 밤의 태평로에서 삼성을 밝히는 등(燈)의 역할일 것이다. 태평로는 차도의 폭만 35 미터가 넘는 길이다. 점심식사 후 한가하게 앉아서 쉬기에는 쉴 사이 없는 자동차의 움직임이나 소음이 버겁다. 이 곳의 숨은 공공장소는 태평로빌딩과 삼성본관 때문에 잘리어진 구불구불한 뒤편 골목길과 삼성본관 뒤 주차장 위에 올라앉은 조그만 옥외공원이다. 말끔히 단장된 전면이 한가한 점심시간, 뒷골목과 옥외공원은 점심을 끝낸 화이트칼라 부대로 붐빈다. KPF는 이곳 옥외공원까지 스테인레스 기둥을 세우려고 했지만 보다 평범한 조경을 원하는 삼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다행스런 일이다. 거창한 환경심리 연구를 하지 않더라도 먹거리와 일상의 삶이 보다 확연하게 전개되는 뒤편이 정연하게 치장된 앞과 다르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태평로는 일제강점 후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희궁 앞을 지나 숭례문과 곧바로 연결된 한국판 오스만(Haussmann)거리이다. 그 끝에 고도처럼 서있는 600년 역사의 국보1호 숭례문, 그 옆에 한국의 건축가, 일본의 건축가, 미국의 건축가에게 설계되어 나란히 서 있는 한국의 간판 대기업 삼성의 심장부, 유럽대륙에서 수입된 최고의 근대조각가 로댕의 대표작, 미국과 유럽의 디자인과 기술로 집약되는 유리관, 그 뒤편에서 질펀하게 펼쳐지는 일상... 이것은 분명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정의하는 시공간압축의 현장이다.
이 글은 프로젝트를 담당하였던 KPF의 케빈 케논과의 전화인터뷰와 전자메일교환, 삼성회장비서실의 이영범 전무와의 대담, 삼성문화재단이 제공한 안내책자와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을 참조하였다.
김성홍: 한양대학교와 버클리대에서 건축설계를 배웠고, 조지아공대에서 건축은유와 소비공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에 재직중이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Choreography on Taepyungro: Rodin Gallery - Glass Pavilion
백년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347년 8월 3일 계속된 영국군의 공격 앞에 프랑스의 항구도시 깔레는 무릎을 꿇는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시민 지도자 여섯 명에게 밧줄을 목에 메고 맨발로 깔레의 열쇠를 바치게 명령한다. 항복의 공포와 굴욕에 잠겨있는 군중을 헤치고 이들은 시장에서 출발하여 영국군 진지를 향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죽음의 공포보다는 앞으로 견뎌내야 할 고난 때문에 우스따쉬 드 쌩 삐에르(Eustache de Saint-Pierre)는 머리를 숙이고 눈을 반쯤 감은 채 걷는다. 그의 왼쪽에 열쇠를 잡은 쟝 데르(Jean d'Aire)는 영국왕 앞에서 당할 굴욕을 생각하며 몸이 굳는다. 절망감에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진 앙드리외 당드레(Andrieus d'Andres)가 그를 따른다. 그의 오른쪽에 순교를 달갑게 받기를 결심한 쟈끄 드 비쌍(Jacques de Wissant)이 성급히 걷고 있고, 그의 동생 삐에르(Pierre)는 끔찍한 악몽을 내쫓는 몸짓을 한다. 이들 중 가장 젊은 예한 드 피엔느(Jehan de Fiennes)가 바삐 앞사람을 따른다. 깔레의 항복 후 500여 년이 지난 1895년 오귀스트 로댕에 의해서 재현된 조각 ‘깔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의 모습이다.
