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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100원짜리 동전이 묻힌 슈투트가르트 도서관 (2013.5.21)

100원짜리 동전이 묻힌 슈투트가르트 도서관

 

중앙일보, 2013.5.21. 오피니언, [삶의 향기]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929/11570929.html

 

한국인이 설계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

문화의 차이와 자신감, ‘무지(無知)의 불평등’을 생각하다

 

지난 3월 말 CNN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7곳’을 선정했다. 대학도서관이 3곳, 시립도서관이 4곳이었다. 도서관이 지식과 정보의 창고일 뿐만 아니라 시민의 삶과 밀접한 공공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준 기사였다. 그중에는 재독 건축가 이은영씨가 설계한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립도서관이 포함되었다. 직육면체의 건물 꼭대기에 한글 신명조체로 쓴 ‘도서관’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은 2011년 10월 개관되자마자 세계적 주목을 끌었고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된 바 있다. 최근 이은영씨가 서울을 방문해 몇몇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슈투트가르트 도서관은 단순하면서도 과감한 형태와 공간, 역사의 재해석으로 단번에 혁신적 건축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씨는 서양 건축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고대 로마의 판테온, 18세기 공상주의 건축가 에티에네 불레와 근대 거장건축가 미스 반데어로에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5층 높이의 중앙열람실에 들어선 방문객은 MC 에셔의 판화 속 비현실적 공간, 혹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at)의 환영을 느끼기도 한다. 반투명 창을 마주하는 은은한 독서실은 한국 전통 건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양한 것, 이질적인 것을 함축한 건축 은유의 힘이다.

 

한편 지나치게 단순한 외관은 주변에 배타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부하고 모더니즘 정신에 충실하고자 했던 건축가의 집요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이씨는 세속화된 도시에 기하학적이고 순수한 형태와 공간을 심고자 했다. 건물의 별칭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전설적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하나의 돌(monolith)’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의 돌은 인류 문명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도서관이 작품성과 대중성을 획득한 걸작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한때 건축계가 씨름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한국적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본을 통해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인 한국이 필연적으로 대면한 문제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명쾌한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199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이 질문은 담론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경험을 쌓은 유학 2세대가 국내외에서 홀로서기를 시도한 때였다. 이전 세대가 서구 모더니즘의 ‘수동적인 학습자’였다면, 이들은 동서양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변화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인 세대였다.

 

이들에게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이분법적 구분은 점차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상투적 말이 있다. 하지만 지역과 세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우리는 싸이의 노래, 김연아의 안무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지역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녹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독일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한국인 이은영의 건축도 그렇다. 그가 밝힌 것처럼 슈투트가르트 도서관의 형식은 서양 건축을 참조하고 있지만, 담고 있는 내용과 의미는 ‘서양’의 울타리를 넘는다.

 

유럽에서는 기공식 때 먼 훗날을 위해 도면, 일지, 지역신문, 개인 물품을 상자에 담아 지하에 묻고 콘크리트를 친다고 한다. 슈투트가르트 도서관장은 기공식 때 자신의 소지품 대신 건축가 주머니에 있던 100원짜리 동전을 넣었다고 한다. 동전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이 400여 년 전 조선을 지킨 것처럼 도서관을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는 유머와 함께. 외벽에 독일어, 영어, 아랍어와 함께 한글로 ‘도서관’을 새겨 넣은 것처럼 한국 동전을 묻은 것은 건축가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세계를 수용하는 자신감이 아닌가 싶다.

 

인도학자 디페시 차크라바티는 유럽이 아시아에 무지(無知)한 것은 당연하게 여기되, 아시아는 유럽을 알아야 된다는, 이른바 ‘무지의 불평등’ 법칙이 현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에도 해외 건축가의 작품이 이곳저곳에서 세워지고 있다. 타문화에 대한 배려와 자신감일까? ‘무지의 불평등,’ 이것의 또 다른 얼굴일까?

 

김성홍 ․ 서울시립대 교수 ․ 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