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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건축설계와 비평에서의 은유 (1995.12)

建築設計와 批評에서의 隱喩
Architectural Design, Criticism and Metaphor
大韓建築學會論文集 11卷 12號 通卷86號 1995年 12月號, pp.31-40.
1995.12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Abstract
The paper explores  metaphors as principles in architectural design and criticism. Through a critical review of the architectural as well as literary theories of metaphor, the paper looks at the possibility of embracing the visual and spatial aspects of buildings in the construction and interpretation of metaphor. Two contemporary shops are used in order to demonstrate how the strucutre of metaphor can be analyzed so as to clarify how metaphorical meaning arises through the manipulation of formal properties.

1. 서론
        
        존폐여부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던 구 총독부청사는 한국인에게 일제 침략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국민의 성금으로 지어졌던 독립기념관은 잃었던 자존심의 복구로 여겨진다. 건축물의 형태와 공간구성이 일차적인 기능이외의 무엇인가를 상징 혹은 표상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건축물이라는 물적 (物的) 매체를 통하여 자신이나 사회의 관념, 가치관, 이상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시각예술과 더불어 건축행위에서 은유 (隱喩: Metaphor) 는 이러한 간접적 전달방식중의 하나이다. 건축이 실용적 가치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은유가 지니는 깊이와 다의성 (多意性) 때문이다.

        그러나 은유는 일정한 법칙이나, 틀로는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창작행위를 수반한다. 그만큼 논쟁의 대상이 되기 쉽고, 객관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이것이 구 총독부청사의 존폐문제와 같은 정치적 대상이 아닌, 건축적 담론일때 주관적 문제로 머무를 수는 없다. 대중의 견해를 통계적 수치로 환산하여 결론을 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유에 관한 논의가 임의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창작과 해석’이라는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영역을 논리적으로 접근할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수사적 (修辭的) 표현을 사용한다. 신문에서는 ‘안개政局’이라는 말을 써서 불투명한 정치판도를 그리고, ‘그는 여우야’ 하는 말로써 사람의 교활성을 우회적으로 꼬집기도 한다. 어린아이조차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싸우는 나뭇가지’로 표현한다. 이러한 은유를 통하여 우리는 의도한 바를 더욱 풍부하고 강하게 전달한다. 건축가 역시 무형의 의도를 유형의 재료, 형태로 변환시키기 위해 언어행위에서 처럼 수사적 표현을 사용한다.

        60년대에 들어서서 서구의 건축계에서는 수사학 (Rhetoric) 을 건축의 창작행위나 비평행위의 이론적 틀로써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 왔다. 이러한 시도는 건축의 형태와 언어사이의 공통점을 추출하고 이미 정립된 수사학을 건축행위의 모태로 삼고자 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건축의 특이성을 간과한 채 건축을 수사학의 틀로써 여과하려 했고, 더 나아가 수사학의 한 경향에 치우치는 오류를 범하였다. 70년대에에 들어서서 건축 비평가들에의해 이러한 문제가 논쟁의 대상으로 떠올랐으나, 탈 근대주의 (Postmodernism) 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건축형태의 수사적 표현방식을 매너리즘이나 양식의 문제로만 보는 편협성을 드러내었던 것이 사실이다.

        본고는 70년대 서구의 건축비평 가운데에 은유를 직접, 간접적으로 다룬 젱크스 (Charles Jencks), 콜쿠훈 (Alan Colquhoun), 아이젠만 (Peter Eisenman)의 글을 조명하고, 은유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며, 어떻게 창작행위에 이용될 수 있는가를 논하고자 한다. 본고는 먼저 구미의 수사학에서의 은유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고 그 논쟁의 핵심이 건축에서의 은유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탈 근대주의 이후의 건축계에 나타난 은유적 표현방식이 수사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단 본고에서 수사학은 건축에서의 은유를 논의하기 위한 배경으로서만 다루고자 하므로 광범위한 논의는 본고의 주제가 아님을 밝힌다. 이러한 수사학적 은유의 대안으로서 아돌프 로스 (Adolf Loos) 의 골드만 숍 (Goldman & Salatsch shop, 1898) 과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의 모리스 숍 (V.C. Morris shop, 1948-9) 을 재해석, 재구성 해봄으로써 건축적 은유의 가능성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로스와 라이트의 史的비평이 본고의 주가 아닌 만큼 이들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공시적(Synchronic) 이고 분석적 (Analytical) 인 방식을 취했음을 먼저 밝혀 둔다. 상업 건축이 지니는 사회적, 문화적 논의도 역시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고자 한다. 또한 골드만 숍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문헌과 사진등의 이차적 자료에 의해 이해되고 해석되었음을 밝힌다.    