최근 남대문과 태평로가 만나는 곳에 ‘깔레의 시민’과 로댕의 다른 조각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을 영구히 전시할 로댕갤러리가 개관되었다. 삼성생명빌딩 1층 전면에 증축된 세 개의 동(棟)으로 구성된 갤러리에서 건축적 관심을 끄는 것은 유리벽으로 에워싸인 글래스 파빌리온이다. 서로 다는 각도로 기울어진 이중 반투명 유리벽은 모체인 삼성생명과 대조되는 공간구성과 건축어휘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댕갤러리에 대한 관심은 건축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태평로빌딩, 삼성본관, 삼성생명으로 이어지는 외피와 지하상업공간 개보수의 정점을 이루고 있어 도시에 대한 건축가와 대기업 삼성의 의도가 집약된 곳이기 때문이다. 로댕갤러리는 1998년 3월에 완성되었지만 글래스 파빌리온의 주인이 될 “지옥의 문‘이 제 자리에 놓여 개관된 것은 지난 5월 12일이다. 건축이라는 그릇이 만들어 졌지만 그 속에 담길 내용인 조각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축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건축가에게 가장 매력있는 대상은 단연 주택과 미술관일 것이다. 주택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일상의 삶을 담아내고, 미술관은 그 사회의 문화의 잣대가 되지만 그 보다도 건축가는 여기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건축실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각은 그림과 달리 관조적인 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삼차원의 시각예술이다. 멀리서 가까이 에서 혹은 그 주위를 맴돌면서 조각은 체험되고 심지어 촉각에 호소하기도 한다. 로댕의 두 대표작을 한 지붕 아래에 놓기 위해 두 작품이 지닌 팽팽한 흡인력과 인장력, 이에 다가갈 사람들의 상반된 움직임을 머릿속에서 그리면서 건축을 시작한다는 것이 건축가에게 얼마나 매력있는 작업일까? 더구나 로댕의 조각품만을 위해 한 국가의 간판기업이 쏟아 부은 막대한 돈과 의지는 건축가에게는 살이 떨리는 희열이자 부담이었을 것이다. 설계사무소 역사상 최단기간 내에 최고의 사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작품성 부재”라는 비평을 의식해야만 하는 KPF(Kohn Pedersen Fox)로서는 로댕갤러리는 고층건물과 맞바꿀 수도 있는 호기였을 것이다.
로댕은 여섯 명의 깔레의 시민 행렬을 나선형으로 구성한다. 주인공을 피라미드의 정점에 두고 나머지를 그 밑에 앉히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로댕은 전체 윤곽을 정육면체에서부터 출발한다. 주인공은 있지만 그 역시 나선형의 궤적에 선 한사람에 불과하다. ’깔레의 시민‘을 에워싼 현대의 군중인 우리들 역시 지치고 절망한 얼굴표정, 손동작, 몸짓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천천히 때로는 빨리 그 주위를 맴돌아야 한다. 그것도 몇 바퀴씩. ’깔레의 시민‘ 저편에 서있는 ‘지옥의 문‘은 사뭇 다르다. 깔레의 항복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였다면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Inferno)이라는 가공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전자가 실물보다 큰 환조인 반면 후자는 200여명의 군상이 모여있는 부조이다. 전자의 주인공들이 고통이 패배의 굴욕 때문이라면 후자는 육욕과 탐욕에 대한 죄악 때문이다. 현재 ’깔레의 시민‘은 글래스 파빌리온의 중앙에 ‘지옥의 문‘은 가장자리에 앉혀져 있어 두 작품의 구심성과 전면성을 설득력있게 건축공간화하고 있다. 지옥의 문 앞에 설치된 마름모꼴의 석회석의자의 방향도 세심하다. 그러나 건축가의 직관적인 생각이 두 작품을 처음부터 제자리를 놓이게 한 것은 아니다.
