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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서울의 현대건축 60년, 민간건축의 건립과 변화 (2016.12.20)

서울2천년사』 35권 현대 서울의 도시건설

 

(김광중, 최상철, 원제무, 안창모, 김성홍, 박철수 공저)

서울역사편찬원2016, pp.273-329.

 

 

5장 민간건축의 건립과 변화 (김성홍)

 

 

 

01 시간적 범위와 민간건축 유형

 

02 서울의 현대건축 1(1950년대 중반 1989)

 

03 서울의 현대건축 2(19901999)

 

04 서울의 현대건축 3(20002009년)

 

05 서울의 현대건축 4(20102016년 현재)

 

 

 

01 시간적 범위와 민간건축 유형

 

 

1) 현대건축의 시기와 세대 구분

 

 

서울의 민간건축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는 일제강점기 근대건축과 한국 현대건축을 어떻게 정의하고 구분할 것인가 하는 원론적 문제가 놓여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건국을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다른 한편으로는 1948년 정부 수립으로 보는 이념적 논쟁과 얽혀있다. 이 논쟁이 일제 강점기에 유입된 서양 근대건축과 단절된 전통건축의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역사학적 과제와 얽히면 한층 복잡해진다. 대한민국 건국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는 진보진영의 역사 인식과, 같은 시기인 일제강점기의 건축을 근대건축으로 보는 건축학계내의 관점은 전혀 다른 차원과 의미를 띤다. 고유명사적 의미를 획득한 서양 근대건축과 일제가 수입하여 식민지에 변용한 건축을 동종(同種), 동류(同類)의 건축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라는 공간적 범위 안에서 만들어졌지만 그 행위의 주체(건축주, 자본, 건축가, 사용자)를 고려하여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근대건축은 서양의 근대건축과 구분되어 정의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전의 건축에 관한 역사 이론적 숙제가 남아있음을 전제로,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 복구기를 한국 현대건축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주체적인 건축 행위가 본격화 된 시기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를 시작한 1954년 이후이다. 따라서 1945년 광복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는 현대건축의 과도기로 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하나의 고전이 된 서양의 근대건축(modern architecture)’은 고유명사인 반면, ‘현대건축(contemporary architecture)’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일반명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그 시간적 범위는 현재까지로 설정한다. 다음 세대에 의한 역사·이론적 재정의가 이루어질 때 까지 이러한 시대 구분은 유효하다고 본다. 이런 틀에서 서울의 현대건축을 1950년대 중반부터 2016년 현재까지로 설정하는 것에 큰 반론이 없을 것이다.

 

 

한편 1962년을 법과 제도적 관점에서 서울 현대건축의 실질적 원년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가 만든 <조선시가지계획령>의 틀을 가져왔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법과 도시계획법이 제정됨으로써 건축설계와 도시계획의 법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1962년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촉발시킨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의 원년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도시와 건축이 급격한 속도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 글은 1950년대 중반부터 2016까지의 약 60년을 시간적 범위로 삼고,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에서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19875년제 대통령단임제, 88올림픽 개최, 문민정부 수립,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같은 정치, 사회, 경제적 사건은 건축의 변화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 역사적 사건은 건축에 곧바로 영향은 미치기로 하지만 기획, 설계가 완료되고 시공이 시작된 건축물은 23년 뒤 준공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사건과 결과의 시차를 고려하여 서울건축 60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첫째, 1950년대 중반부터 1989년까지의 약 35년간으로 정부가 근대화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수출주도의 산업화 정책을 폈던 현대건축 제 1기이다. 이 과정에서 농촌에서 서울로 인구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과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개최 등 국가주도의 사업에 힘입어 서울에서는 개발과 건설의 양적 팽창이 일어났다.

 

 

둘째, 이른바 ‘87체제로 불리는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시작과 1993년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정치 환경이 바뀌고, 수도권 신도시의 건설 등으로 제2차 건설 팽창의 시기를 맞이했다가 1997년 외환위기로 급격히 위축되었던, 1990년부터 1999년까지 10년간의 제 2기이다. 2기의 후반 서울에서는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조순 시장이 최초의 민선 시장으로 재임(19951997)했다.

 

 

셋째,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산업구조가 신자유주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건축과 건설시장의 체질변화가 이루어지다가, 2008년 다시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제2차 구조적 변화가 시작된 2009년까지의 10년간의 제 3기이다. 서울에서는 이명박 시장(20022006)이 재개발, 재건축사업을 묶은 대단위 뉴타운 사업을 2002년부터 추진했고 이는 다른 민간건축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문화 정책을 표방한 오세훈 시장(20062011)을 포함하여 정치인들은 도시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적 수단으로, 기업은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건축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세계의 스타건축가들이 건축설계에 초청을 받거나 경쟁에 참여했다.

 

 

넷째, 금융위기를 겪고 난 2010년부터 2016년 현재까지 7년간의 제 4기로 대외적으로는 건축이 세계 시장에 개방되고, 대내적으로는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 시기이다. 박원순시장은 재선 이후 대규모 개발에서 소규모 점진적 재생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시민 의견 수렴을 거쳐 추진이 불가능한 뉴타운사업이 해제되었다. 서울건축가 총괄제도가 도입되어 제도적으로 도시와 건축사업을 조율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고, 젊은 건축가들이 공공건축에 참여하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민간건축 시장은 건설산업과 동반하여 침체되고 있으나, 소수의 건축주가 주도하는 고급건축 시장은 유지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각 시기의 대표적 건축물의 유형과 규모, 건축가들의 작업 방식과 태도, 건축사사무소의 규모와 성격도 서울의 현대건축의 네 시기와 궤도를 같이 한다. 일제강점기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를 근현대건축 과도기 세대라고 부른다면, 1950년대 건축을 학습하고, 19601970년대 왕성한 활동을 하고, 1980년대 들어서 일선에서 물러난 건축가들을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라고 부를 수 있다.

 

 

1세대에게 직접적 영향을 받았지만 홀로서기를 통하여 건축가의 독자적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던 2세대가 전면에 등장한 시기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말까지이다. 2세대는 1세대의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1세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건축적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였다. 한편에서는 건축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치열한 자기학습을 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건축의 사회적 실천을 시도한 세대가 2세대였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어려운 과정에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3세대들은 1세대의 직접적 영향권 밖에서 성장하였고, 다수가 미국과 유럽 등에서 해외 유학을 하고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힌 경험을 갖고 있다. 또한 디자인, 기술, 조직, 관리, 협업의 극대화한 대형사무실의 힘을 맛본 세대이기도 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주춤해지는 동시에 세계 스타 건축가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한 2010년 이후 4세대가 등장하여 건축의 새로운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수적으로도 3세대를 압도하고, 학습과 실무 경험의 폭이 넓고 다양해 졌다. 4세대가 활동하는 건축계는 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환경과 위상은 산업계 안에서의 여전히 취약하다. 국가경제에서 건설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줄어들면서 생존을 위한 경쟁이 보다 치열해졌다.

 

 

한 세대의 주기를 25년 정도를 본다면 네 세대가 교체되는 데는 약 100년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을 네 세대로 나눈 것은 한국 현대건축은 압축성장 과정에서 생물학적 주기보다 빠른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 이후 10년을 주기로 외적 변수에 따라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그 결과 여러 세대가 동시에 활동을 하는 동시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국건축계에는 2세대, 3세대, 4세대가 영향과 자극을 주고받으며 다층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 틀에서 본 현대건축의 시대 구분은 도시 및 건축법과도 맞물려 있다. 1962년에는 도시계획법건축법이 제정되었고, 1966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근대적 도시계획 수법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독립법으로 제정되었다. 그 후 이 법에 의한 사업은 현재 도심부 밖의 공간구조를 형성하였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601970년대는 도시계획과 동의어로 불릴 정도로 주요한 도시계획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서울을 에워싼 수도권의 공간구조를 변혁시킨 택지개발사업이 구획정리사업을 대체한 시점은 한국의 정치의 변곡점인 87체제와 맞물린 2기이다. 1980년대 중후반 도시 외곽에서는 택지개발촉진법(택촉법, 1980년 도입)에 의한 택지개발사업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대체하였고, 도심부와 주변지역은 재개발 재건축사업으로 다변화 되었다. 3기인 2000년대 초반에는 도시관리계획의 수단으로 지구단위계획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건축과 도시를 조율할 수 있게 되었다. 도시계획사업의 변화는 거시적으로는 도시공간구조, 미시적으로는 블록, 가로, 필지의 크기와 형태에 영향을 주었고, 이는 건축물의 용도, 규모, 형태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도시계획사업의 변화와 연계하여 민간건축을 서술하였다.

 

 

집필에 앞서 서울의 건축을 다룬 여러 문헌과 기록을 참조하였고, 1950년대 중반부터 2016년 현재까지 서울에서 지어진 건축물 중에서 역사적, 건축적 중요성이 있다고 평가되었던 400개 건축물을 자료화하고 이를 토대로 글을 썼다. 독자들이 이해를 돕고자 논의된 건축물은 건축물명, 지상/지하층수, 건축가, 건축사사무소명, 준공년도를 본문에 표기하였다.

 

 

2) 민간건축의 정의와 범위: () 상업건축

 

 

서울 현대건축의 시기를 구분했지만 민간건축의 대상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하는 또 다른 문제가 놓여있다. 건축역사는 반복적이고 진부한 유형을 벗어나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한 건축물, 혹은 행위의 주체인 건축가와 건축 집단의 계보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방식은 변화의 흐름을 읽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지만 건축가를 에워싼 당대의 보편적 건축과 도시적 맥락을 놓치는 결점이 있다. 시대를 견인하는 건축가의 작품과 보편적 건물을 중첩시켜 보는 것은 지금까지 서울의 연구에서 미흡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보편적 민간건축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통계상으로 2013년 말 현재 서울에는 약 64만 동의 건축물이 있다. 그 중에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이 소유한 건축물은 뺀 나머지 약 63만동은 개인과 법인 등이 소유하고 있다. 동수로 보면 서울의 건축은 대부분 민간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앞 장에서 다룰 공공건축을 제외하면 양적인 면에서 서울 대부분의 건축물이 민간건축(98.2%) 이라는 것이다. 건물의 수명으로 보면 20년 미만의 건물이 전체의 26.2%, 35년 미만이 68.1%를 차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역사적 건축물이 대부분 소실되고, 새로운 건축물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양적으로는 지난 60년 동안 지어진 민간건축물이 사실상 현재 서울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의 건축물 동수는 주거용(76.4%), 상업용(20.1%), 문교사회용(2.5%), 공업용(0.5%), 기타(0.6%) 순으로 주거와 상업용이 서울의 전체 건물 동수의 96.5%를 차지한다. 연면적의 비율로 보면 주거용(45.7%), 상업(26.1%), 문교사회용(8.5%), 공업용(1.6%) 순이다. 동수와 면적의 비율은 차이가 있지만 서울의 2대 건축물은 주거와 상업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주거용 건축물이란 건축법의 분류상 단독주택, 다중주택, 다가구주택을 포함한 단독주택과 다세대, 연립, 기숙사, 아파트를 포함한 공동주택이다. 상업용은 근린생활, 판매, 업무, 숙박시설 등이다. 문교사회용은 문화집회, 종교, 의료, 교육연구, 노유자, 수련, 운동, 관광휴게시설 등이다.