2. 수사학과 건축

        은유가 처음 논리적으로 정의되었던 곳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Poetics 이다. 그는 은유를 “사물의 이름을 다른 무엇에 응용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구체적으로 네가지 유형을 제시하였다 (Aristotle, 1967: 57).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중세 수사학의 근간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은유에 관한 논의에서도 원류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의 정의는 은유에 관한 현대의 대립된 견해의 주 원인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사학에서 지적하는 것은 그의 정의가 은유의 핵심을 어휘의 치환에 둔 반면, 문장이나 구 (句) 를 이루는 비명사 (非名詞) 와 문맥의 기능을 상대적으로 간과한 데 있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점은 쟈콥슨 (Roman Jakobson) 의 은유와 환유 (換喩: Metonymy) 의 이분법적인 정의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쟈콥슨은 아동을 대상으로한 실험을 통해 두가지의 언어장애를 발견한다. 하나는 유사한 뜻을 갖는 대체 단어를 찾지 못하는 결함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한 단어를 구문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결함이다. 이 결과에 따라 쟈콥슨은 은유를 어의 (語意) 의 유사성을 통한 ‘대용 (代用)’ 으로, 환유를 어의의 인접성 (隣接性) 을 통한 ‘보어 (補語)’ 로 규정한다 (Jakobson and Halle, 1956). 쟈콥슨의 정의에 따르면, ‘안개정국’ 에서 ‘안개’는 ‘불투명한’ 대신으로, ‘그는 여우야’에서 ‘여우’는 ‘교활한’ 대신으로 사용된 말이 된다. 즉 은유는 단어와 단어를 치환한 결과로, 句나 문장을 이루는 다른 요소와는 독립적 존재이다. 명사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고, 문장에서의 술부 (述部) 가 갖는 역할은 간과된다. 쟈콥슨의 견해는 기호학 (Semiotics) 에 바탕한 것으로 전체적 문맥을 간과하고, 명사위주로 언어를 해석하는 오류를 낳는다.

        리차드 (I.A. Richards) 는 이에 반해, 은유는 하나의 뜻속에 두 개의 다른 콘텍스트가 공존하는 것으로 단순한 단어의 치환이 아닌, 문맥과 문맥이 호환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Richards, 1936: 89-138). 위에서 인용한 예보다 더욱 복합적인 시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리챠드의 견해는 설득력을 갖는다. 朴木月의 “나그네”의 일부를 인용해보자. “江 나루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에서 ‘달’은 ‘나그네’를 암시한다. 그러나 ‘안개정국’이나 ‘그는 여우야’에서 처럼 두단어 사이에 어의의 유사성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달’이 ‘나그네’를 지칭할 수 있는 것은 시 전체가 갖는 맥락때문이다. ‘달’과 ‘나그네’가 연결되기 이전에 ‘구름’과 ‘달,’ ‘밀밭 길’과 ‘나그네’의 관계가 있고 그 관계를 더욱 풍부하고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 섬세하고 치밀하게 선택된 술부이다. 이 시가 갖는 은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그네’는 원초적 고향을 꿈꾸는 시인의 마음을 그리면서 어떤 특정한 어휘로 대체되는 것을 거부한다. 즉 은유는 문장내의 어휘의 구조적 관계성과 그 관계들이 내포하는 문장외적 요소가 어우러내는 결과이다.
 
        리챠드의 은유이론은 블랙 (Max Black), 비즐리 (Monroe Beardsley), 리쿼 (Paul Ricoeur) 등을 거쳐 ‘호환이론 (Interaction Theory)’ 으로 정립되면서, 문학비평 뿐만 아니라 시각예술 전반에 걸쳐 중요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호환이론’은 은유가 작가의 심리적 상태에서 머무르지 않고 언어, 시각예술 매체를 통하여 구체적 형태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독자나 관람자에게 그 의도가 전달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한다고 본다. 이러한 이론적 틀을 바탕으로 ‘호환이론’은 매체를 분석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문학과 시각예술의 감상을 수동적 해독 대신 창작활동의 한 과정으로 인식한다.

