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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雲從街의 건축과 역사 (2000.12)

雲從街의 건축과 역사
서울 도시와 건축 (Seoul Architecture and Urbanism), 서울특별시, 2000.12

종로는 서울의 중심을 동서로 가르는 약 2.7km의 길이다. 사대문안에는 옛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종로의 역사에 견줄 바가 아니다. 종로는 조선시대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설치된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중에서도 종로1가 부근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雲從街라고 불리었다. 조선초 종로1가에서 종묘앞, 창덕궁앞에서 종로3가, 종각에서 광교까지의 길 양편에는 시전행랑이라고 불리는 어용상점들이 들어섰다. 시전상점 하나의 규모와 형태는 당시 궁궐, 관아, 종묘, 사직에 비해 작고 초라했으나 행랑의 집합적 가로경관과 그 곳에서 펼쳐지는 일상은 수도 서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시전은 풍수지리와 같은 우주론적 질서보다 길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조선시대의 유일한 도시건축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종로거리로 행차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종로는 중세 유럽의 상업가로와 달리 경제, 정치, 문화를 통합한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와 전후복구기를 거치면서 종로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명동이 종로를 견제하는 일본인 상업지로 등장하면서 종로는 민족자본의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하게된다. 종로는 정치와 문화면에서도 서울의 중심이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 정치의 중심, 문인과 예술인의 보금자리, 대학생의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 뒷골목 주먹의 각축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1970대 초에 본격화된 강남개발과 서울의 확장으로 종로는 서서히 그 명성을 잃는다. 종로의 흡인력을 빼앗아 가는 것은 외부의 힘만은 아니었다. 지게꾼, 우마, 전차의 느릿느릿함이 편리와 속도를 내세운 자동차에 압도당하면서 종로는 걷고싶은 도시공간의 매력을 잃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사회를 통제했던 규범과 질서, 일제하의 공권력이 지나간 자리는 상업자본의 힘으로 대체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도심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어 서린동, 청진동, 공평동의 작고 불규칙한 필지가 재정비되었고, 그 자리에 대형 고층건물이 들어서면서 경관이 바뀌고 있다. 현재 종로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보신각까지 1가, 탑골공원까지 2가, 종묘앞까지 3가, 광장시장 앞까지 4가, 동대문 종합시장 전까지 5가, 동대문까지 6가로 나누어진다. 구간별로 상업활동도 특성을 지닌다. 종로1, 2가는 상점, 음식점, 사무소, 학원, 개인병원, 유흥시설 등의 복합상업시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2가의 주단가게에서 육의전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3가에서 4가까지는 보석상, 의류점, 5가에서 동대문까지는 약국 및 약재상이 밀집해 있다.

종로의 대표적 건축물로 화신백화점을 꼽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축인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한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화신백화점(1937년)은 1930년대 장안의 명물로 등장하였다. 지하1층, 지상6층의 철골, 콘크리트 건물로 모서리 부분에 정면출입구가 있었고 단순하면서도 힘있는 근대적 양식의 외관이었다. 자본 역시 한인 박흥식이 마련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상업공간으로의 면모를 지닌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1987년 도심 재개발의 과정에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거되었다. 그후 10여년의 우여곡절 끝에 1999년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백화점으로 계획되었던 종로타워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임대 사무실로 프로그램이 바뀌었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최상층과 철 갑옷을 입은 외피는 종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으나 건물 중앙의 거대한 공간은 상징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도심용적률 상향조정, 높이제한 완화, 그리고 건설과정에 건축가가 바뀌면서 생긴 결과이다. 미국의 엘레베 베켓 건축사무소와 라파엘 비뇰리에 의해 계획된 이 건물이 한국의 근대상업건축의 주춧돌 자리에 세워진 사실은 건축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역시 10여년의 과정을 거쳐 같은 시기에 세워진 도심최고의 36층의 SK빌딩은 종로타워와 경쟁을 하듯 맞은 편에 서있다. 종로타워가 3개의 원통 코어 형태로 구성된 반면 SK사옥은 중앙에 코어를 두었다. 외관 역시 철골 격자구조가 간결하고 정제된 근대건축의 전형으로 종로타워의 과시적 기계미학과 대조를 이룬다 (서울건축, 김종성, 1999). 종로타워와 SK빌딩은 한국의 간판 대기업의 자본, 기술, 그리고 각자의 개성을 실험한 점에 의의를 갖고 있지만 600여년 역사의 종로에 들어선 점은 도시건축적 입장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점에서 1960년 중반이후 종로를 지키고 있는 YMCA사옥은 주목해야 할 건물이다. 이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강연, 음악회, 토론회가 열렸던 벽돌조 3층의 YMCA회관이 있었다. 6.25전쟁때 소실되어 1966년 지하 1층, 지상 7층의 철근콘크리트 회관(종합건축연구소)이 다시 건립되었다. YMCA회관은 체육관, 강당, 교실, 집회소, 호텔, 사무실을 포함하여 교육, 여가, 숙박, 업무기능을 동시에 수용하는 종로의 새로운 복합상업건축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YMCA회관 때문에 종로1가에서 3가까지 연결되었던 조선시대의 피맛길이 단절되기도 하였다. 종로는 이름있는 건축가의 작품보다는 익명의 건축물이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종로2가에는 YMCA회관 이외에도 1960년대를 전후하여 세워진 상업건축이 밀집해 있다. 종로2가 8번지의 장안빌딩, 13번지의 통일빌딩, 19번지의 완영빌딩의 외관과 구조는 근대적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공간구성은 구미도시의 상업건축과 다른 모습이다. 건물의 전면 폭이 깊이보다 긴 평면은 격자형 도시에서 보여지는 폭이 좁고 깊이가 긴 평면과 대조를 보인다. 600여년전의 조선시대 시전행랑의 도시조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강남이 새로운 서울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종로는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 거리이자 문화산업이 꽃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거리이다. 인사동과 사간동으로 이어지는 미술관과 골동품의 거리, 그리고 경복궁, 창덕궁, 운현궁, 종묘와 같은 도심의 오아시스가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종로는 서울의 寶庫이다. 민주화운동, 시민운동과 같은 거리의 정치가 아직 살아있고 시민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鐘路는 아직 雲從街의 위용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소비공간의 이중구조