건축주 삼성문화재단은 두 손을 형상화한 로댕의 작품 ‘성당(The Cathedral, 1908)'에서 글래스 파빌리온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깔레의 항복자나 지옥의 문에 걸터앉아 있는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처럼 근육이 넘쳐나는 남성적인 손이 아니라 부드럽게 포개어진 여성스러운 손이다. 로댕이 의미하는 ‘성당’은 외피가 지니는 힘찬 외형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앙을 대신하는 조용하고 충만한 공간이다. 그러나 KPF의 케빈 케논(Kevin Kennon)은 디자인 의도를 다르게 설명한다. 그는 우선 ‘성당’의 두 손을 로댕의 작품 중 가장 진부한 조각으로 일축한다. 남자무용수는 가운데 서고 여자무용수가 그의 주위를 도는 전통발레의 동작 빠드드(pas-de-deux)에서 착상을 얻었다는 것이다. 다른 각도와 높이로 서 있는 두 유리벽은 중심성과 회전성을 각기 포용한다는 것이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설명에는 흥미로운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건축형태가 내포하거나 지칭하는 어떤 대상을 설정하는 유추(Analogy)를 전제로 하고 있다. 대리석과 유리로 매끈하게 포장된 모체에 붙어 있는 파격적인 형태에 의미를 부여해야하는 것은, 기업의 이미지를 극대화 해야하는 건축주나, 자신의 건축어휘에 논리를 세워야 하는 건축가 모두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케논이 눈앞에서 춤을 추다가 이내 사라지는 남녀무용수의 궤적을 그렸다면, 건축주는 건축가가 만들어낸 비정형의 유리관(館)을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로댕의 손을 택했다는 추론을 해본다. 건축가는 형태의 출처를 논리화하기 위해, 건축주는 결과물을 논리화하기 위해 각기 다른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자가 건축가의 ‘사전동기(事前動機: Priori)'라면 후자는 건축주의 ’사후절충(事後折衷: Posteriori)'인 것이다. 손의 모양을 구체적 상(像)을 구체적 형태로 변환한다는 것은 설계의도를 그 만큼 대중에게 쉽고 명백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육과 피부에서 시작해서 유리벽이 도출되었으니 ’인용‘이 선행되고 ‘변형’이 다음인 것이다. 반면 발레의 유추는 극장이 갖는 구체적 건축적 특징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글래스 파빌리온이 지니는 극적(劇的) 요소는 무대장치나 객석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 발레리나의 추상적 공간관계에 있다. 즉 ‘구성’이 먼저이고 ‘정제(精製)’가 다음인 것이다. 전자 건축의 표피적 형태에 바탕을 둔 직유(Simile)라면 후자는 추상적 공간성에 바탕을 둔 은유(Metaphor)이다.
손의 직유는 발레의 몸동작보다 대중에게 강하고 직설적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로댕의 ‘성당”은 이미 고착화된 고유명사이다.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는 불특정 발레리나의 움직임은 아직 일반명사다. 비영속적 발레행위를 영속적 실체로 바꾸는 것은 대중에게는 쉽지 않는 작업이다. 성당의 직유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전파될 수 있지만 발레의 은유는 관찰자의 자율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성당의 직유는 상업화된 아이콘을 전제로 하고, 발레의 은유는 이미지의 단편적 복제를 거부한다.
