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문화와 자동차, 일산신도시의 대형할인점
Consumer Culture and Automobile: Hypermarkets in Ilsan New Town
대한건축학회지 98년 11월호 기고
새로운 소비공간과 소비행태
1996년 일산신도시에는 전세계 판매체인 6위인 프랑스의 까르푸와 네델란드의 마크로가 하이퍼마켓(hypermarket) 혹은 할인점(discount store)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까르푸는 개장 한 달만에 국내 경쟁업체를 능가하는 수익을 올린다. 까르푸는 2000년까지 20개 이상의 매장을 개장하려고 계획하고 있고, 전세계 판매체인 1위 월마트에 매각된 마크로 역시 10여 개 이상의 매장을 계획하고 있다. 최근 외국계 할인점과 국내 할인점과의 경쟁 때문에 소매점이 점차 사라진다는 신문보도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경제위기상황이후 외국계 자문회사들은 해외유통업계의 한국진출이 원활하도록 제도와 법령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정부에 간접적 압력을 가하고 있고, 올해 정부는 자연녹지지역에 대형할인점 건축을 허가하기에 이른다.
까르푸와 마크로의 등장은 지금까지 잠재되었던 한국 중산층의 새로운 소비행태에 대한 갈망이 신도시 건설과 함께 가시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인파와 매연에 시달리면서 도심의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소비자들은 이제 값싼 제품, 다양한 상품, 넓은 매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더구나 외국계 할인매장이 폭발적 매력을 끄는 것은 자동차위주의 쇼핑행태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까르푸와 마크로는 주차 1대당 매장면적이 국내할인점이나 백화점보다 낮을 뿐 아니라 주차방식에서 기존의 상업건축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일산까르푸는 지하1층, 지상7층의 건물로 지하1층, 지상5, 6, 7층에 고객주차장을 배치하고 지상2, 3, 4층에 매장을 두고 있다. 마크로는 지하 1층, 지상3층 건물로 지하1층, 지상1층을 매장, 지상2, 3층을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즉 주차장 위에 매장을 배치하는 기존의 백화점과는 반대로 매장 위에 주차장을 설치하는 수직공간분할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주차로를 설치할 수 있을 정도의 기준층 면적이 확보되어야 하고 주차장에서 적정거리 이내에 매장을 배치해야하는 제한을 갖게되므로 기준층 면적은 크고, 건축물의 높이는 낮게되는 형태를 띄게 된다.
건축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최대의 공간을 확보하는 기존 상업건축 개발방식과 비교하면 까르푸와 마크로의 건축계획은 가히 혁신적이다. 넓은 매장과 진입의 용이함과 대조적으로, 까르푸의 건축비용은 국내 백화점의 절반정도로 조사되고 있다. 건축법보다 지가, 건축비용, 구매력 등을 바탕으로 타당성조사가 이루어지고, 건축물은 이러한 합리적 분석과 공간전략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대형할인점의 공간전략은 건축물의 내부계획에 국한되지 않고 도시라는 더 광범위한 조직과 관련을 맺는다. 북미의 유통업계에는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입지(location)이고, 둘째도 입지(location)이고, 셋째도 입지(location)이다” 라는 것이다. 이점은 전세계의 어느 도시에나 공통되는 사항일 것이다. 서울 도심의 대형백화점은 사람들이 발길이 잦은 지하철역 주변 소위 ‘역세권’에 위치하고 있고, 이점은 신도시에도 공통된다. 까르푸의 입지는 이러한 한국의 ‘역세권 공간전략’에 위배된다. 까르푸의 위치는 일산신도시의 중앙을 관통하는 지하철노선에서 벗어난 곳이고, 주위는 중심상업지역으로 계획되었지만 아직은 잡초만 무성한 미개발지역이다. 까르푸는 보행자를 잠재적인 고객에서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의 접근성이 중요한 것이다.
자동차에 대한 환상
까르푸를 포함한 외국계 할인점은 이제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을 위협하는 새로운 판매건축의 전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수입된 건축형태가 도시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건축학계에서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통업자의 입장에서 할인점이 들어선다는 것이 거대상권이 변화되는 것이라면 공공의 입장에서 대형할인점의 등장은 건축과 도시공간의 변화를 의미한다.