압구정동은 강남-강북의 이분법적 도시 패러다임이 시작된 진앙지이자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소비공간을 대표하는 곳이다. 1960년대 이전 논바닥에 불과 했던 압구정동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영동개발로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75년 23개동 1,562가구의 현대아파트가 1978년에는 33개동 2,735가구의 한양아파트가 들어서서 이른바 압구정동 아파트지구를 형성하게 된다. “押鷗亭”이라는 이름은 세조반정에 참여한 정난공신 한명회가 부귀공명을 버리고 갈매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의 정자를 세운 것에서 에서 유래되었다. 현대아파트는 1980년대 중반에 강북을 누르고 한국 최고의 부촌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곳이 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주거공간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는 도시구조가 한 몫을 하게된다. 불규칙하고 구불구불한 강북과 달리 압구정동은 격자형 街區로 계획되었고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압구정로를 맞대어 처음부터 사회계층의 분리가 용이한 도시구조를 하고 있었다. 한강은 강북의 옥수동과 같은 중산층의 주거로부터 압구정동을 차별시키면서 자연조망을 제공해 주는 이중기능을 해왔던 것이다. 1979년과 1985년에 놓여진 성수대교와 동호대교, 그리고 지하철 3호선은 이 곳을 교통의 요지로 만들었다. 이곳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분당선 지하철이 완공되면 압구정동과 강남을 잇는 축이 강해질 전망이다.

1980년 초반부터 압구정 아파트 건너편의 단독주택 필지에 카페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한다. 1980년 대 중반에는 유명 패션샵, 미용실, 모델에이전시, 광고제작사, 이벤트회사, 사진스튜디오가 강북에서 이전해 오면서 압구정동은 부촌에서 새로운 소비공간으로 변모하게된다. 압구정동으로 지칭되는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보면 압구정동의 범위를 넘어선다. 동쪽으로 로데오거리의 일부는 청담동에 속하며, 서쪽으로 현대백화점 건너편에서 시작되는 패션샵, 화랑, 사진스튜디오가 밀집한 한나래길의 일부는 신사동에 속한다. 이 범주 내에는 학교, 공원, 교회, 소규모아파트, 단독주택이 있지만 이는 압구정동을 지배하는 상업화에 힘에 언제라도 함락될 수 있는 것들이거나 이미 상업자본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실제로 압구정동의 진면목은 이면도로에 나타난다. 갤러리아 백화점 동관과 서관 건너편에서 평행으로 펼쳐지는 로데오거리는 선릉로의 이면도로이며, 압구정로와 도산대로의 이면도로인 보람길과 꽃다이길 역시 단독주택에서 고급 음식점, 카페들로 변해가고 있다. 현대백화점 건너편 700여 미터의 한나래길은 논현로의 이면도로이다. 대로와 대로를 끊기지 않고 연결하는 것이 이들 이면도로의 특징이다. 도시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도시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압구정동 소비공간의 특징이다.