 

 

자료에도 보듯이 주거용을 제외한 민간건축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 상업용 건축물인데 그 중에서도 근린생활시설(근생)과 업무시설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근린생활시설(근생)이란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로 우리나라 도시에 있는 독특한 유형이다. 건축법에서는 소매점, 음식점, 제과점, 학원, 서점, 이발소, 미용실, 목욕탕, 세탁소, 의원, 치과, 한의원, 당구장, 골프연습장, 단란주점, 금융업소, 사무소, 부동산중개소, 소규모 공연장과 같은 민간건축, 소규모 교회, 성당, 사찰 등의 종교건축 뿐만 아니라 지역자치센터, 파출소, 지구대, 소방서, 우체국, 방송국, 보건소, 공공도서관, 마을회관, 공중화장실과 같은 공공적 성격을 띤 건축물도 포함한다. 대로변이나 주택가 좁은 길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축물을 망라한 것이 근생이다. 근생은 단일 건축 유형이라기보다는 도시 곳곳에 침투해 있는 요소로 한국의 산업구조와 도시의 삶을 투영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근생은 약방의 감초 같은 요소이지만 서울 도시건축사에서 흔히 간과되었다.

 

 

상업용으로 분류된 사무실은 규모에 따라 건축법에서 다르게 분류된다. 동네 상가에 들어가 있는 소규모 사무실은 근생으로 분류되고, 시내 중심가 고층 오피스에 있는 넓은 사무실은 업무 시설로 분류된다. 따라서 근생과 업무시설로 분류된 대규모 사무실을 합하여 서울의 () 상업공간으로 부를 수 있다. 면적상으로는 서울의 약 1/4(26.1%), 동수로는 약 1/5(20.1%)을 차지한다.

 

 

그런데 통계자료상으로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사실은 근생이 단일건축물이 아닌 건축물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근생은 고층건물의 저층부에 자리 잡기도 하고, 주거공간과 복합하여 다양한 변종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러한 복합·변종건축은 공식 통계에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범상업건축은 대한민국의 건축과 도시 관련법과 제도의 틈새에서 생겨난 근생이 다양한 용도 유형과 결합된 건축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범상업건축은 주거건축과 함께 서울을 구성하는 제2의 유형이지만 건축역사, 이론, 비평영역에서 깊이 있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건축가들은 시간이 지나도 남는 자율적,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상업건축은 건축가들의 의도와 달리 경제적 논리에 따라 지어지고 사용되고 소비된다. 형태와 공간의 큰 틀을 유지할 뿐 외피와 내부 공간은 의해 지속적으로 변한다. 게다가 도시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인 서울에서 건축주나 개발자는 대지, 공사비, 임대료와 같은 변수에 철저히 대응하면서, 법에서 정한 최대의 면적과 높이를 확보한 임대공간(rentable space) 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지의 크기, 형상, 비율과 같은 조건과 건폐율, 용적률, 사선제한과 같은 법적 한계,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평면의 형식이 충돌한다. 건축 형태와 공간이 도시의 외적 힘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 도시건축적 특징이 있다.

 

 

반면 상징적, 미학적, 문화적 가치를 구현하려는 건축가 개인의 의지는 공연장, 박물관, 미술관, 기념관과 같은 문화집회, 종교, 교육연구시설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이런 건축 유형은 근생과 사무소 건축보다 주변 환경적 제한이 상대적으로 약한 반면 자율적 설계 여건이 좋은 넓은 대지 혹은 단지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초동의 예술의 전당, 과천 현대미술관, 대학 캠퍼스내의 도서관,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종교건축은 도시지역에 있지만 도시건축적 특성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문화 지향적인 건축과 상업 지향적 건축의 구분은 현대 도시에서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 유명 브랜드의 상점건축이 혁신을 주도하기도 하고, 초고층 오피스건축이 기술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문화 지향적 건축과 상업 지향적 건축의 특징, 대립과 복합의 살펴보는 것은 현대 서울성을 파악하는 접근법이며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 사무, 상업, 주거용도와 이를 복합한 건축물을 주로 다루었다. 이를 위해 1950년대 중반 이후 지어진 건축물 중에서 공인된 기관과 단체에서 수상한 건축물, 서울시의 기록물 및 단행본에서 언급되거나 논의 되었던 건축물, 건축잡지에 게재되었거나 전시에 출품되었던 총 400여 개의 건축물을 선정했다. 필요한 경우 주요한 교육연구, 숙박, 문화집회시설을 비교 대상으로 다루었다. 건축물의 설계와 준공년도, 건축가(), 위치, 유형, 규모, 구조, 특징을 정리하여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분석하였다. 필요한 경우 건축가 및 엔지니어, 건축주, 건축학자, 건축언론인의 인터뷰를 통하여 내용을 보완하여 집필의 자료로 삼았다. 이 글은 개별 건축가의 관점, 태도, 방법론보다는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과 도시계획적 맥락에서 건축물의 특징과 변화에 중점을 두었음을 밝힌다.

 

 

02 서울의 현대건축 1(1950년대 중반 1989)

 

 

1) 1기 초반기: 1950년대 중반 전후복구기 1960년대

 

 

1945년 해방은 맞았지만 건설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 환경과 물리적 토대는 취약했다. 건축계에서는 대한건축학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건축기술단(1945.9), 조선건축기술협회(1947.4)가 태동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사실상 서울의 현대건축은 한국전쟁의 폐허를 복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5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세워진 건축물 중 극소수의 구청사, 경찰서, 학교, 교회, 극장이 기록에 남아있을 뿐 주목할 만한 현존 건축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재건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가시화되었다. 1962년 제정한 건축법과 도시계획법에서 주거, 상업, 공업, 및 녹지지역에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을 규정했고, 건축선, 건폐율, 절대높이 등 규모와 형태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규정이 제도화되었다. 건폐율은 이전의 <조선시가지계획령>보다 강화된 반면 높이를 완화한 결과, 건축면적은 줄고 연면적은 늘어나 층수를 높이는 효과를 주었다. 1970년에는 용적률이 도입되어 높이 제한과 연동되었고, 1973년에는 주차장 및 지하층에 관한 규정도 만들어졌다.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의 최대 건폐율과 용적률도 지정되었다. 예를 들어 주거지역의 건폐율과 용적률은 각각 60%, 300%, 상업지역은 각각 70%, 1000%로 지정되었다. 1988년 용도지역별로 세분화될 때 까지 큰 틀이 유지되어 고도성장기 기간 중 건축의 고층, 고밀화를 법적으로 뒷받침했다.

 

 

서울의 행정구역이 19632배로 늘어나고 시가화 면적도 넓어졌다. 이와 함께 국가주도하에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건설 행정을 펼쳤다. 군사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현옥 시장(재임 19661970) 은 방대한 양의 도로, 지하도, 육교를 건설했다. 뒤를 이은 양택식 시장(재임 19701974), 구자춘 시장(재임 19741978) 재임 기간에도 서울 개조는 계속되었다. 세 명의 시장이 재임했던 1966부터 1979년까지 약 13년간 서울의 인구는 2배 이상 늘어났다. 유입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 중 마포구 서교동과 광진구 화양동지구를 포함한 17개 지구를 구획정리 사업으로 조성했는데 대부분 도심 반경 515km 반경에 있었다.

 

 

대학에서는 전문적 건축교육이 시작되었다. 서울대(1946), 한양대(1949)를 선두로 대학은 건축과를 설립하고 건축인을 양성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이후 재개되어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960년대 후반 들어서 대학 밖에서 건축 직능 활동과 운동도 공식화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4년 뒤인 1957년 한국건축작가협회가 결성되었고, 2년 뒤 한국건축가협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62년에는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공식적 기구가 되었다. 건축가협회는 기술의 영역으로만 간주되어 왔던 건축을 예술과 창작의 영역으로 확장하려고 노력하였다. 건축가협회에 이어 1955년 대한건축사협회의 전신인 구협(舊協)이 발족되었고, 1963년 건축사에 관한 법률인 <건축사법>이 제정되고, 1965년 이 법에 근거해 최초로 건축사시험이 시행되고 법인으로 인가됨으로써 공식 단체가 되었다. 이때부터 법적인 지위를 가진 건축사중심의 사협회와 작가(건축가)’를 표방하는 가협회가 대립하면서 직능계를 양분했다. 한편 건축학계의 전신이었던 조선건축기술단, 조선기술건축협회는 대한건축기술협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54년 대한건축학회(약칭 건축학회)로 발족되었고, 1967년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이로써 삼대 건축 법인체인 건축가협회, 건축사협회, 건축학회가 1967년에 이르러 모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삼 단체는 이후 2002년 새건축사협의회(새건협)가 등장하기 전까지 약 40년 동안 건축계의 세 축을 형성했다.

 

 

국가주도의 건설 사업과 활동에 힘입어 한국전쟁으로 파괴되거나 비워두었던 땅에 건축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도시개발사업이 외곽으로 뻗어나갔지만, 1960년대 주요한 건축물은 여전히 사대문 안 종로 이남에 집중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격자형 가로망으로 정비된 명동 일대와 전후 복구기에 구획정리사업으로 정비된 종로와 명동 사이의 관철동, 을지로3, 종로5, 묵정동, 충무로 일대는 종로 이북에 비해 건물을 신축할 수 있는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았다. 한옥과 저층 건물이 밀집한 종로 이북과 중층 상업업무 건물로 변해가는 종로 이남의 대조적 경관은 서울의 기록 사진에 남아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말까지 기록에 남아있는 민간 건축물로는 학교, 교회, 사무소, 영화관이 많았다. 한국 경제의 토대를 마련하는 걸음마를 시작한 19531인당 국민소득(GNI)67달러였고, 13년이 지난 1966년에도 125달러로 전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건설을 직접 주도한 개인은 극소수에 불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건설에 필요한 경제적 여력이 있는 집단과 주체는 정부기관, 대학교, 종교단체였다. 공공건축, 학교, 교회 이외에는 사무소건축, 은행, 호텔, 백화점, 극장, 병원이 지어졌지만 개인 민간 건축주가 주도한 건축물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경제 사회적 현실에서 시민들이 갈 수 있는 여가 공간으로 영화관이 많았던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960년대 말까지 지어진 학교건축으로는 건국대 도서관(3, 김중업, 1957), 서강대 본관(3, 5, 김중업, 19581960), 서강대 교수회관(3/1, 이희태, 1962), 한양대 도서관(5, 박학재, 1958), 성균관대 문리과대학(3, 김태식, 1959), 단국대 본관(김인석, 1957), 동국대 중앙도서관(4/1, 송민구, 1962), 서울대 공대(현 서울과기대 화공관, 3/1, 이광노/서울대, 19641966), 연세대 학생회관(4/1, 김정수/종합건축, 1968),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본관(4/1, 김수근/공간건축, 19671969)을 꼽을 수 있다. 대부분의 학교건축은 여유 있는 캠퍼스 안에서 수평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배치와 4층 이하의 복도형 평면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도심부의 범상업건물은 체계적인 도시계획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기존의 불규칙한 대지에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서울의 궁궐, 관아, 사대부집, 시전은 온돌과 마루를 결합한 목구조를 기본으로 지었으므로 생활공간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1층이었다. 1934<조선시가지계획령>은 도로에 면한 상점은 강제로 2층 이상으로 짓도록 했지만, 1950년대에 이르러서도 서울은 여전히 단층 건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평도시였다. 당시 중앙청으로 사용했던 최대 규모의 조선총독부가 5층이었고, 승강기가 설치되었던 민간건축물 신세계백화점도 4층 건물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승강기와 코어를 배치한 6층 이상의 건물이 도심부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 지어진 메트로호텔(11, 이희태) 은 최초의 10층 이상 건물의 하나였다.

