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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미인과 건축미 (2012.7.10)

미인과 건축미

 

중앙일보, 2012.7.10, 오피니언, [삶의 향기]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299/8708299.html

http://przone.joinsmsn.com/data/2012/07/20120710023939_9579_33.pdf

 

'시각적 아름다움은 좌뇌와 우뇌의 오묘한 합작품이자
등수로 매길 수 없는 시대와 문화의 집합적 산물이다'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예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는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남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다. 인간의 머리 뒤쪽에는 예쁜 얼굴에 숨겨진 수학적 비례와 균제를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방추(紡錘) 모양의 세포가 있다. 이 세포는 외모뿐만 아니라 감정과 성격을 읽어 내는 능력도 갖고 있다고 한다. 석 달배기 영아도 성인 기준의 예쁜 얼굴을 더 좋아한다니 뇌의 능력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우리 뇌가 이런 선험적 능력을 갖고 있다면 건축의 아름다움도 순간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건축미가 인간의 얼굴처럼 수학적 비례와 균제로 좌우된다면 더욱 그렇다. 이런 이유에선지 ‘한국 건축 10선’을 뽑아달라는 대중매체의 요청을 가끔 받는다. 이럴 땐 내 관심과 전공 밖의 일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요청을 거두지 않으면 어설픈 논리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우리나라에는 모두 670만 채의 건물이 있다. 이 많은 건물 중에서 한국 건축의 대표작 10채를 고른다는 것이 가능할까? 시대, 지역, 용도, 규모별로 분류해서 뽑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요청도 수긍이 간다. 온라인에는 한국 최고 미인 리스트가 떠돌아다닌다. 미인 대회도 해마다 열린다. 전국의 여성 2500만 명 중에서 최고 미인도 뽑는데, 인구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건축물 중에서 대표작을 고르는 것은 비교적 수월하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고대 로마의 건축이론가 비트루비우스는 인체와 건축의 관계를 분석하고 건축미를 기하학적으로 정의했다. 배꼽을 중심으로 양팔과 양다리가 원을 그리는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은 이렇게 탄생했다. 비트루비우스를 계승한 르네상스 시대의 알베르티는 건축미를 이루는 방, 벽, 기둥, 창의 비례 체계를 집대성했다. 이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인간의 오감으로 느끼기 이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원리였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기준은 산업혁명을 거쳐 19세기에 이르자 무너졌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복잡한 건물을 지으려면 정해진 비례를 따를 수 없었다. 유리와 철이 도입되자 벽은 해체되고 기둥은 가늘어졌다. 고전 건축에 익숙한 유럽인의 눈에 새로운 공법으로 지은 건물은 흉물스런 구조물로 보였다. 파리의 랜드마크인 에펠탑이 섰을 때 지식인들은 미적 감각이 없는 기계 덩어리라고 혹평했다. 소설가 모파상은 에펠탑 안에 있는 식당에서 매일 점심을 먹었는데, 파리 시내에서 그가 혐오하는 이 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이 얼마나 다른지 잘 보여주는 예다.

 

매력적인 상대를 고르는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인류의 조상들은 턱이 넓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눈썹이 두터운 고릴라형 얼굴을 성적 매력이 있다고 여겼다. 미국 자연사박물관 연구원의 말이다. 한편 현대 한국인의 보편적 눈으로 보면 미인이라고 하기 어려운 가늘고 치켜 올라간 눈매의 동양 여성이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시각적 아름다움이란 결국 좌뇌와 우뇌의 오묘한 합작품이자 시대와 문화의 집합적 산물이다.

 

미모를 선호하는 남녀의 심리학적 기저에는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과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외모 이면의 건강함, 안정감, 충실함에 대한 무의식적 기대 심리다. 건축도 인체에 비유할 수 있다. 뼈와 장기, 혈관과 신경조직이 건강할 때 피부의 탄력이 생기는 것처럼 공간이 쓸모가 있고 구조와 설비 시스템이 튼튼할 때 형태가 빛을 발한다. 새로운 삶을 제시하는 공간과 기술 혁신이 없는 매끈하고 현란한 표피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는 이유다.

 

건축이 집을 짓는 것 이상의 문화적 행위인 것은, 감상 위주의 예술작품을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삶을 포용하는 현실 공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형태와 외관은 공간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건축가는 조형물을 만드는 예술가가 아니라 삶을 조율하는 공간의 안무가(按舞家)에 가깝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등수로 매길 수 없는 것처럼 건축물도 하나의 잣대로 줄을 세울 수는 없다.

 

김성홍 ․ 서울시립대 교수 ․ 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