그러나 ‘사전동기'와 ’사후절충'에 대한 논쟁이 보다 당위성을 얻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논리적 작업과정이 드러나야 한다. 고층오피스, 호텔, 대형상점건축 등을 주로 다루어온 KPF의 설계과정은 작품성을 추구하는 아틀리에 건축가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건축가의 직관은 집합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절충될 수밖에 없고, 이 점이 바로 높은 생산성과 기술적 정확성을 추구하는 대형조직의 속성이다. 1987년에 발간된 KPF의 작품집에는 건축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어떠한 시각적 매체도 찾을 수 없다. 흑백으로 정교하게 그려낸 배치도나 평면도 같은 표현도면(Presentation Drawing)과 사진이 전부이다.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거쳤던 무수한 자기발견적 장치(Heuristic Device)인 스케치나 모형이 이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매끈하게 다듬어진 결과물이다. 이점에서 1988년 KPF에 합류하여 파트너로 성장한 케빈 케논의 글래스 파빌리온은 예외이다. KPF가 보내온 단면도와 평면도 스케치는 초기의 것인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유기적 곡선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시공도면으로 옮겨진 평면은 달라진다. ’깔레의 시민‘을 감싸는 바깥쪽 유리벽은 네 개의 원의 중심으로부터, ‘지옥의 문‘을 품은 안쪽의 유리벽은 세 개의 원의 중심으로부터 그려진 기하학적 호와 직선으로 치환된다. 곡면으로 계획되었던 유리벽도 기술적, 경제적 문제로 평판유리로 대체된다. 발레의 주인공이 춤을 추었을 법한 어둡지만 현란했을 것 같은 실내는 반투명한 유리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미니멀리스트의 공간으로 바뀐 셈이다.
글래스 파빌리온의 모티브가 무용수인지 손인지를 그리고 이것이 사전동기였는지 사후절충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밝히는 것처럼 공허한 논쟁일지도 모른다. 건축가 케논이 주장하는 무용수의 유추조차도 논리적 절충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안내책자에 실린 두 손의 유추는 건축물에 옷을 하나 더 입혀 보고자 하는 시도 이상이 아닐지 모른다. 올림픽 주경기장의 모양을 전통 도자기에서, 월드컵 주경기장의 지붕을 돛대에서 따 왔느니 하는 주장과 반론이 본질을 가리는 부차적 이름 붙이기에 불과한 것처럼. 목적과 대상이 다를지는 모르나 요즈음 건축계에서도 “무슨 무슨 당,” “무슨 무슨 재”하는 식의 이름 붙이기를 흔히 볼 수 있다. 글래스 파빌리온이 한국의 건축계에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발레의 동작이나 인간의 신체부위로부터 건축실험을 시작하는 자유로움이나 신선함은 결코 아니다. 그 보다는 자본을 가진 삼성문화재단과 건축주의 전폭적인 지원과 기술과 경험의 양 날개를 단 KPF가 삼성전자제품처럼 건축완제품을 뽑아낼 수 있다는 데 있다. 설계자 KPF를 제외하면 구조담당은 영국의 오브 애럽社(Ove Arup) 유리제작과 시공은 독일의 가르너社(Garner), 판유리는 불란서의 생-고뱅社(Saint-Gobain), 독일의 베글라社(Vegla), 유리가공은 오스트리아의 에켈트사(Eckelt Glas)등 유럽의 회사가 참여했다. 바닥재는 불란서 석회석을 사용했다. 지구를 펼친 몰바이데도법처럼 곡면 벽을 사다리꼴의 조합으로 변형한 KPF의 입면전개도와 기울어진 유리벽 사이를 정교하게 고정시키는 시공상의 기술 등은 불행하게도 한국의 다른 설계사무소나 엔지니어링 회사가 할 수 없는 고난도의 작업이다. 더구나 이러한 값비싼 작업을 후원할 대기업은 그리 흔하지 않다. 삼성문화재단과 KPF 파트너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현대화된 유럽 귀족문화 이미지이다. 로댕의 조각은 입셍로랑이나 샤넬과 달리 대중이 소유할 수 없는, 삼성이 말하는 이른바 ‘명품’이다. 본사의 건물 앞에 현판을 걸거나 큼지막한 돌에 회사의 이름이나 로고를 새기는 70, 80년대식 기업홍보는 입셍로랑 상표가 가슴에 달린 옷을 과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보다 전세계에 몇 개밖에 없다는 태평로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기업총수의 거실을 슬쩍 보여주는 전략과 같은 것이다.