 

 

1960년대 종로와 명동일대에 들어선 중층 업무건축으로는 그랜드빌딩(7, 나상진, 1959), 오양빌딩(8/1, 김수근, 19621964), 유네스코 회관(13/1, 배기형/구조사, 19591966), 대한교육연합회 회관(9/1, 이광노, 19651966), 한국일보 사옥(13/1, 김수근/공간건축, 19651969), 경향신문사(17, 김수근/공간건축, 19671969), 삼성빌딩(11/2, 이광노/무애건축, 19641966)을 꼽을 수 있다. 은행으로는 한일은행 광교지점(이천승, 김정수/종합건축, 1957), 조흥은행 본점(15/2, 이천승 외, 1966), 호텔로는 메트로호텔(11, 이희태, 1960), 타워호텔(15, 김수근/공간건축, 19621964), 쉐라톤워커힐 힐탑바(김수근/공간건축, 19621964) 가 있다. 백화점으로는 신신백화점(2, 1955, 1983 철거), 영화관으로는 국제극장(3, 이천승, 1956, 1985 철거), 명보극장(6, 김중업, 1957), 대한극장(5/1, 김세연/극동건축설계, 1958), 병원으로 성모병원(가톨릭회관, 7/1, 김정수/종합건축, 19581963)이 세워졌다.

 

 

서울의 저층 범상업건축은 전면도로와 곧바로 연결된 개방된 돌음계단 양측에 임대공간을 배치하는 평면이 일반적이지만, 고층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6층 이상으로 층수가 높아지면서 수직동선이 계단에서 승강기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승강기, 비상계단실, 각종 설비덕트로 구성된 코어가 형성되었다. 전자를 계단형, 후자를 코어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YMCA(7, 김정수/종합건축, 19601968)는 저층 계단형과 코어형의 중간적 유형이라 할 수 있다. YMCA는 체육관, 강당, 교실, 호텔, 사무실을 복합한 지하1, 지상7층으로 상부에는 복도 양측에 임대공간을 배치한 중복도형 평면이다.

 

 

구조와 재료적 측면에서 철근콘크리트조와 시멘트가 대부분이었고, 타일과 같은 매우 제한된 종류의 외장재를 사용하였다. 이점에서 커튼월 공법의 성모병원과 유네스코회관은 당시 기술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제한된 기술력으로 상업업무용 건축의 품질을 높이는 실험도 시작되었다. 김수근은 초기작 오양빌딩에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단순한 직육면체를 분절, 결합하는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김중업은 콘크리트의 조형성을 강조한 서산부인과(5/1, 김중업, 1966)를 남겼다. 김중업은 한국건축계에서 집중적 조명을 받은 건축물의 하나이면서, 1960년대 최고작으로 꼽히는 주한 프랑스대사관(19591962)을 설계했다. 이 건축물은 근대건축과 전통건축을 공간과 형태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5m 경간(徑間, 기둥 간격)을 기본으로 한 5x5 베이(bay, 기둥과 기둥 사이의 구획)의 대사관저, 3x3 베이의 사무동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장방형 평면 분할 방식이다. 김중업은 모듈을 바탕으로 한 건축 원리를 국제보험회사 사옥(1970), 삼일빌딩(1970) 등의 고층건물에도 사용했지만 프랑스대사관에 버금가는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도시건축적 관점에서 김현옥 시장이 추진한 세운상가를 빼 놓을 수 없다. 세운상가는 일제가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만든 소개공지에 세운 20m 폭의 저층상가(14), 아파트(5층 이상), 보행전용 인공데크(3)로 구성된 주상복합건축으로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1km 구간을 가로지른다. 세운상가의 재생을 탐구한 건축가 이종호가 잠시 피곤해서 누워있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마천루로 묘사했듯 김수근이 실현한 최대 규모의 도시건축이었다. 세운상가는 지어진지 50여년을 거치면서 많은 문제와 잠재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현재 서울시는 새로운 개념의 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세운상가의 향방은 서울 도심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세운상가의 건축적 온전한 평가는 그때 내려질 것이다. 세운상가와 함께 낙원상가 아파트(15, 연합건축, 1968)는 도로위에 건물로 공공영역과 민간영역, 주거와 상업이 복합된 1960년대의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이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의 규모와 형태는 대지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시전행랑이 자리였던 종로변의 건축물은 대체적으로 전면 폭이 측면 보다 긴 횡장형(橫長形) 평면이다. 종로2가 북측의 YMCA빌딩, 장안빌딩, 통일빌딩(1960 추정), 덕흥빌딩(1950 추정) 등 일련의 가로변 건물이 좋은 예이다. 반면 일제강점기에 정비가 이루어진 남대문로와 명동 일대의 건축물은 대지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고 장방형에 가깝다. 대지의 규모도 종로 이북보다 상대적으로 크다. 메트로호텔, 오양빌딩, 유네스코회관, 한국전력 별관(9/1, 정인국 강명구, 19621964)은 장방형 혹은 전면 폭보다 깊이가 깊은 종심형(縱深形) 평면이다.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1960년대 도심은 여전히 작고 불규칙, 불균질한 필지와 블록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중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필지 정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2) 1기 중반기 : 1970년대 재개발과 도심부의 변화

 

 

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721976) 이 마무리될 즈음 한국은 연평균 성장률 9.7%를 유지하면서 농업국가에서 신흥공업국가로 바뀌어 갔다. 건설투자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5%를 기록한 1972년 이후 건설 팽창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김현옥 시장의 뒤를 이은 양택식 시장(재임 19701974), 구자춘 시장(재임 19741978)의 재임 시기는 3, 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721981) 과 맞물린 시기로 도시계획과 동의어라고 여겨졌던 구획정리사업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그 결과 서쪽으로는 서교, 성산, 연희, 홍남(홍은, 남가좌), 역촌, 불광 지구, 동쪽으로는 도봉, 창동, 수유, 망우, 면목, 중곡, 장안평, 뚝도, 화양지구에 이르는 넓은 띠 모양의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사업의 절정은 영동, 잠실을 포함한 강남의 탄생이다. 영동지구는 단일 사업 지구로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서울 안의 핵으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토지구획정리 사업은 서울의 도시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서울의 공간적 확장이 진행되었던 1970년대 초반 도심부에서는 31빌딩(31/2, 김중업, 19691970), 국제보험주식회사(25/3, 김중업, 19681970), 천도교수운회관(13/1, 정인국, 19681970) 1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김중업의 삼일빌딩은 사무공간의 기둥 간격을 4x2 베이로 설정하고, 뒤에 독립된 코어를 붙인 유형으로 1960년대의 복도형에서 1970년대 오픈플랜으로 사무소 건축이 바뀌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삼일빌딩은 1970년대 최고층 건물로 청계천 고가와 함께 고도성장기 서울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1976년에는 도시재개발법이 단일법으로 제정되어 도심 재개발 사업을 촉진시켰다. 시청 앞의 플라자호텔(22/3, 다이세이건설, 19761979) 이 재개발사업으로 최초로 세워졌고, 뒤이어 삼성본관(26/4, 박춘명, 19741976) 이 들어섰다. 도심 재개발 사업은 막대한 자금과 조직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시 이를 추진할 수 있었던 주체는 재벌과 같은 자본가뿐이었다. 재개발 사업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는데 현대, 삼성, 대우건설 등 대형건설사가 성장할 발판이 되었다. 대형건설사가 주도했던 건설산업과 건축설계 영역이 밀접한 관련을 맺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점에서 19701980년대의 도심재개발 사업은 서울 도심의 풍경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건축사사무소의 변화도 일어났다. 김정수, 박춘명, 정인국, 이천승, 이광노, 김중업, 김수근 등 1세대의 주자들이 운영했던 소규모사무소는 종합건축, 공간건축, 정림건축, 엄이건축, 일건건축, 서울건축, 영건축등 대형체제로 전환되어 설계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한편 1966년 당시 중앙청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가로를 포함한 4개 간선도로에 미관지구가 지정되었는데 도심 재개발 고층건축물은 대부분은 도로를 따라 띠 모양의 미관지구에 세워졌다. 도심 재개발 사업은 주로 대로변을 중심으로 현실화되었고, 개발 이익이 불확실한 블록 내부는 불규칙한 조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블록의 안과 밖이 극명히 대조적인 경관이 형성되었다. 한때 주춤했던 도심재개발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대문 안에 국한되었던 고층건물은 외곽으로 그 범위가 확산되었다.

 

 

1970년대 지어진 20층 이상의 건축물은 국제보험주식회사(25/3), 삼일빌딩(31/2), 삼성본관(26/4)을 비롯하여 극동빌딩(22/3, 영건축, 19761978), 신라호텔(22/3, 박춘명/다이세이건축, 19741979), 플라자호텔(22/3), 롯데호텔(37/3, 토다건축/엄이건축, 1979) 등 호텔이 대부분이었다. 롯데호텔은 여의도 63빌딩(1985)이 들어설 때 가지 서울에서 최고 층수의 건물이었다.

 

 

한국 현대건축 1세대 선두 주자였던 김수근도 1960년대부터 타워호텔(1964), 한국일보 사옥(1969), 경향신문 사옥(1969) 을 통해 고층건축물의 설계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그의 작업 전반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중저층 건축물이었다. 그의 최고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공간사옥(1971)이 당시 신축이 드물었던 종로 이북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여박물관(1967)에서 왜색시비논쟁을 겪었던 김수근은 공간사옥에서는 단순한 형태와 건축언어, 벽돌과 콘크리트 물성을 통해 전통건축의 공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였다. 1983년에 세워진 옆 건물 현대건설사옥(15, 연면적 73,472) 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규모(5/1, 연면적 360) 였다. 김수근은 1970년대 서울대 문리과 대학이 이전한 자리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3/1, 김수근/공간건축, 19781979), 문예회관(3/1, 김수근, 이범재/공간건축, 19771979), 샘터사(3/2, 김수근/공간건축, 1979)를 설계했는데 이는 동숭동에 새로운 형태의 문화상업공간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서남쪽으로는 서울가든호텔(15/2, 황일인/일건건축, 19761978), 한국증권거래소(15/2, 종합건축/정림건축, 1979)가 세워져 사대문에서 고층건물이 마포로를 따라 여의도로 확산되었다.

