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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동숭동의 도시조직과 문화읽기 (1998.10)

동숭동의 도시조직과 문화읽기
대한건축학회지 98년 10월호 기고

동숭동과 문화

‘문화의 거리’, ‘문화공간’ 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 다니는 동숭동은 여러 차례 他 건축지에 ‘대학로’란 題下로 다루어진바 있다. 동숭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왜 ‘문화’라는 무형의 개념과 ‘거리 혹은 공간’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연계시켜야만 하는 것일까? 이번 비평특집은 도시와 문화라는 범주에서 동숭동의 건축을 이해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목욕문화’, ‘행락문화’, ‘예약문화’ 등 우리사회가 만들어낸 무수한 ‘문화의 各論’에 비추어 볼 때 ‘문화의 거리’라는 고착화된 문구에서 ‘문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영어권에서 사용된 ‘문화(culture)’ 라는 어휘의 역사를 추적한 레이몬드 윌리암스는 18세기에 ‘문화’는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무엇의 문화’ 식으로 사용되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어떤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지적 그리고 삶의 방식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왔다고 쓰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목욕문화’, ‘행락문화’, ‘예약문화’는 동시대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현재 영어권에서는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문화’ 그 자체인 것이다.

‘대학로’라는 명칭과 이 지역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한마디로 동숭동은 현대 한국사회의 지적인 고향이자 고급문화(High Culture)의 보루로 남고 싶은 것이다. 이곳에는 일제시대에는 경성제대가  해방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가 들어섰고, 70년대 후반에는 강북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장과 전시장이 들어선다. 수많은 지사, 문인,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아 한국의 지성과 예술을 논한다. 그러나 1985년 서울시가 이곳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하면서 역설적으로 ‘대학로’가 고수하고자 하는 ‘고급문화’를 더 이상 지킬 수 없게된다. 붉은 벽돌의 문예회관 이나 샘터사옥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카페와 식당에 압도되어 빛을 잃어 간다. 이곳의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태블로이드판 신문에는 미국의 MTV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 실려있다. 보드리야르가 비판한 모조환경(simulacrum)의 한국판이다.

동숭동의 도시조직

그러나 동숭동은 성급한 문화비평에 앞서서 구체적인 관찰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도시, 건축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동숭동의 지도를 보면 다양한 도시조직이 확연하다. 첫째는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국립공업시험원이 자리잡고 있는 동숭동의 남단조직으로 이화동의 사대부속중학교와 사대부속초등학교와 함께 사면이 도로에 둘러싸져 있는 지역이다. 일제가  지배하면서부터 지어진 일련의 건물群은 길과의 관계보다 독자적인 질서를 따르고 있다. 둘째는 동숭동을 동서로 이분할 때 동쪽에 해당하는 밀집된 주거지역으로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규칙한 도시조직이다. 셋째는 동숭동의 동단, 즉 낙산의 서편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시민 아파트 지역으로 건물의 부실과 슬럼화로 철거될 예정이다. 넷째는 통상 동숭동의 거리로 지칭되는 북서측 지역이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이전하면서 이 지역은 100평 정도의 고급주택지로 100필지 남짓 분할되어 팔려나간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이 지역은 급속한 지가의 상승으로 주택가로서 더 이상 남지 못하고 급속히 상업화 되어간다. 도시설계에 참여하였던 양윤재 교수는 동숭동은 기존의 간선도로변 도시설계와는 구별되는 街區중심의 도시설계가 최초로 적용된 사례라고 기술하고 있다.

강북에는 동숭동 이외에도 종로, 명동, 신촌, 이태원 등의 상업지역이 있지만 동숭동과는 다른 도시조직을 지니고 있다. 종로는 한국 도시조직의 典型이다. 현재 종로의 가로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중규모 건물은 몇 겹의 불규칙한 주택가를 감싸는 울타리 성격을 지닌다. 점진적인 도시화 과정을 겪었던 유럽의 도시나 계획된 북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도시조직이다. 1층을 상업공간, 지상층을 주거공간으로 결합한 유럽이나 북미의 수직적 주상복합에 비하여 종로는 전면을 상업, 배면의 여러 겹을 주택으로 수평화한 住商並置 조직을 600년 이상 지녀왔던 것이다. 종로변 필지 모양은 불규칙 하지만 전면의 폭이 깊이보다 상대적으로 긴 형태를 띄고 있어서 지상층의 실을 최대한 전면도로에 면하게 하는 장점을 가진다. 종로의 앞과 뒤는 그래서 명확히 구별된다. 조선시대에 전면이 왕조나 사대부가 지닌 권위를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상징화했다면 피맛골 같은 종로의 배면은 하층민의 일상이 펼쳐졌던 곳이다. 근대화 이후 건축물은 파괴되고 변모했지만 이러한 도시조직의 흔적은 다행히 남아 있다.

그러나 조형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건축가에게 종로는 별로 매력을 끌지 못할 것이다. 좌우측면은 인접건물과 합벽되어 건축가가 조형의지를 구사할 수 있는 곳은 전면과 배면뿐이다. 그나마 전면은 무수한 간판에 금방 묻혀버리고 만다. 배면은 기껏해야 비상계단이나 부출입구 정도를 내는 것에 그칠 것이다. 넓은 폭과 깊이가 없는 대지는 내부공간분화를 제한한다. 그러나 건축가의 의지와 관계없이 종로에는 신축 자체의 기회가 드물다. 필지가 대형화하지 않는 이상 종로는 건물의 외피를 바꾸거나 내부를 수리하는 실내건축가의 몫이 될 것이다. 이점은 명동, 신촌, 이태원에도 적용된다.