신도시에 우뚝 선 대형 할인점은 북미 도시외곽에 섬처럼 고립된 쇼핑몰에 비유할 수 있다. 밀집된 도심을 피해 교외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미국의 중산층에겐 도시환경을 보상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공간을 필요로 하게된다. 1956년 비엔나 출신 건축가 그루엔(Victor Gruen)이 미니애폴리스 근교에 세운 최초의 쇼핑몰은 급속도로 북미전역으로 확산되고 쇼핑몰은 구체적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에서 집합적인 상업건축을 지칭하는 일반명사화로 굳어진다. 그러나 외부공간과 시각적, 물리적으로 차단된 쇼핑몰의 내부공간은 가로가 지닌 경제, 사회, 문화적 기능을 저하시키고, 쇼핑몰을 에워싸는 거대한 옥외주차장은 도시의 연속성을 파괴한다는 비평을 받아왔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개발비용의 증가, 교외상권의 포화, 환경단체의 반대 등으로 쇼핑몰의 교외팽창은 둔화되고 반면 도심재개발을 장려하는 지방정부와 연방정부의 정책에 힘입어 쇼핑몰은 도심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북미의 경우 이미 쇼핑몰의 개발은 경제, 환경문제가 결부된 범도시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미의 쇼핑몰이 자동차와 郊外(suburb)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면 대형할인점은 한국의 신도시와 자동차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신도시에 사는 직장인은 녹지에 둘러싸인 아파트를 나와 자동차를 몰고 도심의 직장까지 다닐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할인점을 누비며 일주일동안 필요한 식료품을 자동차에 가득 싣고 돌아오기를 기대할 것이다. 이는 신도시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일산신도시와 경의선 철도를 사이에 둔 舊일산으로 눈을 돌려보면 자동차로 손쉽게 간다는 대형할인점이 얼마나 허구인지 금방 드러난다. 일산신도시와 舊일산이 만나는 사거리에 자리잡은 마크로의 일대는 주말에 자동차로 아수라장이 된다. 주민의 항의에 지친 고양시는 결국 우회도로를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다. 마크로의 주차장은 앞에서 기술한대로 모범적이다. 주차공간도 넉넉하고 진출입도 원만하게 계획되어 있다. 문제는 도시조직과의 만나는 방식이다.
일산은 계획인구 276,000명, 면적 1,573ha의 한국의 대표적 계획도시이자 계획, 설계, 시공, 입주의 전 과정을 6여 년만에 끝낸 초고속 신도시이다. 일산의 주거밀도는 1ha당 530명으로 같은 시기에 건설된 서울의 다른 위성신도시의 평균밀도 640명 보다 낮고, 녹지면적 비율이 높아 전원도시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서울시내에서 재개발되는 공동주택의 밀도가 1ha당 1,300명에서 1,900명까지 육박하는 것을 감안하면 일산은 양호한 주거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산의 밀도를 외국의 신도시와 비교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국의 대표적 신도시인 밀톤 케인즈(Milton Keynes)의 인구가 250,000명으로 일산과 비슷하지만 면적이 8,800ha이므로 일산은 여섯 배 이상 밀도가 높다. 더 나아가 미국 교외주택지역의 밀도가 평균 1ha당 40명 이상을 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으니 일산은 무려 열 배 이상의 고밀도 주거환경인 셈이다. 자동차 쇼핑은 미국의 교외보다 밀도가 열 배는 높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전원도시라고 불러주는 일산에서나 가능할 지 모른다. 그러나 수도권에서는 더 이상 일산 같은 신도시의 건설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만한 땅도, 돈도, 그리고 군사정부가 가졌던 저돌성도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대형할인점, 한국도시에서 새로운 建築典型이 될 수 있는가?
일산신도시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외국계 대형할인점은 다음 두 가지의 상반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먼저 적정규모 산정과 개발, 단일관리 시스템, 소비행태에 따르는 공간배치 및 구성 등의 합리적인 건축계획, 설계, 관리의 사례를 제공하는 긍정적 측면이다. 건축가의 입장에서도 간판으로 얼룩진 기존 복합상업건축과 달리 대형할인점은 공간구성 및 조형을 전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도시조직이라는 기존의 맥락보다는 건축물 자체의 합리성, 경제성을 우선하기 때문에 장기적 청사진이 없는 기존도시나 자연녹지지역에 건축될 경우 대형할인점은 도시공간의 기능을 왜곡시킬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을 가진다. ‘더 빠르고, 더 편리한 쇼핑’의 욕구 때문에 할인점의 건축은 더 많은 자동차를 불러들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 인구밀도 1위인 한국의 도시에서 전원과 자동차 쇼핑을 동시에 바라는 것은 ‘환상’이 아니면 ‘이기’이다.