 

 

1971년 대한건축사협회가 한국건축전, 1979년 한국건축가협회가 한국건축가협회상(베스트 7), 서울시가 서울시건축상을 제정하였다. 한국건축전은 1994년 한국건축문화대상으로 통합되어, 한국건축가협회상, 서울시건축상과 더불어 3대 건축상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에는 김수근건축상이 제정되었다.

 

 

1978년 최초의 한국건축가협회상은 극동빌딩(22/3, 영건축, 1978), 일신제강사옥(10/2, 정림건축, 19751978), 케미컬 빌딩(13/3, 원도시건축, 1978)에 주어졌고, 1979년에는 한국증권거래소(15/2, 종합건축+정림건축, 1979), 샘터사(3/2, 김수근/공간건축, 1979),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3/1, 김수근/공간건축, 1979)에 돌아갔다. 몇몇 사무소는 소규모 작업실 체제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말 건축설계시장은 공간건축, 정림건축, 원도시건축 등 대형 건축사무소가 주도했다는 것이 수상에서 나타난다. 3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서울의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공공부문의 도시개발과 정비사업과 더불어 민간 부분의 건축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3) 1기 후반기: 1980년대의 고층화와 대형화

 

 

1980년대는 고층 사무소 건축의 양적 팽창기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이어 도심부에서는 교보빌딩(22/3, 시자펠리/엄이건축 19781983), 남대문로의 대한화재해상보험사옥(22/4, 원도시건축, 19771980), 새로나백화점, 남산의 힐튼호텔(23/2, 김종성/서울건축, 1983), 태평로의 프레스센터(20/4, 영건축, 19821985), 코오롱 빌딩, 중앙일보 사옥(베켓/삼우건축, 19831985), 을지로의 삼성화재빌딩, 종로의 제일은행(22/4, 원도시건축/희림건축, 19841997), 공평동의 태화빌딩, 하나로빌딩, 도렴동의 정우빌딩, 변호사회관, 로얄빌딩, 세종빌딩이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건설되었다.

 

 

마포로와 여의도를 잇는 간선도로변과 함께 강남고속터미널(10/1, 완종합건축, 1982)이 준공되고, 지하철 등의 도시 기반이 갖추어지면서 강남의 대로변을 따라 고층사무소가 하나 둘씩 세워지기 시작했다. 건축물이 대형화하면서 설계 시장을 주도한 대형사무소군에 원도시건축, 삼우건축, 간삼건축, 창조건축, 선진엔지니어링 등이 합류했다.

 

 

대한생명 63빌딩(60, SOM/박춘명 19791985), 교보생명빌딩, 동방생명, 중앙일보 사옥, 국제센터빌딩(28/4, CRS/동해건축, 1984), 럭키금성 트윈타워(35/4, SOM/창조건축, 19831987), 스위스그랜드호텔(12/3, WBTL/서울건축, 19841987), 한국종합무역센터(54/2, 니켄세케이/원도시건축+정림건축, 19841988)에서 보듯이 대형사무소와 해외 건축사사무소와의 협업도 일본 중심에서 미국으로 넓혀졌다.

 

 

위에서 언급한 건물 이외에 1980년대 준공된 20층 이상의 건물은 대한화재해상보험(22, 원도시건축, 19771980), 한일은행 본점(24/3, 원도시건축, 19761981), 한국외환은행 본점(24/3, 정림건축, 19771981), 여의도 사학연금회관(20/3, 정림건축, 1982), 서울투자금융사옥(20/4, 선진엔지니어링, 1986), 건설회관(20/2, 선진엔지니어링, 1986), 한국전력공사 본사(22/3, 엄이건축, 1986), 제일은행 본점(22/4, 원도시/희림건축, 19841987), 두산빌딩(20/4, 우일건축, 1987), 장교빌딩(29/4, 한울건축, 1987), 안국화재빌딩(21/6, 삼우건축, 1988), 라마다르네상스 호텔(22/4, 김수근/공간건축, 1988), 롯데월드(33/4, 예건축/기쇼구로가와, 1989) 등이다. 민간기업의 본사보다는 은행, 금융기관, 보험회사 사옥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고층건물 중 63빌딩(높이 249m) 은 미국의 SOM이 기본설계를 하고, 박춘명건축사사무소가 실시설계를, 시공은 신동아건설이 맡았다. 63빌딩은 강당과 은행을 포함한 두 개의 별동과 오피스타워로 구성되었다. 오피스타워는 엘리베이터, 계단, 화장실, 공조실을 포함한 9.9m 폭의 중앙코어와 남북 양측에 사무공간을 배치한 전형적인 중앙코어형 평면이다. 6m를 기본 모듈로 남북 장변은 9베이( 54m), 동서측 단변은 2층에서 14.5m로 시작되어, 22층에서 9.9m, 38층에서 60층까지 7.5m로 줄어든다. 6m 간격의 기둥이 상부로 올라가면서 점차 내부로 이동하며, 이를 감싼 커튼월의 측면은 곡선 형태로 마감되었다. 서울의 건설을 상징하는 건물이 1970년대는 31빌딩이었다면 1980년대는 63빌딩으로 바뀌었다. 최근까지도 서울을 홍보하는 각종 매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관광의 명소였다.

 

 

1980년대의 한국건축가협회상 등 건축상의 대부분도 10층 이상의 고층사무소 건축에 돌아갔다. 조성렬(큐빅디자인)의 힐사이드(2/2, 1983), 선큰빌딩(4/1, 1983), 파인힐방배(4/1, 1983), 오기수(스페이스오)의 바탕골소극장(3/2, 1986), 강석원(그룹가)의 에스모드빌딩(4/2, 강석원/그룹가, 1989) 등 소수의 건축가가 5층 이하의 근린생활시설과 업무시설을 작품화했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개발이 대세였던 당시 고층건물은 경제와 기술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건축계도 이러한 흐름을 따랐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1980년대 양산된 고층건물 중 당시의 건설산업 기술을 최적화했거나 한국적 정체성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을 꼽기가 어렵다. 도시건축의 고층화는 건축사사무소의 디자인 역량보다는 건설사의 시공능력의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1980년대는 기술과 디자인, 건축과 건설을 구분하고 건축의 문화적 위상을 논의하기에는 품질과 품격이 양()에 압도당한 시대였다.

 

 

1980년대에는 근린생활시설(근생)으로 분류된 범상업건축도 도시 전역에 지속적으로 들어졌다. 근생은 법적으로 승강기가 필요 없는 5층 이하로 지하주차장이 없는 유형이 대다수이다. 평면의 한쪽에 도로와 인접한 계단실을 설치하여 상부의 임대공간을 연결시키는 평면이 일반적이다. 소규모의 근생은 상업, 주거, 공업지역에 지을 수 있는 유형으로 아파트를 포함한 주거건축과 고층건물 사이의 중간지대를 채워나갔다. 근생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이지만 소규모의 업무, 교육, 의료, 소매, 여가, 유흥시설을 모은 복합건축으로 간판이 뒤덮인 근생은 가로변의 도시경관을 형성했다. 건설과 건축의 활황기였던 1980년대 근생은 주거 건축과 함께 건축사사무소의 최대의 일감이었다.

 

 

한편 1980년대의 각종 국제행사 유치와 주택 5백만호 건설은 민간 건설 활황의 동력이 되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치를 경기장으로 아시아선수촌 및 기념공원(조성룡, 문정일, 강기효, 1986),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김수근/공간건축, 1984), 자전거경기장(김수근/공간건축, 1986), 역도경기장(김종성/서울건축, 1986), 펜싱경기장(강건희/홍익대, 1986), 체조경기장(류춘수/공간건축, 1986), 실내수영경기장(김수근/공간건축, 1986)이 건축되었다. 서울올림픽 선수기자촌아파트(황일인, 최관영, 김인서, 1988), 유스호스텔(김석철/아키반, 1990), 상징조형물(김중업, 1988)도 서울 스포츠콤플렉스 내에 만들어졌다.

 

 

두 대회는 서울 전역의 숙박 상업, 업무, 문화시설의 건설 붐도 일으켰다. 인터콘티넨탈 호텔(33, 김병현, 강기세, 1988), 라마다르네상스호텔(24, 김수근/공간건축, 1988), 스위스그랜드호텔(WBTL+서울건축, 19841987), 한국종합무역센터, 코엑스몰(니켄세케이/원도시건축/정림건축, 1988), 현대백화점(8, 챨스코버+김병현, 범건축/강기세, 1988), 롯데월드(예건축/기쇼구로가와, 1989)와 같은 대형 민간건축이 건설되었다.

 

 

대규모 복합문화단지인 예술의전당 내에 국립국악당(6/1, 김원/광장건축, 1987) 을 비롯하여 단지 전체를 계획한 김석철(아키반)이 설계한 음악당(4/1, 1988), 서예관(4/1, 1988), 한가람미술관(4/1, 1990), 자료관(4/1, 1990), 서울오페라극장(6/1, 1993)이 세워졌고,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3/1, 김태수/광장건축, 1987)88올림픽을 전후해 준공되었다.

 

 

1980년대는 건축이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기술과 디자인, 건축과 건설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고 건축가들이 주도적으로 도시 문제를 분석하고 혁신을 주도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1세대 선두 주자 김수근과 김중업은 1970년대 중소규모 건축에서 한국건축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고, 명작으로 꼽히는 건축물도 중규모였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 건축의 대형화와 고층화에 걸맞은 보편적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선두주자로서 당시 서울이 당면한 주거문제에 대한 선제적인 이론과 모델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역량과 한국의 사회, 문화적 현실과의 간극이 컸던 것이다. 그들의 제시하지 못한 숙제는 다음 세대의 건축가에게로 넘어 갔다. 1980년대 말 김수근(1986)과 김중업(1989)이 작고하면서 이들의 영향을 받았던 2세대의 건축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홀로서야 하는 환경을 맞았다.

 

 

03 서울의 현대건축 2(19901999)

 

 

1) 건축계의 자각과 건축외적 환경의 변화

 

 

1980년대 후반 한국 건축계에는 두 가지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했다. 첫째, 건축의 역할과 위상이 문화예술 영역과 건설기술 영역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각성하고, 건축을 정치 사회적 공간으로 끌어낸 움직임이었다. 1987년 정점에 올랐던 민주화 운동이 건축계가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건축의 사회적 운동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둘째, 세계 건축의 흐름 속에서 건축가의 정체성을 찾고 홀로서기를 시도했던 건축인의 연대, 학습, 교육운동이었다. 두 갈래의 움직임은 방향과 해법은 달랐지만 1세대 건축인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19876월 항쟁의 열기가 식지 않았던 10월 청년건축인협의회(약칭 청건협) 가 결성되었다. 청건협은 파격적으로 원로 건축인을 배제하고 30대 중반이 주도하고 20대 중반이 동참했다. 청건협은 당시 건축의 문제로 보지 않았던 주거, 도시, 환경 문제를 중심 실천 강령으로 내걸고, 도시빈민 주거 설계를 시도하기도 했다. 청건협의 목표와 실천은 현실성이 약했고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건축 해법은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격동하는 사회 안에서 건축의 좌표점을 묻고 실천을 선언한 최초의 건축외적 운동이었다.