        호환이론이 건축에 시사하는 바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은유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표현행위로, 문학은 그 매체중의 하나이며, 결코 다른 예술쟝르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언어와 건축에서의 은유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개념적 틀로써, 각기 다른 매체를 통해 구상화 될 때, 그 틀은 다르게 정의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건축의 은유와 수사학에서의 은유는 우위관계가 아닌 동격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둘째, 건축 은유는 어떤 ‘의도 (Tenor)’ 가 건축이라는 ‘매체 (Vehicle)’ 를 통하여 표현될때 일어난다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러한 매체를 시각적, 기능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구체적 형태로 간주할 경우, 쟈콥슨과 같은 함정에 빠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리아식 기둥과 코린트식 기둥을 각각 남성과 여성에 연상된 신을 상징한다고 볼때, 디자인의 핵심은 이미 규정화 (Codified) 된 건축언어를 다른 콘텍스트에 이입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게 된다. 이 경우 은유는 양식의 문제로 전락될 수 밖에 없으며, 창작행위 자체가 이러한 조상 (彫像:Iconography) 의 표피적 유희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건축이 시각적 요소를 통하여 구상화 (具象化) 되지만, 이런 요소들이 분리될 수 있는 단편 (斷片) 은 아니다. 건축은 부분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적 요소는 조상 (彫像) 에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건축의 전체적 관계성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경우 문제는 은유적 표현을 구성하는 술부의 관계적 기능에 상당하는 요소가 건축에서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 것에 있다.

        셋째, 은유적 표현에서 언어와 언어외적 대응개념 (External Reference) 을 연결하는 것은 구체적 像이 아니라는 점이다. 朴木月의 “나그네”에서 처럼, ‘나그네’라는 ‘시어’와, 그것이 지칭하는 개념, 즉 원초적 향수를 연결하는 것은 어떤 형상이 아닌 일종의 ‘관점’인 것이다. 건축형태와 건축외적 대응개념을 연결하는 것 역시 구체적 형태가 아닌 추상화된 실재 (Abstract Entity) 이다. 건축가가 건축어휘를 도출한다는 것은 이러한 실재를 구상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은유를 해석하거나 재구성 하기 위해서는 구상화된 건축어휘를 역으로 추상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3. 은유와 상징주의

          70년대의 건축이론, 비평서 가운데 은유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젱크스의 The Language of Post-Modern Archietcture 이다. 젱크스는 근대건축의 상징성 상실을 비판하고, 은유를 통하여 근대주의 이전의 건축이 지녔던 복합성, 다의성 회복을 주장한다. 그의 예에 따르면 꼬르뷰지에 (Le Corbusier) 의 롱샹교회 (Ronchamp Chapel) 는 배, 모자, 오리 등의 형상등으로 다양하게 읽혀진다 (Jencks, 1977: 40-52) (그림 1). 건축형태가 지칭하는 대응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은유는 더 강해진다. 암시하는 바가 더 모호해 지기 때문이다. 젱크스의 이론은 기존의 건축언어를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신고전주의나, 풍토주의가 갖는 회고적 낭만주의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건축을 기호 (sign) 로 보는 오류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개념에 따르면 건축은 동격의 오브제로 대체될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일 뿐 공간구조가 담고 있는 상징성은 무시되고 있다. 은유는 오브제의 전유물일 뿐이다. 젱크스의 이론은 근대건축을 기능주의로 지나치게 격하한 나머지 ‘상징성’과 ‘기능’을 분리시키고 있고, 결과적으로 ‘상징성’은 彫象에, ‘기능’은 ‘공간’에 국한시키는 환원주의 (Reductionism) 에 빠지고 있다. 젱크스의 은유이론은 건축에 대한 근원적인 접근이라기 보다는 탈근대주의의 양식을 옹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사학의 개념틀을 건축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은유의 적용자체가 아니라, 적용방법인 것이다.