구미식 쇼핑개념이 한국의 도시에 이식되기 위해서는 합리성과 경제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볼 수 없는 도시조직과 문화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북미의 교외형 쇼핑몰이 비판받는 것은 건축형태의 상업성이나 저급함보다는 ‘길’에 대한 도전 때문이다. 쇼핑몰 속에는 상점으로 즐비한 길이 있지만 그 길은 외부와는 고립된 ‘모조 길’이다. ‘길’은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이동하기 위한 ‘연결수단’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펼쳐지는 ‘場’이다. 교통체증을 ‘길이 막혀서 차가 빨리 갈 수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면 길은 그저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교통체증은 길이 막혀서 우리가 걷고, 보고, 느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문화적 場을 박탈하는 것이다.
외화를 한푼이라도 더 유치해야되는 우리의 경제현실에서 보면 외국 유통시설이 하나라도 더 들어서도록 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점에서 국내 경쟁업체가 애국심을 내세운 국수적 논리로 이들 외국계업체를 흠집을 내는 것은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국내 경쟁업체는 합리적인 개발방식과 소비자의 욕구를 공간에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이들 외국계 할인점을 냉정하게 분석해야 해야한다. 반면 건축학계는 신도시에 세워지는 주택작품의 조형실험에는 관심을 보이면서도 할인점을 포함한 상업건축을 저급한 대중문화로 간주하는 엘리트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논쟁 대상을 떠나 상업건축은 도시의 얼굴이자 도시조직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신도시에 등장한 할인점은 자동차가 만들어낸 새로운 소비공간의 단편이다. 소비(consumption)가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에서 끝나지 않고 레저(leisure)와 결합하여 새로운 공간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건축물을 법령이라는 잣대로 제한하는 제도는 있지만 이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도시의 청사진이 없다. 아마도 “더 빠르고, 더 편리한”이란 구호가 한국의 도시에서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기 이전에 사람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동안 지속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범세계적인 유통업계는 새로운 형태의 판매건축을 개발할 것이다. 그때 할인점은 유통업자에게는 귀중한 교훈으로, 건축학자에게는 잠시 왔다가 사라져간 건축유형 정도로 기억되겠지만 우리의 도시에는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흉터가 남게 될지 모른다.(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Consumer Culture and Automobile: Hypermarkets in Ilsan New Town
대한건축학회지 98년 11월호 기고
새로운 소비공간과 소비행태
1996년 일산신도시에는 전세계 판매체인 6위인 프랑스의 까르푸와 네델란드의 마크로가 하이퍼마켓(hypermarket) 혹은 할인점(discount store)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까르푸는 개장 한 달만에 국내 경쟁업체를 능가하는 수익을 올린다. 까르푸는 2000년까지 20개 이상의 매장을 개장하려고 계획하고 있고, 전세계 판매체인 1위 월마트에 매각된 마크로 역시 10여 개 이상의 매장을 계획하고 있다. 최근 외국계 할인점과 국내 할인점과의 경쟁 때문에 소매점이 점차 사라진다는 신문보도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경제위기상황이후 외국계 자문회사들은 해외유통업계의 한국진출이 원활하도록 제도와 법령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정부에 간접적 압력을 가하고 있고, 올해 정부는 자연녹지지역에 대형할인점 건축을 허가하기에 이른다.
까르푸와 마크로의 등장은 지금까지 잠재되었던 한국 중산층의 새로운 소비행태에 대한 갈망이 신도시 건설과 함께 가시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인파와 매연에 시달리면서 도심의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소비자들은 이제 값싼 제품, 다양한 상품, 넓은 매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더구나 외국계 할인매장이 폭발적 매력을 끄는 것은 자동차위주의 쇼핑행태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까르푸와 마크로는 주차 1대당 매장면적이 국내할인점이나 백화점보다 낮을 뿐 아니라 주차방식에서 기존의 상업건축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일산까르푸는 지하1층, 지상7층의 건물로 지하1층, 지상5, 6, 7층에 고객주차장을 배치하고 지상2, 3, 4층에 매장을 두고 있다. 마크로는 지하 1층, 지상3층 건물로 지하1층, 지상1층을 매장, 지상2, 3층을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즉 주차장 위에 매장을 배치하는 기존의 백화점과는 반대로 매장 위에 주차장을 설치하는 수직공간분할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주차로를 설치할 수 있을 정도의 기준층 면적이 확보되어야 하고 주차장에서 적정거리 이내에 매장을 배치해야하는 제한을 갖게되므로 기준층 면적은 크고, 건축물의 높이는 낮게되는 형태를 띄게 된다.