 

 

청건협은 그 후 예술계의 진보 연합체인 민족예술인총연합(약칭 민예총)과 연대를 했다. 청견협은 현장 교육을 시도했던 민족건축인협의회(민건협, 1992), 진보적 건축운동이론을 견지했던 건축운동연구회(건운연, 1990), 한국도시건축연구원(도건연, 1992), 설계·감리 분리, 설계비 덤핑 등 불합리한 관행과 제도를 비판하고 자정 운동을 시도한 건축과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건미준, 1993) 과 같은 다양한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각성과 운동이 시작된 1980년대 말 세계의 주류 건축계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절정을 이루었던 근대주의가 퇴조하고, 탈근대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사조와 양식이 혼재한 시기였다. 미디어의 발달과 전파로 과거에는 직접 접할 수 없었던 이미지가 국내로 유입되어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실무 건축가들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사조와 양식은 건축의 본질적 혁신보다는 표피적 변화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고, 건축의 상업화에 일조를 하였다. 근대적 교육을 받았던 1세대의 건축주자들이 사라진 건축계의 공백을 파고들었다.

 

 

사회 참여 집단과 거리를 두었지만 한국 건축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43그룹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14명의 30, 40대 건축가들이 1990년 결성한 모임, 43그룹은 당시 이론적 배경을 소화하기도 벅찬 각종 사조와 양식이 범람하며 상업주의와 결합하는 것을 혼란스럽게 지켜보았다. 이들은 건축의 뿌리를 찾고 자신의 건축을 세우는 것이 도시빈민주택을 설계하고, 진보세력과 연대하는 것보다 절실하다고 보았다. 43그룹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일본의 메타볼리즘처럼 이념을 공유하고 실천하지도 못했다. 이점에서 건축 운동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건축에서 건축건축가가 누구인가를 묻고 성찰했던 최초의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3그룹은 대형건축사사무소 체제와는 차별화된 아틀리에형 건축가들이 건축계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해외에서 교육과 실무를 경험한 3040대의 건축가들이 참여한 서울건축학교(19952004)는 제도권 밖에서 건축교육의 변화를 이끌었다.

 

 

건축시장이 커짐에 따라 새로운 건축잡지도 창간되었다. 건축 삼단체 대한건축학회, 한국건축가협회, 대한건축사협회가 195060년대부터 각각 기관지인 건축(1955), 건축가(1961), 건축사(1963) 를 발행해 오고 있었다. 이어서 김수근이 건축과 기타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지 공간(1966) 을 발간했다. 1970년대 후반 꾸밈(19771991) 에 이어, 1980년대 들어서 월간지 건축문화(1981), 건축과환경(1984), 플러스(1987), 1990년대에 이상건축(19922005), 건축인POAR(19962006)이 발간되었다. 다른 매체가 작품소개에 무게를 두었다면, 건축인POAR는 척박한 건축비평의 영역을 메웠고, 2008와이드로 이어졌다.

 

 

건축계안의 자성과 실천 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건설산업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에도 양적 성장을 이어갔다. 건설투자가 GDP에 차지하는 비중은 197210.5%에서 198919%로 꾸준히 증가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20%을 넘어섰다. 1992년부터 하락하기 시작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후 1999년에는 16.5%로 낮아졌지만 이 비율은 서구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높았다. 특히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년 동안 인구 8백만 명을 수용하는 주택 2백만호 건설은 건설경기를 정점으로 끌어 올리는 요인이었다. 단기간에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사업 때문에 시멘트와 철근 물량이 부족해 다른 민간 건축의 신축을 규제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건설산업경기를 견인했다. GDP대비 주택투자율은 19651.5%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19908.8%, 19918.9%로 최고 호황을 맞이했다. 1인당 국민소득도 1977년에 1천 달러 대에서 1989년에 5천 달러대, 1995년에 1만 달러대에 진입하여 건축 행위에 국민 개개인들이 참여할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었다.

 

 

2) 저층 중규모 건축의 발견

 

 

1980년대 후반 시작된 건축의 두 갈래 흐름은 1990년대 들어서는 건축의 사회적 운동과 건축의 본질을 찾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건축가들의 교육 참여도 1980년대 내외적 운동의 결과였다. 1950년대부터 대한건축사협회와 한국건축가협회가 대립하게 된 핵심은 법적 자격과 책임을 갖는 건축사와 작품을 추구하는 작가로서의 건축가를 서로 인정하지 않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1990년대에는 직능단체간의 대립의 차원을 넘어 개별 건축가의 정체성과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었다. 대형 건축사사무소와 거리를 둔 아틀리에 체제의 건축가들은 작은 규모의 건축물을 통해서 건축의 본질적 문제를 탐구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형 건설사와 사무소가 다루지 않았던 5층 이하의 저층 중규모 건물이 주된 작업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43그룹과 이에 자극을 받은 건축가들은 탈근대주의를 표피적으로 차용하거나 반복적으로 재생산했던 1980년대의 매너리즘을 탈피한 건축물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회 김수근문화상(1990) 은 앞서 언급한 에스모드 빌딩에게 주어졌는데 이는 1980년대의 대형 고층건축물 일변도에서 중소규모 건축으로 관심이 확장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스모드는 전면과 후면도로에 면하는 임대공간을 분리하고 통로로 연결하면서 중간에 마당을 두어 흔한 근생 평면에서 탈피했다. 서울의 가로변의 근생은 계단과 승강기 등 수직동선이 전면도로에 면해 있는 경우가 많다. 건물의 한쪽 모듈 공간에 돌음계단을 배치하고, 계단참이 만나는 중간층에 화장실은 설치한 근생 평면은 한국의 도시건축의 가장 보편적인 유형이다. 에스모드의 수상은 이러한 기존의 유형을 탈피한 것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중규모 건축으로의 전환은 1991년 삼원빌딩(10/3, 이원교/우도건축, 1990) 을 포함하여 1992년 이후의 김수근건축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1992년 국립국악고(5/1, 민현식 1992), 1993년 수졸당(2/1, 승효상/이로재건축, 1993), 1994년 환기미술관(2/1, 우규승, 1994), 1995년 바른손센터(10/4, 이종호, 양남철/메타건축, 1994), 1996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강의동 및 도서관(3/1, 김영섭/건축문화, 1995), 1997년 경기도립박물관(3/1, 장세양/공간, 1996), 1998년 밀알학교(4/2, 유걸/아이아크, 1997), 1999년 오퍼스콘서트홀(6/2, 손학식/민성진, 1999)의 수상으로 이어지면서 중규모의 주거, 교육, 문화, 업무, 상업건축의 질적 변화를 일으켰다. 1990년대 후반에는 해외에서 유학하거나 실무를 익힌 중견건축가들이 한국건축에서 쓰지 않았던 구조와 재료를 사용하여 새로운 형태의 상업건축을 보여주었다.

 

 

이들 건축물과 도시조직과의 관련성도 주목할 부분이다. 수졸당은 구획정리사업으로 조성한 좁고 긴 땅에 전통건축을 공간구축으로 재해석했다. 이외에도 이문291(5/1, 승효상/이로재건축, 1993), 탑스튜디오(6/2, 최영집/탑건축, 1993), 건축문화사옥(5/2, 김광현/엑토건축, 1997) 역시 전면 폭보다 깊은 종심형 평면의 한쪽에 일자형 계단을 둔 6층 이하의 근생 혹은 업무시설로 기존과는 다른 공간 분화 방식을 제시했다. 일자형 계단을 3층까지 연결한 양재 287.3(5/1, 조성룡/ 우원건축, 19901992)은 강남의 주택가 이면도로에 면한 장방형의 대지의 특성을 살렸다.

 

 

열거한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길에 면하는 계단실을 뒤에 배치함으로써 전이적 공간을 만들고 내부공간을 깊이 방향으로 분화한 공통점이 있다. 도시적 관점에서 중소규모 건축의 발견은 1970년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조성한 땅에서의 실험이라 볼 수 있다. 이 사업은 장방형, 횡장형, 종심형의 필지로 구성된 이면도로의 소블록을 만들어냈다. 서울 도시화 면적의 38.6%을 차지하고 있는 구획정리사업 지구는 아파트 단지와 업무지역 사이에 단독주택, 다가구, 다세대, 근생건축이 밀집한 중간지대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 지대가 중소규모 건축을 실험할 수 있는 텃밭이 되었던 것이다.

 

 

중소규모 건축에 사용하는 재료도 다양화해졌다. 김옥길기념관(2/1, 김인철/아르키움, 1998)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노출콘크리트로 마감했는데 1980년대 일반적이었던 벽돌, 화강석, 알루미늄을 대체하는 신선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샘터화랑(7/1, 최두남, 1998)의 베이스패널도 외장재로 새로운 시도였다. 시화빌딩(8/3, 방철린/인토건축, 1994), 소울볼스(3/1, 방철린, 1994)는 상업공간에 기하학적 질서를 부여하려고 했다. 가가불이(3/1, 이일훈/후리건축, 1995)는 건축가가 도시 일상환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저비용으로 삶의 질을 개선한 사례이다. 태신빌딩(3/1, 함인선/인우건축, 1995), 청학빌딩(5/2, 함인선/인우건축)은 철골구조의 원리를 건축공간과 외피에 실험적으로 도입했다.

 

 

문화적 장소성을 반영한 국제화랑(3/2, 배병길, 1991), 갤러리현대(4/1, 배병길, 1995), 금호미술관(김태수/TSK, 1997), 아트선재센터(3/3/, 김종성/서울건축, 1998) 등 일련의 화랑이 세워지면서 출판문화회관(4/1, 홍순인, 1975)에서 시작하여 경복궁 동측을 따라 미술관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외에도 환기미술관, 두손디자인 플라자(4/1, 손학식, 1992), 가나아트센터(3/1, 장미셀빌모트, 1999) 등 해외 건축가들의 중소규모의 문화, 상업건축 설계 참여도 가시화되었다.