        80년대에 들어서서 탈근대주의에 관한 비판적 견해들이 근대주의의 새로운 평가와 더불어 좀더 균형 잡힌 이론으로 나타나게 된다. 콜쿠훈은 문화에 의해 주어진 관습적 의미를 내포하는 형태를 ‘비유적 형태 (Figure)’ 로 규정하면서 이 개념을 은유와 연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딕성당의 형태의 의미는 그 자체가 갖는 구성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것이 전달하고 있는 그 시대의 가치관, 통념에 있다고 본다. 반면 ‘구성적 형태 (Form)’ 는 건축외적인 무엇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립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정의한다. 즉 그 의미는 구성을 지배하는 내적 법칙 혹은 질서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콜쿠훈은 18세기 이후 공통된 가치관의 붕괴로 인하여 건축에서 ‘비유적 형태’는 사라지고, 건축을 ‘구성적 형태’로 격하시키는 지속적 흐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흐름은 근대주의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며, 이에 대한 저항으로 ‘비유적 형태’를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한다. 그 하나는 무어 (Charles Moore), 벤츄리 (Robert Venturi)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고전주의 어휘의 부분적 인용으로, ‘비유적 형태’가 특정한 문화, 가치관을 내포한다기 보다는 인용된 콘텍스트의 상황에 따라 그 의미는 유동적이다. 다른 하나는 로시 (Aldo Rossi) 를 포함한 신 이성론자 (Neo-Rationalists) 들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원형(Archtype) 에 관한 탐구이다 (Colquhoun, 1981: 191-199). 콜쿠훈은 이 두가지의 시도가 잃었던 ‘비유적 형태’의 완전한 부활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건축어휘를 분해, 분절하는 불완전한 것으로 본다. 콜쿠훈의 비평은 탈 근대주의를 양식의 문제로 보지않고, 수사학의 적용방식, 심도등에 차별성을 줌으로써 다른 탈근대주의 비평론과는 궤도를 달리한다. 그의 비평은 ‘비유적 형태,’ 즉 은유의 거부가 아니라, 좀더 총체적인 접근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콜쿠훈은 은유를 건축의 부분적 요소와 외적 대응물과의 관계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은유가 문화, 관습에 의해 결정되는 ‘비유적 형태’에만 내재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공간의 연결, 위계등과 같은 추상화된 ‘구성적 형태’의 상징성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콜쿠훈은 젱크스와 같은 벽에 부딪히고 있다. 현대와 같은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시대에 건축의 통념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의 문화나 가치관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회고적이거나 독단적일 수 밖에 없다.

        둘째, 콜쿠훈의 주장은 은유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에 상충된다고 볼 수 있다. 건축형태가 은유로 느껴지는 것은, 그 형태가 갖는 패러독스 때문이다. 즉 롱샹교회가 은유로 느껴지는 것은 그형태가 통념적인 교회의 유형과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고딕성당의 형태는 중세시대의 신에 대한 일치된 인간의 경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은유라기 보다는 고착화된 은유 (Fixed Metaphor) 인 상징 (Symbol) 에 가깝다고 하겠다. 콜쿠훈의 ‘비유적 형태’는 은유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일 수는 있으나 은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젱크스와 콜쿠훈의 글에서 암시된 상징주의는 아이젠만에 의해 격렬한 비판 대상에 놓인다. 아이젠만은 20세기의 회화와 건축의 테마가 오브제에 편중되어 있고, 전통적 의미의 콘테스트를 상실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떼라니 (Giuseppe Terragni) 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그는 오브제를 지양하고 건축형태의 추상적 관계로 관심을 옮겨 간다. 자연히 접근법은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분석적이 된다. 건축의 질감, 색상, 구체적 형태 같은 감각적 특성 보다는 입면성, 사선, 돌출, 압축, 전단 (剪斷) 등과 같은 추상적 특성을 읽는다 (Eisenman, 1971: 36-65). 아이젠만은 이러한 접근방식을 통하여 ‘명백한 의미’ 대신 ‘암시적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한다. 이 실험은 그의 작품 House X 잘 나타난다. 그러나 아이젠만의 실험은 의도자체가 탈근대주의 이론에 의해 분리되었던 ‘상징성’과 ‘기능’을 통합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 건축어휘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그의 추상적 언어는 기능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오브제 위주의 상징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가 오브제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그가 구사하는 오브제는 무어나 벤츄리가 구사하는 언어와 양식상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위에서 거론된 글들에서 우리는 彫象과 추상, 더 나아가 건축 형태의 시각(The Visual), 공간(The Spatial)의 이분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彫象은 시각적 요소로 추상은 공간적 요소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극단론은 건축을 단순한 이미지로 혹은 기능만을 충족시키는 기계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다. 근본적 이유는 이러한 논의가  건축을 좀더 분석적으로 탐구해서 얻은 결론이라기 보다는 언어학적 모델을 건축에 적용시키면서 건축공간은 관심사에서 벗어 났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러한 언어학 중심의 해석을 보완하기 위해 건축의 시각과 공간이 동시에 은유의 논의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시각과 공간을 맺는 유일한 끈은 인간이 건축을 보고, 그 속을 움직이고, 그리고 어떤 사회적,문화적 영역을 설정한다는 점이다. 즉 건축을 보는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한 위에서 지적한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능’이라는 말은 일차적 실용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근대주의에 대한 성급한 비판일 뿐이다.