건축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최대의 공간을 확보하는 기존 상업건축 개발방식과 비교하면 까르푸와 마크로의 건축계획은 가히 혁신적이다. 넓은 매장과 진입의 용이함과 대조적으로, 까르푸의 건축비용은 국내 백화점의 절반정도로 조사되고 있다. 건축법보다 지가, 건축비용, 구매력 등을 바탕으로 타당성조사가 이루어지고, 건축물은 이러한 합리적 분석과 공간전략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대형할인점의 공간전략은 건축물의 내부계획에 국한되지 않고 도시라는 더 광범위한 조직과 관련을 맺는다. 북미의 유통업계에는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입지(location)이고, 둘째도 입지(location)이고, 셋째도 입지(location)이다” 라는 것이다. 이점은 전세계의 어느 도시에나 공통되는 사항일 것이다. 서울 도심의 대형백화점은 사람들이 발길이 잦은 지하철역 주변 소위 ‘역세권’에 위치하고 있고, 이점은 신도시에도 공통된다. 까르푸의 입지는 이러한 한국의 ‘역세권 공간전략’에 위배된다. 까르푸의 위치는 일산신도시의 중앙을 관통하는 지하철노선에서 벗어난 곳이고, 주위는 중심상업지역으로 계획되었지만 아직은 잡초만 무성한 미개발지역이다. 까르푸는 보행자를 잠재적인 고객에서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의 접근성이 중요한 것이다.
자동차에 대한 환상
까르푸를 포함한 외국계 할인점은 이제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을 위협하는 새로운 판매건축의 전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수입된 건축형태가 도시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건축학계에서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통업자의 입장에서 할인점이 들어선다는 것이 거대상권이 변화되는 것이라면 공공의 입장에서 대형할인점의 등장은 건축과 도시공간의 변화를 의미한다.
신도시에 우뚝 선 대형 할인점은 북미 도시외곽에 섬처럼 고립된 쇼핑몰에 비유할 수 있다. 밀집된 도심을 피해 교외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미국의 중산층에겐 도시환경을 보상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공간을 필요로 하게된다. 1956년 비엔나 출신 건축가 그루엔(Victor Gruen)이 미니애폴리스 근교에 세운 최초의 쇼핑몰은 급속도로 북미전역으로 확산되고 쇼핑몰은 구체적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에서 집합적인 상업건축을 지칭하는 일반명사화로 굳어진다. 그러나 외부공간과 시각적, 물리적으로 차단된 쇼핑몰의 내부공간은 가로가 지닌 경제, 사회, 문화적 기능을 저하시키고, 쇼핑몰을 에워싸는 거대한 옥외주차장은 도시의 연속성을 파괴한다는 비평을 받아왔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개발비용의 증가, 교외상권의 포화, 환경단체의 반대 등으로 쇼핑몰의 교외팽창은 둔화되고 반면 도심재개발을 장려하는 지방정부와 연방정부의 정책에 힘입어 쇼핑몰은 도심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북미의 경우 이미 쇼핑몰의 개발은 경제, 환경문제가 결부된 범도시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미의 쇼핑몰이 자동차와 郊外(suburb)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면 대형할인점은 한국의 신도시와 자동차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신도시에 사는 직장인은 녹지에 둘러싸인 아파트를 나와 자동차를 몰고 도심의 직장까지 다닐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할인점을 누비며 일주일동안 필요한 식료품을 자동차에 가득 싣고 돌아오기를 기대할 것이다. 이는 신도시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일산신도시와 경의선 철도를 사이에 둔 舊일산으로 눈을 돌려보면 자동차로 손쉽게 간다는 대형할인점이 얼마나 허구인지 금방 드러난다. 일산신도시와 舊일산이 만나는 사거리에 자리잡은 마크로의 일대는 주말에 자동차로 아수라장이 된다. 주민의 항의에 지친 고양시는 결국 우회도로를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다. 마크로의 주차장은 앞에서 기술한대로 모범적이다. 주차공간도 넉넉하고 진출입도 원만하게 계획되어 있다. 문제는 도시조직과의 만나는 방식이다.