’깔레의 시민‘과 ‘지옥의 문‘을 의뢰한 것은 프랑스 정부였다. 1871년 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를 침입한 독일은 빌헬름 1세의 황제즉위식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거행한다. 그후 프랑스의 조각은 쇠퇴하는 애국주의를 선동해야하는 부담을 안게된다. 공화정 시대의 깔레 역시 500여년 전의 치욕적 사건을 기념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었다. 로댕이 11년간에 걸쳐서 만들어낸 ’깔레의 시민‘은 음악과 춤, 행진과 연회 속에서 제막되었다. 조각이 놓여질 자리는 당연히 일상의 삶에 가까이 있어야 하는 깔레의 리슐리외 광장(Place Richelieu)이었다. 로댕이 죽을 때까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지옥의 문‘ 역시 파리장식미술관(Musee des Arts Decoratifs) 입구의 청동문으로 쓰여질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 프랑스의 조각은 애국주의 고취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공공광장과 묘지뿐만 아니라 귀족계급의 집에 있는 조각은 그들의 지위와 부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로댕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복제에 대한규정을 작성하여 사후 제작을 인정하였다. 삼성이 소유한 ’깔레의 시민‘은 12번째 복제품이다. ‘지옥의 문‘에 걸터앉거나 붙어있는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 '입맞춤(The Kiss)' '세 망령(The Three Shades)' 등도 독립된 조각으로 만들었다. 로댕의 청동조각은 분해, 반복, 재조합 등의 방법을 통하여 처음부터 복제의 길이 열려있었고, 그것은 후세에 공공영역을 넘어 개인의 소유를 가능하게 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딜레땅뜨(dilettante)의 주축인 안방마님 군단들에게 ‘고급문화’란 것이 결국 복제된 예술품의 소유로 귀결된다는 것이 로댕갤러리에서 나타난다. 문화의 생산보다도 그들에게는 이미 생산된 문화의 재생산과 관리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깔레정부와 갖은 의지를 갖고 있다면 기업의 이미지를 고양하면서도, 한국건축가에게 외국의 건축가와 동동한 실험의 기회만이라도 줄 수는 없었을까?
로댕의 조각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분명 애국심의 환기는 아니다. 일상의 혼잡함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조각가와 장인의 정신과 손으로 빗어진 인간 내면의 고통과 절망을 통하여 예술과 인간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로댕갤러리가 서울시민에게 주는 것은 이러한 침잠의 순간을 허락하는 공적 공간일 것이다. 이점에서 삼성생명에서 알을 낳은 듯 떨어져 나와 어느 데모대가 점령할 수도 있는 태평로거리에 명품을 감히 전시하고, 미관지구 후퇴선 안의 사유지와 보도 사이의 턱을 없앤 건축주의 의도는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태평로 거리를 바라보면서 나란히 서 있는 삼성소유의 태평로빌딩, 삼성본관, 삼성생명 세 건물 전면과 지하공간을 하나로 묶는 계획은 민간주체 도시설계의 혁신적 시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층의 미술관과 지하의 상업공간을 연결하여 문화와 쇼핑을 하나로 묶는 시도도 소비문화에 편승하는 대기업의 상술로 굳이 폄하할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민간이 소유한 땅을 공공공간으로 할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공공기관이 가지고 있었던 땅마저 잘라서 민간에게 파는 정부가 어떤 논리적 바탕에서 공공장소를 민간기업으로부터 얻어낼 것인가?