        교회가 성스러운 것은 첨탑이 높아서만은 아니다. 그 속에서 성서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예식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祭臺의 聖像과 십자가가 더욱 성스러운 것은 진입에서 祭臺로 이르는 내부공간의 ‘축성’과 ‘위계’로 인하여 시각적, 공간적 정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 공간은 ‘기능’을 매개체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인용된 ‘축성’과 ‘위계’는 聖像이나 십자가와는 달리 구체적 형태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祭臺를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축성’과 ‘위계’를 ‘일시적 형’으로 구성할 뿐 이내 무형의 실재로 돌아간다. 또한 내부공간을 메운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祭臺의 司祭로 향할때 그는 일시적으로 시각의 정점이 된다. 따라서 교회를 설계하는 것이 어떤 고정된 장치만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장치에서 일어날 상황을 더 풍부하고 극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4. 봄(Seeing)과 보임(Gaze) 그리고 움직임(Movement)의 미학           

        질료의 색, 재질, 형태가 건축가에게 주어진 감각적 매체 (Sensual Device) 라면, 봄 (Seeing) 과 보임 (Gaze), 그리고 움직임 (Movement) 은 그 매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테마 (Thematic Device) 이다. 테마가 없는 형태는 그림속의 象처럼 사람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여지는 대상으로만 남는다. 본고는 이러한 형태를 彫像 (Iconic Form), 테마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형태를 視空像 (Visual and Spatial Form) 이라 정의한다. 彫像을 목적으로 한 건축가는 건물을 부분의 집합으로 본다. 교회를 설계하면서 그는 첨탑부터 스케치하거나, 聖像이나 십자가의 디테일을 먼저 염두에 둔다. 반면 건축가가 視空像을 그릴때, 건물은 그에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전체로 다가온다. 그의 스케치는 점, 선으로 시작되지만 추상화 (抽象化) 가 목적은 아니다. 봄 (Seeing) 과 보임 (Gaze), 그리고 움직임 (Movement) 은 이러한 추상으로 밖에는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은유가 어떤 개념 (건축내적이든 외적이든) 을 건축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전달하는 창작행위의 한 방식이라면, 은유의 매체는 결국 위에서 논한 감각적 매체와 테마를 동시에 포함한다 하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로스의 골드만 숍과 라이트의 모리스 숍을 분해와 재구성함으로써 창작과 비평의 원리로써 은유를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 작품을 선정한 것은 그 규모가 작고 기능이 간단하지만 건축이 갖는 복합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골드만 숍은 로스의 초기 작품으로 상업건축뿐 아니라 근대건축의 전조 (前兆) 로 건축 역사서에 기술되어 있다.  로스가 이 상점 (商店) 을 설계할 때에는 반데 벨데 (Henry Van de Velde), 호프만 (Joseph Hoffman), 호르타 (Victor Horta), 설리반 (Louis Sullivan) 과 같은 근대 건축가들이 상업건축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이는 상점을 상품의 교환을 통한 사회적, 문화적 장 (場) 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상품의 대량생산, 공급으로 인해 소비 (Consumption) 의 부정적 측면이 드러나 건축가에게도 이러한 문제를 건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골드만 숍의 입면은 로스의 다른 작품 (Sigmund Steiner Plume and Feather Store, 1819; Knize Store, 1909-13; Manz Book Shop, 1912) 의 입면처럼 대리석과 유리같은 매끄러운 재질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동대 (同代) 의 건축가 호프만이 아폴로 숍 (Apollo Shop,1899) 에서 실내 공간을 투명한 유리를 통하여 완전히 노출시킨 것과는 달리 로스는 정면의 진열장과 매장 사이에 불투명한 유리를 삽입함으로써 독립된 두 개의 영역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매장은 활기찬 비엔나의 그라벤 거리 (Graben Street) 로 부터 시각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실내 공간의 벽면 처리도 동대의 건축가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매장으로 들어서면 사방의 벽이 규격화된 크기의 벽장과 진열대로 싸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거울과 유리의 표면때문에 작은 상점 내부는 더 넓게 느껴진다. 석고 마감의 천장은 벽처럼 광택이 있지는 않지만 거울과 유리와 같은 반사의 효과를 돕는다. 반데 벨데가 하바나 숍 (Shop for the Habana-Compagnie, 1898) 에서 보여 준 양감이 풍부한 벽과는 대조적이다. 또 반데 벨데가 상품을 벽면으로 분리시켜 진열하게 한 것과는 달리 로스는 그것을 벽면을 구성하는 부분으로 처리한다 (그림 2.1-2.4).