 

 

3) 고층화와 복합화

 

 

1980년대 후반부터 강남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1990년대는 중심이 강남으로 완전히 이동했다. 당시 강남역에서 삼성역까지 길이 약 3.4km의 테헤란로에 준공된 16층 이상의 건물은 33개에 이른다. 20층 이상이 21, 용적률이 900%를 넘는 건물이 15개였다. 당시 건축법 시행령은 16층 이상의 다중이용건축물을 건축심의의 대상으로 지정했다. 따라서 15층은 고층과 중층을 가르는 법적 분기점으로 인식되었다. 테헤란로에는 건축지정선과 건축한계선 규정을 담은 도시설계가 1990년대 초반 도입되어 도시속의 고층건물 회랑이 되었다. 고층 건물은 소유와 임대 전략에 따라 저층부의 공간 구성이 결정된다. 사옥형 건물은 1층을 로비와 전시공간을 배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반면 임대형 건물은 높은 임대료를 부담할 수 있는 은행이 주로 입점하고 지하층에는 식당 및 소매공간이 자리 잡았다. 제한적이었지만 옥외공간의 일부를 공개공지로 지정하여 공공성을 높이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테헤란로변 고층건물 가운데 포스코센타(원정수 지순/간삼건축, 1995)는 저층부의 공공성을 구현한 사례로 꼽힌다. 31(동관)21(서관)을 관통하는 6층 높이의 아트리움은 지하 1층에서 지상 5층에 산재한 판매시설, 은행, 미술관, 문화집회시설을 잇는 동선의 정거장으로 기업의 업무공간과 시민의 열린 공간, 상업공간과 문화공간을 자연스럽게 융합했다.

 

 

고층화와 함께 수직공간의 분화가 일어났다. 고층건축물 설계의 핵심은 기준층 평면과 이를 연결하는 수직 동선에 있다. 중저층 건물에는 돌음계단과 화장실을 측면 혹은 후면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고층건물의 수직 동선 배치는 복합적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개발업자와 건축주가 요구하는 최대의 경제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건축가는 임대에 적정한 기준층 바닥면적, 기둥 간격, 층고, , 승강기, 계단, 화장실, 피난에 필요한 면적, 외벽과의 거리 등 복합적 변수를 고려하여 설계한다. 특히 승강기, 비상계단, 기계, 전기 설비 공간을 집적한 코어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임대료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계획 요소이다.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유형은 코어를 중앙에 두고 2면 혹은 4면에 임대에 적합한 크기의 사무공간을 배치한 중앙코어형이다. 고층사무소 건축의 이런 내적 요소는 대지의 크기, 모양, 비율과 같은 외적 요소와 충돌되는 경우 조율 혹은 변형된다.

 

 

이러한 계획요소는 기준층 평면의 장단변 길이와 비율, 코어의 배치에 집약된다. 일반적으로 철골철근콘크리트조의 고층건물의 기준층을 설계할 때 단위공간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모듈 개념을 사용하며, 모듈을 기본 단위로 베이(기둥과 기둥 사이의 구획)를 구성한다. 전통건축의 칸()과 유사한 개념이다. 예컨대 3.6m 모듈을 두 개 붙이면 7.2m 베이가 된다.

 

 

1980년대 고층건물을 예로 들면 영풍빌딩(16/3, 박춘명/예종합건축, 1982)5x5 베이(10x10 모듈), 서울시교통회관(12/3, 박원태, 1983)5x5 베이(5x5 모듈)로 가로 세로 길이가 같은 정방형으로 중앙코어의 좌우에 사무공간을 배치한 반면, 이보다 여유 있는 대지에 세워진 건설회관(20/2, 선진엔지니어링, 1986) 기준층은 5x3 베이(13x11 모듈)로 중앙에 코어를 두고 네 면에 사무공간을 배치했다. 한국종합무역센터는 좌우측에 독립적인 사무동을 배치한 중앙코어형 좌우대칭의 평면이다. 불규칙한 대지에 최대 용적률을 확보하면서 사선제한과 같은 규정을 반영한 국제센터(1984)는 불규칙한 다각형 평면이다. 남북방향으로 길고 경사가 심한 언주로 변에 세워진 두산빌딩(20/4, 우일건축, 1987) 7x3 베이로 전면 폭이 깊이의 2배인 횡장형으로 후면코어형이다. 국민생명마포사옥(18/5, 창조건축, 1995) 역시 5x3 베이의 횡장형으로 후면에 코어를 두었다.

 

 

층수와 기준층 면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고층건물은 전면도로를 향해 장변을 마주하는 횡장형 평면이 보편적이다. 서울의 대로변 필지는 전면 폭이 좁고 깊은 종심형보다 전면 폭이 깊이 보다 긴 횡장형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대문안, 구획정리사업 지구, 택지개발사업 지구 등 다른 도시계획 수법으로 조성한 도시조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점에서 서울의 고층사무소 건축 평면은 임대시장의 요구와 도시조직의 특성이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호텔은 오피스와 달리 복도를 중심으로 양측에 객실이 배열되는 특성상 깊이가 얕은 평면구조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횡장형과 종심형은 대지의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도로에 인접한 플라자호텔(1979), 인터콘티넨탈호텔(33, 김병현/강기세, 1988), 리츠칼튼서울(17/7, 류춘수/이공건축, 1995), 노보앰배서더호텔(16/6, 김춘웅/상지건축, 1993) 은 중복도 횡장형, 라마다르네상스호텔(1988)은 편복도와 중복도의 3열 조합 횡장형이다. 반면 도로 안쪽에 깊숙이 자리 잡은 하이야트호텔(18/2, 송민구, 1978), 신라호텔(1979), 힐튼호텔(1983), 스위스그랜드호텔(1987)은 객실의 조망에 따라 겹친 일자형, 아치, , 자 등으로 변형되었다.

 

 

상업건축의 고층화와 더불어 프로그램도 복합되었다. 로비공간과 근생으로 구성되었던 저층부의 공간구성도 다양해지고, 상층부도 임대에 적합한 용도가 배치되었다. 시티빌딩(황일인/일건건축, 1994)은 코어를 외주부에 배치하고, 근생(저층부), 영화관(3-6), 사무실(7-10)을 수직으로 적층했다. 시네플러스(12/3, 김낙중/중원건축, 1997)1층에 전면광장과 보행통로를 만들어 외부로 개방하고, 9개의 출입구와 3개의 코어를 두어 저층부의 영화관과 고층부의 상업업무 공간의 동선을 분리했다.

 

 

상층부에 거대한 구멍이 난 종로타워(24, 라파엘비뇰리/삼우건축, 1999)는 공사가 진행되는 중 용적률과 높이제한이 완화(33)되자 설계 변경을 한 결과로 서울에서 벌어지는 규모의 경쟁을 잘 보여준다. 한국경제신문사 사옥(18/6, 유태용/창조건축, 1997)은 새로운 재료인 스크린월과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로 표면을 마감했다. 층수에 따른 유형이 16층 이상(고층)5층 이하(저층)로 뚜렷이 분화되는 가운데 바른손센터(10/4, 이종호/양남철, 1994)는 중층 건물에 혁신을 시도한 사례이다. 임대료가 높은 1층을 과감히 비워내고, 반지하와 반1층을 외부로 개방했다.

 

 

04 서울의 현대건축 3(20002009)

 

서울 올림픽 등 국제행사 유치, 대단위 신도시 개발의 동력에 힘입어 1997년 외환위기로 잠시 주춤했던 건설산업은 짧은 시간에 다시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건설산업을 주도하는 자본과 주체, 도시건축의 정책과 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공공사업에 일괄계약방식(턴키방식), 건설관리(CM)이 도입되면서 건설사업의 단위가 커졌다. 이와 함께 지방자치단체도 대규모 사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민간영역에서도 민간투자유치사업(BTL), 프로젝트파이낸싱 사업(PF)이 도입되고, 부동산 개발업자(시행사)가 등장하여 사업 단위가 커졌다. 한편 1980년 건축법에 도입된 도시설계와 1991년 도시계획법에 도입된 상세계획을 통합한 지구단위계획이 2002년 법제화됨으로써 평면적인 도시계획과 입체적인 건축설계를 조율하는 법적 틀이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196070년대 서울의 도시계획을 주도했던 구획정리사업이 1980년대 후반부터 택지개발사업으로 대체되고 이에 따른 각종 도시 및 건축 사업이 쏟아지면서 2000년대 건축계 내부에서는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연도별 허가면적은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전국의 허가면적은 증가와 감소를 반복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단위 건물의 규모도 비례해서 커졌는데 2008년 서울에서 허가를 받은 건축물의 규모는 전국의 2.2배 수도권의 1.6배로 넘으며 대형화를 주도했다.

 

 

그중에서 아파트 단지는 도시건축 대형화의 큰 요인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난 아파트는 2007년 서울의 민간건축물 전체 연면적의 약 30%를 차지하였다. 반면 근생과 사무소건축은 큰 증가 없이 유지되었다. 그 결과 아파트를 전문으로 하는 대형설계사무소가 등장한 반면, 근생을 주 일감이었던 중소규모 사무소는 줄어들었다. 반면 배출된 건축사의 수는 늘어나 일감 경쟁이 치열해졌다. 1996년 전국의 건축사 총수는 7,942명 이었는데, 1996, 1997년 한해에만 각각 1,048, 1,316명을 선발해 배출자 수에서 최고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이후 배출사수가 1천명대 아래로 줄어들어 2014년 현재 전국의 건축사수는 19,220명이다한편 2008년 금융위기 직전에는 1,000명이 넘는 초대형사무소가 출현했고 인원이 300명이 넘는 상위 10개의 대규모사무소는 초대규모 프로젝트에 의존하는 반면, 대규모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건축사사무소의 비율이 92.7%에 이르러 양극화가 두드러졌다. 서울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건축계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동안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에서 유학과 실무 경험을 익힌 젊은 건축가들이 귀국하면서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2002년 건축학 교육이 전통적인 건축공학과 분리되고 5년제로 전환되면서 교육이 중심이 설계로 옮겨졌다. 외래강사로 설계를 담당했던 건축가들이 대거 제도권 대학으로 이동하면서, 이론과 실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교류가 활발해졌다. 이와 더불어 각종 해외교류 프로그램, 강연회, 국내와 전시회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90년대 주축이었던 2세대와 달리 2000년대 등장한 3세대 건축가들은 유학, 실무, 여행으로 세계의 건축을 직접 체험했다. 조직과 기술력을 축적한 대형사무실의 효율성과 규모 아틀리에의 실험성을 모두 맛본 세대로 한국성, 윤리성과 같은 무거운 숙제에서 보다 주어진 한계를 받아들이며 자유로운 작업을 했고, 이는 2세대 건축가들에게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 2000년대는 2세대와 3세대가 공존, 협업, 자극하는 시대였다.

 

 

1) 두터워진 건축가 층과 건축의 질적 변화

 

 

외환위기 이전에 시작되었던 많은 사업이 중단되면서 2세대 건축가들은 잠시 휴지기를 보냈지만 이 시기는 오히려 이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단련하는 기회가 되었다. 1세대 건축가들이 군사정부가 지원했던 건설산업 정책의 혜택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면, 2세대 건축가들은 구조조정을 거친 한국의 건설산업의 틈새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승효상은 웰컴시티(5/2, 2000, 2000년 김수근건축상)에서 횡방향의 기단부 위에 종방향의 상층 매스를 얹고, 노출콘크리크와 코르텐의 물성을 대비시켰다. 민현식은 신도리코본사 및 서울공장(9/2, 민현식/기오헌, 2000)에서 절제된 기하학적 공간을 도시적 맥락에 구현했다. 우경국은 ACROS(7/2, 우경국/예공건축, 2003)에서 강남의 이면도로에 있는 종심형 대지의 특징을 살려 수직, 수평으로 전개되는 공간구성을 근생건물에 담았다. 이성관의 데이콤사옥(20/7, 2000)은 정제된 매스와 정교한 모듈의 입면을 만들어 해외건축사무소가 주도하는 시장에서 국내건축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미스 반데로의 건축을 한국적 맥락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김종성은 SK서린빌딩(36/7, 2000)에서 철골구조의 정제된 디테일을 보여주었다.