왕실이나 정부소유의 땅을 시민공원이나 녹지로 사수하는 유럽이나 호주의 도시 모델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정치 경제적 이유가 있다면, 남아있는 대안은 사유화된 소비공간을 길과 연계시키는 1970년대 후반의 미국 대도시의 도심살리기 모델 정도일 것이다. 쇼핑몰, 호텔로비, 운동경기장이 공공장소인지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미국에서 뜨거워진다. 반대론자 생각은 이렇다. 공공장소의 최저요건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있고 계층의 차별이 없는 곳이다. 거지의 출입을 막거나 반정부 구호를 외치거나 띠를 두르는 행동을 제지하는 쇼핑몰이나 호텔로비는 사유화된 가짜 공공장소라는 것이다. 찬성론자 입장은 이렇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공장소에서 개인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총성이 울리는 밤의 공원은 아무리 정치적 자유가 허락한다고 해도 공공장소로서의 역할을 위협받는다. 개인이 안전을 책임질 사회적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길에다 유리지붕을 덮고 감시카메라를 달아서 이용자의 안전과 쾌적함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것을 이용하는 개인은 소비를 통해서 응당 그 사용료를 내야한다는 것이다. 반대론자의 입장에서 삼성의 태평로 리노베이션은 문화를 가장한 소비공간의 활성화일 것이고 찬성론자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도시정책을 따라가는 서울에서 민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비평의 초점은 이곳이 공공장소인지 아닌지를 갑론을박하는 것보다는 보다 구체적인 설계의도와 결과물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세 건물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금속기둥을 설치하는 KPF의 안은 저층부의 이미지를 하나로 통일하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포스트모던 이미지와 상충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태평로빌딩의 설계자를 설득하는 과정이 어려웠다는 것이 케논의 설명이다. 그러나 3.3 미터 간격의 열주는 둔중한 장식이나 근엄한 대기업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기는 하였지만 또 다른 포스트모던 아이콘으로 보인다. 삼성본관 로비에 바짝 붙은 열주 안쪽은 보행자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다. 삼성생명 앞으로 이어진 스테인레스 기둥은 날렵한 지붕을 부분적으로 달고 있지만 햇볕이나 비를 피하는 우산이나 양산의 역할도 하지 않고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없는 장승같은 비공간적 장치이다. 200여 미터에 이르는 장방형 단면의 금속기둥의 진짜 역할은 밤의 태평로에서 삼성을 밝히는 등(燈)의 역할일 것이다. 태평로는 차도의 폭만 35 미터가 넘는 길이다. 점심식사 후 한가하게 앉아서 쉬기에는 쉴 사이 없는 자동차의 움직임이나 소음이 버겁다. 이 곳의 숨은 공공장소는 태평로빌딩과 삼성본관 때문에 잘리어진 구불구불한 뒤편 골목길과 삼성본관 뒤 주차장 위에 올라앉은 조그만 옥외공원이다. 말끔히 단장된 전면이 한가한 점심시간, 뒷골목과 옥외공원은 점심을 끝낸 화이트칼라 부대로 붐빈다. KPF는 이곳 옥외공원까지 스테인레스 기둥을 세우려고 했지만 보다 평범한 조경을 원하는 삼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다행스런 일이다. 거창한 환경심리 연구를 하지 않더라도 먹거리와 일상의 삶이 보다 확연하게 전개되는 뒤편이 정연하게 치장된 앞과 다르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태평로는 일제강점 후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희궁 앞을 지나 숭례문과 곧바로 연결된 한국판 오스만(Haussmann)거리이다. 그 끝에 고도처럼 서있는 600년 역사의 국보1호 숭례문, 그 옆에 한국의 건축가, 일본의 건축가, 미국의 건축가에게 설계되어 나란히 서 있는 한국의 간판 대기업 삼성의 심장부, 유럽대륙에서 수입된 최고의 근대조각가 로댕의 대표작, 미국과 유럽의 디자인과 기술로 집약되는 유리관, 그 뒤편에서 질펀하게 펼쳐지는 일상... 이것은 분명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정의하는 시공간압축의 현장이다.
이 글은 프로젝트를 담당하였던 KPF의 케빈 케논과의 전화인터뷰와 전자메일교환, 삼성회장비서실의 이영범 전무와의 대담, 삼성문화재단이 제공한 안내책자와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을 참조하였다.
김성홍: 한양대학교와 버클리대에서 건축설계를 배웠고, 조지아공대에서 건축은유와 소비공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에 재직중이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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