일산은 계획인구 276,000명, 면적 1,573ha의 한국의 대표적 계획도시이자 계획, 설계, 시공, 입주의 전 과정을 6여 년만에 끝낸 초고속 신도시이다. 일산의 주거밀도는 1ha당 530명으로 같은 시기에 건설된 서울의 다른 위성신도시의 평균밀도 640명 보다 낮고, 녹지면적 비율이 높아 전원도시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서울시내에서 재개발되는 공동주택의 밀도가 1ha당 1,300명에서 1,900명까지 육박하는 것을 감안하면 일산은 양호한 주거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산의 밀도를 외국의 신도시와 비교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국의 대표적 신도시인 밀톤 케인즈(Milton Keynes)의 인구가 250,000명으로 일산과 비슷하지만 면적이 8,800ha이므로 일산은 여섯 배 이상 밀도가 높다. 더 나아가 미국 교외주택지역의 밀도가 평균 1ha당 40명 이상을 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으니 일산은 무려 열 배 이상의 고밀도 주거환경인 셈이다. 자동차 쇼핑은 미국의 교외보다 밀도가 열 배는 높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전원도시라고 불러주는 일산에서나 가능할 지 모른다. 그러나 수도권에서는 더 이상 일산 같은 신도시의 건설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만한 땅도, 돈도, 그리고 군사정부가 가졌던 저돌성도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대형할인점, 한국도시에서 새로운 建築典型이 될 수 있는가?
일산신도시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외국계 대형할인점은 다음 두 가지의 상반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먼저 적정규모 산정과 개발, 단일관리 시스템, 소비행태에 따르는 공간배치 및 구성 등의 합리적인 건축계획, 설계, 관리의 사례를 제공하는 긍정적 측면이다. 건축가의 입장에서도 간판으로 얼룩진 기존 복합상업건축과 달리 대형할인점은 공간구성 및 조형을 전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도시조직이라는 기존의 맥락보다는 건축물 자체의 합리성, 경제성을 우선하기 때문에 장기적 청사진이 없는 기존도시나 자연녹지지역에 건축될 경우 대형할인점은 도시공간의 기능을 왜곡시킬 수 있는 부정적 측면을 가진다. ‘더 빠르고, 더 편리한 쇼핑’의 욕구 때문에 할인점의 건축은 더 많은 자동차를 불러들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 인구밀도 1위인 한국의 도시에서 전원과 자동차 쇼핑을 동시에 바라는 것은 ‘환상’이 아니면 ‘이기’이다.
구미식 쇼핑개념이 한국의 도시에 이식되기 위해서는 합리성과 경제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볼 수 없는 도시조직과 문화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북미의 교외형 쇼핑몰이 비판받는 것은 건축형태의 상업성이나 저급함보다는 ‘길’에 대한 도전 때문이다. 쇼핑몰 속에는 상점으로 즐비한 길이 있지만 그 길은 외부와는 고립된 ‘모조 길’이다. ‘길’은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이동하기 위한 ‘연결수단’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펼쳐지는 ‘場’이다. 교통체증을 ‘길이 막혀서 차가 빨리 갈 수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면 길은 그저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교통체증은 길이 막혀서 우리가 걷고, 보고, 느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문화적 場을 박탈하는 것이다.
외화를 한푼이라도 더 유치해야되는 우리의 경제현실에서 보면 외국 유통시설이 하나라도 더 들어서도록 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점에서 국내 경쟁업체가 애국심을 내세운 국수적 논리로 이들 외국계업체를 흠집을 내는 것은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국내 경쟁업체는 합리적인 개발방식과 소비자의 욕구를 공간에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이들 외국계 할인점을 냉정하게 분석해야 해야한다. 반면 건축학계는 신도시에 세워지는 주택작품의 조형실험에는 관심을 보이면서도 할인점을 포함한 상업건축을 저급한 대중문화로 간주하는 엘리트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논쟁 대상을 떠나 상업건축은 도시의 얼굴이자 도시조직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신도시에 등장한 할인점은 자동차가 만들어낸 새로운 소비공간의 단편이다. 소비(consumption)가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에서 끝나지 않고 레저(leisure)와 결합하여 새로운 공간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건축물을 법령이라는 잣대로 제한하는 제도는 있지만 이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도시의 청사진이 없다. 아마도 “더 빠르고, 더 편리한”이란 구호가 한국의 도시에서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기 이전에 사람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동안 지속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범세계적인 유통업계는 새로운 형태의 판매건축을 개발할 것이다. 그때 할인점은 유통업자에게는 귀중한 교훈으로, 건축학자에게는 잠시 왔다가 사라져간 건축유형 정도로 기억되겠지만 우리의 도시에는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흉터가 남게 될지 모른다.(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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