        로스가 강조하는 것은 벽에 진열된 상품뿐만 아니라 벽에 비친 사람들 자신의 모습이다. 골드만 숍에서 거울과 유리는 작은 상점 내부를 시각적으로 크게 보이는 효과만을 내는 것은 아니다. 벽은 사람에게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상’을 반사시킴으로써 오히려 사람을 보임의 대상으로 만든다. 따라서 ‘봄’과 ‘보임’은 하나이다.  자기만을 바라보는 나르시즘 (Narcissism) 은 타자 (他者) 로 부터 보임 (Gaze) 을 의식하지 않는다. 로스는 나르시즘을 대중에게 노출시키도록 한다. 비유를 든다면, 골드만 숍에서 거울과 유리벽은 카메라이다. 사면의 카메라에 둘러 싸여 있는 사람은 그 움직임과 관계없이 카메라와의 동질의 관계를 유지한다. 
 
        로스가 골드만 숍을 설계한 지 50년 뒤에 라이트는 샌프란시스코의 메이든 거리 (Maiden Lane) 에 모리스 숍을 설계한다. 이 상점의 입면은 우선 파격적이다. 붉은 벽돌로 싸여진 입면에는 작은 반원의 입구만이 있을 뿐 내부는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골드만 숍이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에게 은밀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모리스 숍의 내부는 외부로부터 철저히 물러나 있는 세계이다. 도시는 로스에게 새로운 생각의 보고 (寶庫) 이지만, 라이트에게는 그의 일생을 두고 비판하고 거부해온 존재이다. 광활한 대지를 향해 뻗어 나가는 라이트의 공간구조는 도시의 맥락때문에 제한되어 있지만 작은 내부 공간에서 치밀하게 실현된다. 입구는 반원형의 아케이드를 거쳐 원통형의 매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쇄적 공간구조는 램프를 따라 이층으로 이어지고 빛이 은은히 스며드는 원형의 천장에서 끝을 맺는다 (그림 3.1-3.2)

        로스의 테마가 ‘봄’과 ‘보임’이라면 라이트의 테마는 ‘움직임’이다. 모리스 숍에서 ‘움직임’은 실내 공간의 전체성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램프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 받지만 골드만 숍에서 처럼 자화상을 볼 수는 없다. 사람 자신이 카메라이며 따라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숍 전체를 움직인다. 로스의 숍에서 일순간 파악했던 전체는 라이트의 숍에서는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그림 4.1-4.2).

        그러나 모리스 숍에서 ‘움직임’의 미학은 상품을 고르고 사기 위해 행해지는 상점의 일차적 기능과는 독립되어 있다. 곡선의 램프는 중심과 주변 (Center-Periphery) 아래와 위 (Up-Down) 를 연결하는 순수 오브제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이러한 현상은 구겐하임 미술관 (Guggenheim Museum) 에서도 나타난다. 나선형을 따라 진행되는 관람자들의 움직임이 미술관 고유의 ‘전시기능’를 압도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모리스 숍은 본고가 정의하는 은유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즉 모리스 숍을 통하여 라이트가 추구하려 했던 건축형태의 가소성 (可塑性: Plasticity) 이 직접적이고도 명백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이를 은유의 의도 (Tenor) 와 매체 (Vehicle) 의 관계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의도와 매체가 하나로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로스는 ‘시각적 깊이’와 ‘환영’의 구분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패러독스를 유발시킨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상점의 일차적 기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골드만 숍에 들어선 사람은 가상적으로 거울속에 들어 선다. 거울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때문에 그는 완전히 ‘내부’에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없다. 거울뒤의 상품을 꺼내면서 잠시 현실의 공간으로 들어와 있던 그는 자아의 상 (像) 으로 돌아 간다. 은유의 의도인 自我의 幻影을 공간의 관계성 속에서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視空的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상품 (Commodity Object), 자아의 모습 (The Image of Self), 상품 교환 (Exchange) 의 상징성의 관계를 극대화 한다는 점에서 로스의 창작 원리는 동대의 건축가들이 추구하던 오브제 위주의 상징주의에서 벗어나 은유와 기능을 접목시키고 있다.