 

 

가장 주목할 변화는 1990년대 말 40대 전후였던 3세대 건축가들이 전면에 등장한 점이다. 신원동 주택(2/1, 조남호/솔토건축, 1999), 서울시청 어린이집(4/1, 서혜림/힘마건축, 2000), 카이스갤러리(4/1, 김종규/MARU, 2001 김수근건축상), 현암사사옥(5/1, 권문성/아틀리에17, 2001), 토포하우스(3/1, 정진국, 2005), 쌈지길(4/2, 최문규/가아건축, 2005), 에코넷센터(6/1, 유석연, 2005), 이진아기념도서관(4/1, 한형우/스페이스연, 2005), 가회헌(2/2, 황두진, 2006), 숭인교회(4/2, 이충기, 2006), 크링(장윤규, 신창훈/운생동, 2007), 이화외고 비전관(4, 김승회/경영위치, 2007), 테티스(5/2, 곽희수/이뎀건축, 2008), 서울석유사옥(7/1, 임재용/OCA, 2009), 마시멜로우(4/3, 김찬중, 홍택/시스템랩, 2009), 솔라즈빌딩(6, 안우성/온고당, 2009), 도화공영주차장 복합청사(4, 윤승현/인터커드, 2012), 블루스퀘어(4/4, 박제유/제이유건축, 2008~2011), 그리고 농촌 및 도시 집짓기(주대관/문화도시연구소) 등 공간, 프로그램, 구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실험과 실천을 하였다.

 

 

부티크모나코(27/5, 용적률 866.5%, 조민석/매스스터디스, 2009)는 아틀리에 건축가들이 거리를 두었던 부동산개발 프로젝트이다. 용적률, 최고높이와 같은 법, 임대공간의 경제논리를 디자인의 동인으로 삼고 다양한 주거 유닛을 만들어낸 사례다. 콘크리트 외벽에 원형의 구멍이 나 있는 모양이 벌집처럼 생겨서 별명이 붙은 어번하이브(17/4, 용적률 798.7%, 김인철/아르키움, 2008) 역시 건폐율, 용적률, 표피면적 등과 같은 법의 틈새를 디자인과 구조적 해법의 단서로 삼았다. 두 건축물은 고층건축물 영역뿐만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서 혁신을 찾는 새로운 설계 방법론을 제시했다. 코리아나 아트센터(7/3, 정기용/기용건축, 2003), 제포빌딩(4/3, 인의식/연미건축, 2004), 신사동에이타워(9/3, 이상림/공간건축, 2007), 경농사옥(15/3, 인의식/연미건축, 2012~15) 등 고착화되었던 중층 업무상업 건축 내부의 공간구조적 변화도 일어났다.

 

 

1980년대 후반부터 건설한 수도권의 1기 신도시에 주민이 정착함으로써 건축 작품의 범위도 서울의 행정구역을 벗어나 확산되었다. 택지개발사업으로 조성한 서울안의 최초의 신도시 목동신시가지에도 아파트뿐만 아니라 대형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목동의 신시가지를 관통하는 상업지역에 세워진 목동하이페리온(69, 높이 252m, 용적률 817.6%, 현대건설, 2003) 2012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높은 타워로 현대백화점과 함께 연면적 386,000m2의 초대형 복합체가 되었다.

 

 

출판문화계가 주도하고 건축계가 참여한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일명 파주출판문화도시)의 실현은 새로운 도시건축의 실험장으로 건축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민현식, 승효상, 김종규, 김영준, 플로리안 베이겔이 도시설계의 원칙과 지침을 수립하였고, 40여명의 건축가가 초대되어 2000년대 초부터 건축물을 세웠다. 아시아출판정보문화센터(4/1, 김병윤, 안희상/시명건축, 2004 김수근건축상), 웅진빅씽크빅사옥(2/2, 김인철/정승권, 2007 김수근건축상), 한길갤러리(김준성/핸드건축, 2008 김수근건축상), 캐슴(3/1, 김헌/어싸일럼건축, 2007) 이 결실을 보았다. 가까이 일산 신도시의 허유재병원(8/3, 김영준, 2005 김수근건축상)의 내향적 건축공간도 주목할 만하다.

 

 

출판문화도시와 함께 김준성, 김종규가 도시설계 지침을 만든 헤이리아트밸리에서도 카메라타 스튜디오(3, 조병수, 2005), MOA+시경당(우경국/예공건축, 2005), 정한숙기념관(최문규, 2005), 딸기가 좋아(조민석/최문규), 픽셀하우스(조민석) 등이 주목을 받았다.

 

 

건축을 개발과 신축을 등식으로 보았던 통념에서 벗어난 재생 프로젝트도 나왔다. 선유도공원(조성룡/정영선, 2003 김수근건축상)은 조경계과 건축계가 협업하여 정수장을 재활용하여 만든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으로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서울 북촌은 한옥보존정책으로 살아남았다. 서울시는 북촌으로 불리는 가회동과 삼청동을 1990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하고 신축을 억제하는 정책을 세웠으나, 1995년 규제가 풀리는 틈을 타 창덕궁 서쪽에 4층 다세대주택이 집단적으로 신축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시는 한옥을 보수하는 비용을 지원하고, 철거 위기의 한옥은 직접 매입하는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폈다. 전통 공방이 들어서고, 한옥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북촌 전체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 후 한옥 보존 및 관리 정책은 2005년 북촌 지구단위계획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 두가헌, 학고재,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최욱/원오원스튜디오), 선음재, 소안재(조정구/구가건축, 2007, 2010), 가회동성당(우대성, 조성기, 김형종/오퍼스건축, 2013) 등 아틀리에 건축가들이 복원하거나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시형 한옥과 전통건축은 북촌의 성격을 바꾸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북촌은 경복궁 서측의 서촌과 함께 도심고급화 현상(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되었다.

 

 

2000년대에는 해외건축가들의 작품도 다양화 되었다. ASEM타워(29/6, SOM/+창조+희림건축, 2001), 교보타워(마리오보타/창조건축, 2003), 삼성타운(KPF/삼우건축, 2007) 등 고층사무소부터, 삼성미술관 리움(4/3, 장누벨, 렘쿨하스, 마리오보타/삼우건축, 2005), 동대문디자인플라자(자하하디드/삼우건축 2007), 이화여대 ECC(1/6, 도미니크페로/범건축, 2010) 등 문화, 교육시설, 그리고 컨테이너로 제작한 가설건축물 플래툰쿤스트할레(4, Urbantainer Grat Architects/우일건축/그레고르 호하이젤, 2009)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어졌다.

 

 

2) 건축의 대형화, 고층화, 복합화

 

 

건축계 안에서 여러 세대의 공존하면서 질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건설산업계에는 건축의 대형화, 고층화, 복합화가 계속되었다. 개별 건축주가 주축이었던 이전과 달리 거대 공적자본과 금융자본이 뒷받침되어 개발 규모가 커졌다. 이는 통계상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2001년 이후 건설경기의 부침에 따라 소규모 민간건축 시장은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는 반면, 공공부문이 떠받치는 문교사회용 건축은 꾸준히 유지되었다. 한편 2007년 당시 100250명의 대규모사무소와 250명 이상의 초대규모사무소는 10m2이상의 주거시설을 가장 많이 설계한 반면, 50명 미만의 소규모사무소는 2,000m2미만의 주거, 상업, 공업시설에 의존하여 사무실이 다루는 프로젝트 규모가 양극화되었다.

 

 

민간건축에서는 대형-고층-복합화의 대표적 사례로 타워팰리스 1(66/5, 삼우건축, 2002)를 꼽을 수 있다. 외환위기 직후 주상복합의 주거 비율을 90%까지 완화하자 근생, 판매, 업무시설을 복합하여 연면적 458,000m², 용적률 920%에 육박하는 초대형 복합건물로 건설했다. 타워팰리스 1, 2 3차를 합하면 3,070세대의 고층단지로 거대한 수직 부촌이 형성되었다. 강남 중심부에는 피엔폴루스(21/지하4, 김상길/에이텍건축, 2008) 등 최고급 주상복합 오피스텔도 등장했다. 녹산교회(18/3, 최동규/서인건축, 2005) 등 대형복합 교회, 자이갤러리(4, 민성진/SKM, 2007) 등 대형 임시건축물도 서울의 독특한 도시경관을 형성하는 건축유형이다.

 

 

공공부문에서는 영등포 민자역사(9/5, 신국범/서한건축, 1991)가 복합민자역사의 문을 열었다. 2000년대 들어서 서울 민자역사(5/2, 95,000m² 김우성/아키플랜, 2004)도 판매-업무시설을 엮은 거대건축이 되었다. 용산 민자역사(272,000m², 2004), 왕십리 민자역사(99,000m², 2009), 청량리 민자역사(178,000m², 2010), 창동 민자역사(87,000m²) 등 역세권 사업은 계속되었다. 금융위기 이전인 2007년 서울시 행정구역 안에 있는 민자역사를 모두 합하면 1백만를 넘었다. 판매시설이 50%이라고 가정하면 용산구나 도봉구 내에 있는 근생 총량의 절반에 육박한다.

 

 

전체면적 119m², 지하몰 12의 삼성동 코엑스타운과 연면적 40의 강남고속터미널 센트럴시티도 초대형 상업건축의 반열에 올랐다. 공공건축의 민자화와 상업건축의 거대화는 자영업자의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의 산업생태계와 도시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경제사회적 비평이 필요한 주제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6/1, 류춘수/정림건축, 2002)은 해외설계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 건축가가 주도한 대규모 운동, 위락, 문화, 판매, 근생의 복합건축이다. 상부스탠드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하부스탠드는 철골구조, 지붕은 트러스/인장 구조를 사용하여 완성도 높은 구조미와 기하학을 구현했다. 한편 인천국제공항(KBHJW 컨소시엄/김정식, 2002) 은 한국 건축계의 창작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운영과 관리의 측면에서 10년 동안 최고의 공항으로 평가받는 등 국제화를 견인했다.