한국 현대건축의 실험장

동숭동이 80년대 중반이후 강북 소비문화의 집결지로 떠오르는 것은 순수건축을 표방하는 건축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곳이 한국 현대건축의 실험장에 적합한 도시조직으로 변화되어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75년 당시 필지의 크기와 건축법의 적용은 건축물의 새로운 배치를 가능하게 한다. 남북축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100평 정도의 장방형 필지는 주택을 북측에, 마당을 남측에 놓는 배치형태를 만들어 낸다. 자연히 진입은 동측 혹은 서측으로 결정된다. 필지의 모양이나 주택의 내부평면은 기존의 도시조직이나 전통주택과 달라졌지만 向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취향은 그대로 남아 특이한 건축물의 배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도심의 고급주택지로서 건축가에게는 매력있는 실험의 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태생부터 인구 천만이 넘은 서울에서 단독 주택지로는 적합하지 않는 도시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동숭동은 도로 폭이 10M를 넘지 않는 서울 최초의 보행자 중심의 격자형 계획街區이다. 문예회관, 미술회관 등의 기존 공연전시 시설과 연계되어 걷기에 적당한 보행자 망을 형성하게 된다.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면서 보행자 망으로서의 성격은 폭발적인 가속이 붙는다. 자연히 지가가 상승하고 주택지로서의 매력은 떨어진다. 땅과 집을 팔아 더 쾌적한 곳으로 이사하고자 하는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의 누구에나 적용될 것이다. 더구나 文藝의 역사와 흔적을 느끼고자 이곳의 노른자 땅을 불하 받았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이곳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하루하루 부대끼고 살아갈 이웃이 구태여 필요 없는 장안의 명망가들일 것이다.

80년대 이후 동숭동에 새로이 세워지거나 주택에서 개조된 복합상업건축물은 기존의 필지를 유지하거나 합필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향이 주택의 배치를 결정했다면 길은 상업시설의 공간구성을 지배하는 요소다. 주택의 남측마당이 카페나 식당의 야외공간으로 바뀌고 주택의 측면이었던 곳이 얼굴로 바뀐다. 도로와의 관계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합필되고, 관통통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건축물의 깊이가 전면의 폭보다 큰 細長型 평면이 나타난다. 도로와는 독립적으로 지상층의 공간분화와 간판이 붙지 않는 외피의 표현도 가능해진다. 종로에 얼굴만 있는 건축물이 병렬해 있다면 동숭동에는 여러 면의 얼굴을 가진 건축물이 가능해 졌음을 뜻한다. 80년 이후 한국 현대 건축가들이 그 이전에는 주목을 끌지 못했던 소, 중형 규모 상업시설을 통하여 자신의 조형언어를 실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도시조직에 힘입은 것이었다.

70년대 중반의 동숭동 남쪽의 공연전시시설이 官주도 내지는 건축가의 의지로 이루어 졌다면 80년대 후반의 동숭동 북쪽의 상업화의 주역은 민간이다. 그들에게 ‘문화’는 정부에서 하달된 지침 같은 것도 아니고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이나 조각품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이익이 남지 않는 장사는 아무리 ‘문화적’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자본주의의 특성은 고급문화의 잣대로 보면 분명 천민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낙산을 가로막는 흉물스런 아파트와 다닥다닥 붙어있는 서민주택가의 앞에 유독 높은 담으로 쳐져있는 100평 이상의 고급주택지와 국적을 알 수 없는 카페와 식당 중 어떤 것이 더욱 천민자본주의의 표본일까?

소비문화와 도시공간

‘문화의 거리’에서 ‘소비의 거리’로의 변화는 건축법이나 행정지도로 막을 수 없고, 문인, 예술가, 건축가의 비판으로는 고쳐질 수 없는 사회, 경제적 법칙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칙은 동숭동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공간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남부순환도로라는 바다에 섬처럼 고립된 예술의 전당이나, 전철과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서도 코끼리 열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자동차에 소외된 젊은이에게는 먼 곳의 이야기이다. 젊은이들은 걷고 싶고, 걸으면서 일상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동숭동의 거리는 그 자체로도 공연장이며 전시장이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보다 그 시대의 문화를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관객이자 스스로 배우가 되는 것이다.

동숭동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동시에 흡수하여 만들어 낸 한국판 탈근대주의의 단면이다. 레이몬드 윌리암스가 기술한 문화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동숭동은 문화의 거리에서 퇴행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문화’의 범주가 다양해지고 광범위해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곳을 찾는 10대들에겐 미술회관에서 산수화를 감상하고 국적불명의 식당에서 파스타나 피자를 먹는 것에 아무런 문화적 갈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파스타나 피자는 산수화 때문에 존재가 가능하고, 산수화는 파스타나 피자 때문에 대중에게 더 다가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축형태나 공간에 담겨진 문화의 차별성 역시 모호해져 가는 지금 건축가에게는 윤리적 선택보다는 방법의 논리성이 절실해진다. 80년대 이후 이미 건축가들은 ‘소비공간’에 대한 타부를 깨트리고 다양한 실험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건축의 차별성을 표피적 樣式이나 재료의 물성에 국한시키는 설계나 비평관점이야말로 ‘전체성의 파괴’와 ‘파괴된 이미지들의 재결합’이라는 소비문화의 경향에 一助를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건축학계의 논의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혹은 ‘한국성과 외래문화’ 식의 거친 이분법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건축과 도시의 관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동숭동은 이미 일제강점부터 조선시대와는 다른 도시조직을 경험하기 시작하여 70년대 후반 서구의 도시조직을 부분적이나 이식 받아 왔다. 지금도 동숭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비공간의 변화는 광고나 잡지에서 보이는 이미지보다 냉혹한 사회, 경제적 법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일상의 문화는 이 곳이 지닌 학문과 고급예술의 전당으로서의 역사와 함께 역동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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