5. 은유와 類型

        언어나 건축에서 은유는 특정한 구조를 갖는다.  朴木月의 ‘나그네’에서 ‘인간의 원초적 귀소성’은 시어를 통해서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다.‘호환이론’이 주장하듯 ‘의도’와 ‘매체’가 서로 만나 언어가 갖고 있는 특유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 ‘매체’는 형태상의 유사성이 아닌 둘사이의 개념적 동질성으로 연결되어 진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개념을 구상화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독자로부터 능동적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 형태의 이면에도 이같은 보이지 않는 구조가 있다. 상점이 교회처럼 보일때 사람들은 상점과 교회의 공통 분모를 찾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상징주의에 빠질 때 이러한 공통 분모는 상점의 장식이나 교회의 첨탑같은 양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반면 은유를 한차원 높힐 때, 공통 분모는 이 두가지 유형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관심은 건축의 기본 구성 요소인 벽, 바닥, 천장등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모아지고 더 나아가 그 관계성을 어떤 개념적 틀로써 이해하려 하게 된다.

        이 점에 창작 원리로서의 은유는 건축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던 유형 (Morphological Configuration) 이나 전형 (典型;Type)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네오 (Rafael Moneo) 는 ‘전형’을 사물사이에 존재하는 동일한 구조성으로 정의한 바 있다. 더 나아가 그는 건축이 ‘전형’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재구성’ 된다고 주장한다 (Moneo, 1978: 22-45). 모네오의 정의에 따르면 설계 행위는 다양한 구조성을 특정한 형태로 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이러한 변환이 어떤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냐에 따라 설계 행위의 깊이와 복합성이 구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과 관련하여 건축설계의 세가지의 접근방식을 그려 볼 수 있다. 첫째, 건물은 측성, 중심성 같은 추상적, 기하학적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둘째, 건물은 이러한 특성들이 기능의 제약을 받아 좀더 구체적인 공간의 관계성으로 나타나는 상태로 이해 할 수 있으며, 이때 건물은 그것이 속한 사회나 문화의 집합성을 내포하게 된다. 셋째, 건물은 시각적으로 뚜렷한 형태를 지니면서 건축가의 개성이나 아이덴터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탈 근대주의 건축의 문제는 설계행위가 첫번째의 상태에서 세번째의 상태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은유의 근원이 개념적, 추상적 틀이 아니라 기존의 구상화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때, 건축가가 행하는 형태의 변환 (Transformation)은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내포된 뿌리를 건드리지 못한 채 표피에서 맴돌게 되는 것이다. 탈 근대주의 이후의 다양한 실험들이 역시 위에서 논한 추상적 형태를 개인적 건축언어로 간주할 때 또 다른 매너리즘에 빠질 수있다. 
        
6. 결론

        은유의 의미는 형태와 공간으로부터 구조적 동일성을 깊이 있게 추적하고 그것을 자신의 건축언어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은유의 진정한 의미는 내재된 의도가 스케치나 도면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화된 공간속에서 행위로 나타날 때 실현된다. 이 점에서 본고가 주장하는 은유는 상징 (Symbol) 이나 알레고리 (Allegory) 와는 구별된다. 상징은 건축공간이 담는 어떤 행위 없이도 시각적으로 인식되며 알레고리는 기존의 텍스트 (Text) 나 이야기 (Narratives) 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감상행위는 작가를 해독하는 수동적 행위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즉 ‘이해’와 ‘감상’으로 그 의미는 충족되는 것이다. 반면 은유는 감상자의 능동적 행위와 해석을 향해 항상 열려져 있다. 때문에 은유는 건축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드러낸다. 그러나 건축 창작행위의 역동성은 이러한 괴리를 완전히 해소한다던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괴리를 드러냄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건축물이나 건축행위가 비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어느 정도의 논리적 틀에 바탕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비평행위의 깊이는 차별성을 드러낸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비평행위의 목적이 비평자체의 자율성 (Autonomy)을 획득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거나, 주석을 다는 것으로 머무를 때 위에서 언급한 괴리는 창작행위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창작’과 ‘비평’은 종속이나 우위의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창작’으로 가는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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