 

 

05 서울의 현대건축 4(20102015년 현재)

 

 

1) 금융위기 이후 개발 개념의 변화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고 난후 2011년부터 2015년까지 4년 연속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대로 세계 평균을 밑돌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금융자본이 주도했던 대형 개발사업도 이에 따라 급격히 감소했다. 건설경기의 퇴조가 서울에 미친 파급력은 용산역세권 개발사업의 좌초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사업은 철도정비창 부지와 서부이촌동 일대 566,800의 부지에 국제업무, 상업, 주거, 문화시설을 건립하여 국제 비즈니스 중심을 만드는 야심찬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삼성물산과 국민연금 등 컨소시엄은 최고 높이 152(높이, 620m) 랜드마크 빌딩을 포함하여 172의 업무, 66의 상업, 46의 주거, 33의 문화 등 총 317의 초대형 지구를 기획했다. 여기에 2,200세대의 아파트단지도 들어설 예정이었다. 총 사업비가 31조로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이며 4대강 사업을 능가하는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다고 홍보했지만 사업비를 조달하지 못하고 결국 좌초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상징적인 사건은 지난 수십 년간 성공의 등식으로 여겨오던 재개발 사업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일이다. 201110월 취임한 박원순시장은 전임 시장이 주도했던 뉴타운사업을 포함 서울시 전역의 정비사업 실태조사를 하고 주민의 의견을 수렴했다. 201111월 기준 서울시 전체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 구역은 1,300여개로, 서울시 행정구역의 10.2%, 시가화 지역의 17%에 해당하는 면적(61.6km2)이었다. 이중 434개 구역은 완료되었고, 610개는 실태조사 대상, 866개는 갈등 조정대상으로 분류되었다. 159개 구역의 실태조사를 한 결과 144개 구역 소유자의 30% 이상이 정비구역 해제를 요청했다. 서울시는 이를 받아들여 사업을 중단키로 했다. 주민이 개발 사업을 포기한 것은 개발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0년대 말까지만 해도 재개발, 재건축은 정치인이 내세웠던 확실한 선거 공약 중의 하나였다.

 

 

2013년 약칭 <도시재생특별법>이 제정되어 지난 50년간의 화두였던 개발재생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이 법의 골자는 쇠퇴하는 도시를 경제적·사회적·물리적·환경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위해 공공의 역할과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뉴타운 해제 지역을 비롯한 기존 정비구역의 출구 전략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도시재생특별법에 따라 서울형 도시재생 선도지역'이 선정되고, 시범사업이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대규모 개발에서 점진적 재생으로 전환 기조는 다른 법과 사업에서도 반영되었다. 2012<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약칭 도정법) 을 개정하면서 뉴타운 사업의 대안적 성격으로 민관협력형 정비사업인 주거환경관리사업, 블록단위의 소규모 민간 개발사업인 가로주택정비사업이 기존의 정비사업 항목에 추가되었다. 또한 건축법에 건축협정제도특별가로구역이 채택되어 개별 필지보다 큰 소단위 사업을 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었다.

 

 

이보다 앞서 2009년 주택법을 개정하면서 국민주택규모(85m² 이하), 300세대 미만의 도시형생활주택으로 이름이 붙은 새로운 유형의 공동주택이 가능해졌다. 이는 단지형 다세대, 단지형 연립주택이 곳곳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건설산업의 침체와 법과 제도의 변화는 건축가들의 작업방식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도시속의 주거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신축이 불가능했다고 여겨졌던 최소 필지에 주택을 짓은 사례가 생겨났다. 대지 면적이 90m², 60m² 이하이며 4m의 좁은 골목에 면한 필지에 주차장이 없는 이른바 협소주택의 등장이다. 이는 용적률이 70% 내외인 현재의 땅의 가치를 용적률 150%의 가치로 끌어올리면서, 신도시나 전원주택이 갖지 못한 도심의 독립적 주거공간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현실화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성세대 건축가들이 다루지 않았던 틈새시장으로 신진건축가의 새로운 일감으로 떠올랐다.

 

 

2) 4세대 건축가의 등장과 동시대성

 

 

2010년대 건축계는 2, 3, 4세대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건축의 흐름 속에서 작업하는 동시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2010년 이후 건설산업의 침체와 함께 가장 늦게 현실에 발을 디딘 4세대 건축가들은 생존을 위해서 선배 세대와는 다른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 하는 환경을 맞게 되었다. 1세대 선배로부터 독립하여 1990년대부터 홀로서기에 성공한 2세대, 해외유학과 교류의 경험을 직접 경험한 후 쉽게 소위 메이저리그에 올랐던 3세대는 건설경기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기회가 있었다. 반면 4세대의 건축가들은 대형사무소에서 건축설계를 경험할 기회도 희박해졌고, ‘메이저리그에 속한 건축가들 아래서 수련하는 것이 홀로서기를 담보하지도 않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몇 년간의 수습을 한 후 과감히 독립하는 젊은 건축가들이 생겨났다.

 

 

2008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새건축사협의회, 한국건축가협회, 한국여성건축가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젊은 건축가상의 면면은 4세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8(김동진/로디자인, 김정주, 윤웅원/제공건축, 신승수/오즈건축, 유석연/경간도시디자인, 임도균+조준호/루연), 2009(유현준, 조한/한디자인, 임지택/이애오건축, 최성희+로랑 페레이라/최페레이라, 김현진/SPLK), 2010(이기용/KLNB, 이정훈/JOHO, 임영환, 김선현/D·LIM, 전병욱, 강진구/JNK, 정기정/유오에스), 2011(김창균/UTTA건축, 박인수/파크이즈, 장영철+전숙희/WISE건축), 2012(이소진/아틀리에리옹, 권형표, 김순주/바우건축, 이동준/스톡커리건축), 2013(신혜원/로칼디자인, 김주경+최교식/오우재건축, 조장희+원유민+안현희/JY아키텍츠), 2014(김수영/숨비건축, 곽상준+이소정/OBBA, 김민석+박현진/노션 아키텍처), 2015(강예린+이재원+이치훈/SOA, 이은경/EMA건축, 조진만/조진만 아키텍츠), 2016(김현석/준아키텍츠, 신민재+안기현/에이앤엘스튜디오, 이승택+임미정/STPMJ 아키텍쳐)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수상자들의 연령이 낮아지고, 이들이 설계한 건축물의 규모, 용도, 구법, 공간도 다양해지고 있다.

 

 

뚜렷한 이론적 연대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들의 작업은 대규모 사업자본, 건설사, 대형설계사무소가 주도하는 아파트, 대형건축물과, 문화자본과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건축가들이 주도하는 작품 건축사이의 중간지대에서 치열한 생존 전략을 쓰고 있다. 이전에는 작품 영역으로 보지 않았던 다가구, 다세대건축, 근린생활시설 설계 시장에 뛰어 들어 시장의 요구조건을 충족하면서 디자인의 좁은 틈새를 공략하고 있다. 2, 3세대의 일부 건축가들도 적극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중규모 시장은 1970년대 이후 서울의 일반주거지역에 세워졌던 단독주택이 2000년대 후반 주택과 근생을 결합한 중규모의 주상복합으로 변화한 것과 맞물려 있다. 이는 법과 제도의 변천, 임대와 분양 시장의 변화, 금리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5년 단독주택을 구분 소유하고 분양할 수 있는 다세대주택, 1990년 임대 목적의 다가구주택이 합법화되고, 1999년 다가구 주택에서 다세대 주택으로의 용도 변경이 가능해지면서 1층 단독주택은 다가구, 다세대 주택으로 지속적으로 변했다. 2000년대 들어서서 다세대 주택의 건축 규정이 완화되자 1층 필로티, 지상 5, 지하 1층의 다세대 주택이 등장하였다. 이 유형과 근생과 결합한 소규모 주상복합은 서울의 독특한 도시건축으로 젊은 건축가들의 새로운 틈새시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이후 국내외 전시회도 양적, 질적으로 다변화되었다. 2007년 독일건축박물관에서 열린 <한국현대건축전 : Megacity Network>은 유럽 4개 도시를 순회하고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무리되었다. 그 후속전으로 2010년 상해전(韓國現代建築新潮), 2011년에는 한일교류 요코하마전(한국건축의 새로운 지평), 2012년 한일교류 서울전, 2013년 파리전, 2014년 런던전(Out of the Ordinary), 2015년에는 싱가포르전(Fragments of a New Housing Language: Contemporary Urban Housing in Korea)이 열렸다.

 

 

한편 전 세계 건축의 의제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 한국이 참여한 것은 1996(커미셔너 강석원, Myungdong Cathedral and National Museum of Korea Projects)부터였다. 그 후 2000(커미셔너 김석철, Seoul: City of Ethics, City of Nature), 2002(커미셔너 김종성, Reality to Next Society), 2004(커미셔너 정기용, City of the Bang), 2006(커미셔너 조성룡, Perman n Stant), 2008(커미셔너 승효상, Critical Topic: Pajubookcity as Culturescape), 2010(커미셔너 권문성, RE.PLACING: Documentary of Changing Metropolis Seoul), 2012(커미셔너 김병윤, Walk in Architecture)까지 서울의 도시와 건축은 핵심 주제중의 하나였다. 2014(커미셔너 조민석, Crow’s Eye View : The Korean Peninsula)에는 한국관이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분단 한국의 문제가 전 세계적 의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16(커미셔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감독 김성홍)에는 한국사회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용적률을 향한 욕망을 사회경제적, 일상적, 창의적 관점에서 조명한 전시, 용적률 게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 The FAR (Floor Area Ratio) Game: Constraints Sparking Creativity’을 내세워 국내외 언론과 평론의 주목을 받았다.

 

 

참고 문헌

 

99건축문화의해 조직위원회, 전국건축문화자산, 서울편 제1, 1999.

 

김성홍, 길모퉁이 건축 : 건설신화를 넘어서는 희망의 중간건축, 현암사, 2011.

 

김성홍, 도시 건축의 새로운 상상력, 현암사, 2009.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 1967~1980.

 

박길룡, 한국 현대건축 평전, 2015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건축사, 1999.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 600년사5·6, 1983·1996

 

서울특별시, 서울 도시와 건축, 2000.

 

서울특별시, 서울건축가이드북, 2013.

 

서울특별시, 서울건축문화지도, 2013.

 

손정목, 서울 도시 계획 이야기, 1~5, 2003.

 

안창모, 한국 현대건축 50, 1996

 

한국건축가협회, 서울의 건축, 1995.

 

한국건축가협회, 한국건축가협회 50, 2008.

 

한국건축가협회, 한국건축개념사전, 동녘, 2013.

 

김성홍, 서울 강남 주거지역의 상업화와 건축의 변화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지 계획계28-3, 2012.

 

김성홍, 한국의 건축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새건축사협의회, 《건축과 사회, 25, 2013, 10~27쪽

 

이지연, 김성홍 서울 화양동 주거지역의 도시조직과 상업화에 따른 건축물의 변화〉 《대한건축학회지 계획계29-1, 2013.

 

Kim, Sung Hong, Changes in Urban Planning Policies and Urban Morphologies in Seoul, 1960s to 2000s, Architectural Research,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a Vol. 15, No. 3, 2013.

 

Kim, Sung Hong, Housing Site Development and a Shift in Urban Architecture at Mok-dong in Seoul, The Journal of Seoul Studies Vol. 59, 2015.

 

 

 

*각주는 편집상, 사진은 저작권상 게시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