압구정동의 소비문화는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이후 새로운 개념의 건축을 태동시키는 우군 역할을 한다. 청담동 사거리에서 갤러리아 백화점에 이르는 압구정로 양편은 하나의 패션샵으로 구성되는 중층상업건축이 군집을 이룬다. 상점, 식당, 사무실, 유흥시설이 혼재되어 간판으로 뒤덮인 타 지역과 다르게 단일화된 이미지의 도시경관을 보인다. 상업건축을 결합하는 방식에서도 압구정동은 다른 면을 보인다. 동호대교를 건너 언주로로 들어서면 왼쪽에 나타나는 청학빌딩(인우건축, 함인선, 1997)은 1층에 주차장, 레스토랑, 상점과 상층부의 골프연습장을 결합한 유형으로 강북의 도심이나 주택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江南式 상업건축이다. 철근콘트리트 및 조적조의 기존건물과 새로운 구조와 재료의 공간을 결합한 증개축 건물이다. 청학빌딩은 옛 건물을 감싸고 있지만 장소와 옛 건물의 흔적을 표현하기보다는 철과 유리의 가벼움, 정교함, 경쾌함, 투명함을 도시로 내비치고 있다 (사진 3: 청학빌딩). 100m에 이르는 1층 전면은 커튼월, 배면은 주차장으로 차단되어 행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반면 건물의 전체적 이미지는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도 쉽게 포착된다.

동호대교를 건너 논현로를 들어서면서 왼쪽에 만나게 되는 시네플러스(중원건축, 김낙중, 1998) 역시 청학빌딩에서 표현된 자기발현이 수직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철, 유리, 알루미늄의 외피와  상층부의 기계이미지의 캐노피는 먼 거리에서 시선을 끈다. 영화관, 어학원, 카페, 제과점, 레스토랑이 결합된 복합상업건축이다. 일반적인 복합상업건축이 임대공간의 용도에 따라 개조되는 반면 영화관은 계획부터 특별한 공간의 결합방식이 필요한 경우이다. 청학빌딩과 함께 시네플러스는 기획, 계획, 건축설계가 통합되어 가는 90년대의 긍정적 건축설계 방식을 보여준다. 금싸라기 같은 1층 공간에 작은 마당과 건물을 관통하는 통로를 만든 건축주와 건축가의 의지는 주목할 만하다. 도로에서 주된 출입구가 없이 9개의 분화된 출입구를 통하여 선택적으로 내부에 진입할 수 있게 함으로써 도시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청학빌딩과 시네플러스가 내부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면 청담동 꽃다이길의 시안(Xian) 레스토랑(부대진, 김무현, 1998)은 극단적 내향성을 보인다. 기존주택과 마당을 증개축한 이 건물은 전면이 검은색 타공 금속판으로 가려져 있어서 내부를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다. 시안이라는 간판조차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암시를 줄뿐이다. 시안은 길을 거닐다가 우연히 찾아오는 행인들의 장소가 아니다. 압구정동은 누구나 갈 수 있지만 모두가 이곳에 속할 수는 없는 곳이다. 압구정동식 삶에 동참하는 이들에게만 열려있는 곳이다. 시안의 건축적 성과는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정제된 미학이다. 새로운 건축재료에 대한 실험과 건축적 표현은 90년대 말 상업자본이 건축계에 가져다 준 선물이기도 하다.

시안의 내향성과 청학빌딩의 투명함을 결합한 건축표피의 이중성을 가장 잘 표현한 건물은 한나래길의 오퍼스빌딩(손학식, 켄민, 1998)이다. 이 건물은 계획부터 프로그램과 사용자가 명확히 설정된 90년대형 복합상업건축이다. 150석의 지하 콘서트홀, 1층 레스토랑 지상층의 음악 및 디자인 관련 임대사무실로 구성되어 있다. 출입구 부분의 평면은 엄격한 격자형을 탈피하였고 이러한 자유분방함은 삼차원의 구성에서 더욱 과감하게 실현되고 있다. 콘크리트 구조에 유리와 알루미늄을 씌우고 다시 곡선과 사선의 골함석과 금속판으로 겉옷을 입힌 오퍼스는 돌과 타일로 정형화된 주변건물에 비해 오히려 소박함을 발하고 있고 간판으로 뒤덮인 거리풍경에 대해 작은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90년대 등장한 압구정동 건축은 상업자본주의에 의존하면서도 그 힘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하는 이중의 숙제를 안고 있다. 그 힘에 쉽게 굴복할 경우 건축은 사회계층을 공간으로 가르는 불평등 공간구조에 일조하게 될 것이나 반면으로 그 저항의 힘이 지나칠 경우 소비공간을 만드는 건축행위는 처음부터 불가능 할 것이다. 압구정동 건축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긴장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