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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지루함(boredom)의 역설, aoa의 건축 (2017-11-24)

지루함(boredom)의 역설, aoa의 건축

 

10회 젊은 건축가상 2017, 시공문화사, 2017, pp.15-29.

 

각종 행사로 한국건축계가 분주했던 9월 첫 토요일 오후 문화역 서울284’를 찾았다. <2017년 올해 젊은건축가상>전시가 막을 내리기 몇 시간 전이었다. 경성역사 귀빈실 분위기를 재현한 네모난 방에 올해의 젊은건축가 강제용과 전종우(IDÉEAA), 국형걸(HG-Architecture), 서재원과 이의행(aoa architects)의 작업이 마지막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의도였는지 우연한 결과였는지, 세 건축사무소의 개성과 색깔이 전시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유클리드기하학과 파라메트릭의 경계를 넘나드는 국형걸의 작업과, 공공성을 실천하고 있는 이데아의 크고 작은 공공건축물 사이에, 에이오에이는 5개의 무채색 모형을 테이블위에 얹어 놓았다. 중성적이고 무덤덤한 표정의 모형은 앞에 놓여 있는 작은 사진엽서들이 없었다면 미완성의 집처럼 보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현상설계 시장에서 당선되기 위해서 상투적인 개념어와 수사(修辭), 근거가 모호한 현란한 형태가 필수요소로 여겨진 지 오래다. 그런데 작품성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의 작업에서도 곡선, 사선, 뒤틀림과 같은 애매한 타협과 절충의 건축어휘들은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이와 비교하면 에이오에이의 건축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이며 기하학적 원형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의 건축을 압축한다면 바로 지루함(boredom)’이 자아내는 힘이다. 평범함 속의 반복과 질서가 갖고 있는 역설적 힘이다.

 

두 건축가를 알게 된 계기는 설계안이나 준공된 건축물이 아니라 2014년 출간한 서재원의 <건축의 메타게임> 이란 책이었다. 가는 선으로 그린 장방형 평면, 작은 글씨의 제목, 그리고 많은 여백으로 표지가 구성되었다. 광화문 미대사관 리노베이션 학생 프로젝트와 튜터 서재원의 글, 비평, 인터뷰를 엮은 내용이었다. 12명 학생의 작품 설명, 입면도, 평면도, 단면도, 배치도, 모형사진이 반복되는 편집 방식이었다. 선 굵기만으로 표현한 동일한 축척의 도면들은 미니멀하면서도 매우 정교했다. 튜터의 강한 의지와 지도가 없었다면 학생들이 그릴 수 없는 도면들이었다. 특히 음영을 넣은 입면도는 이탈리아 귀세뻬떼라니(Giuseppe Terragni 1904-1943)와 신합리주의자(Neo-Rationalism)들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반면 1/20~1/50 축척의 실내모형은 실제 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을 떠올리게 했다. 미니멀리즘과 극사실주의가 묘하게 결합된 이 비범한 책은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1년 반 뒤 20163월 서울시립대 1학년 설계스튜디오에서 서재원을 만났다. 4명의 튜터가 프로그램, 일정, 크리틱을 공유하는 수업이라 매주 만났지만 정작 튜터들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해 가을 젊은건축가 포럼에서 서재원의 발표를 듣게 되었다. 책에서 받았던 강력한 인상을 작업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에이오에이 건축의 힘의 원천이 어디인가를 되새기는 기회였다.

 

망원동 쌓은집(2015)’ 서재원과 이의행이 호흡을 맞춘 첫 작품이며, 두 사람의 관점, 태도, 방법론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중 검은 배경에서 찍은 흰색 모형사진은 설계 의도와 과정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기둥, 바닥, 지붕, 벽 일부를 표현한 구조 모형이다. 슬래브, 기둥, 계단만으로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르 꼬르뷔지에의 도미노하우스 다이어그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모형은 실제 구조의 일부만 드러내고 있거나, 구조가 아닌 부분도 표현하고 있다. 1층 필로티의 가느다란 기둥이 상부의 벽과 지붕을 떠받치는 가분수 모양의 이 모형은 그들의 말처럼 '유사구조(pseudo-structure)'이다. 구조 얼개보다는 공간의 수직 적층, 수평 분화, 가벼운 하부와 무거운 상부의 대립, 그리고 전체를 지배하는 대칭적 원리와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다.

 

불규칙적이고 불균질한 서울의 도시조직위에 이처럼 엄격한 정형성을 구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칭 형태와 공간구조는 건축 내적(endogenous)’ 논리가 대지 조건, 법적 제약, 건축주의 요구 등 건축 외적(exogenous)’ 제약을 압도한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면과 수치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쌓은집의 용적률은 서울의 2종 일반주거지역의 법적한도인 200%에 근접한 199.53%, 건폐율은 현실적으로 최대인 54.11%, 가능한 면적과 부피를 모두 채웠다. 한국 건축가들이 소규모 주택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기인 용적률 찾기전략과 전술이 이 집에서도 예외 없이 구사되었다. 상부로 갈수록 정북방향 사선제한으로 매스가 뒤로 물러나는 성산동 고양이집 (2017)에서 이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게다가 1층 필로티, 2층 근린생활 임대공간, 3-4층 주거 임대공간, 5층 주인집을 적층한 수직적 공간구성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조성한 소규모 필지와 부동산 임대시장에 대응하는 최적의 수직 프로파일(vertical profile)이다.

 

절대성과 상황성, 선험(아프리오리, a priori)과 경험(아포스테리오리, a posteriori)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쌓은집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대립 요소는 망원동 주변 집들 사이에 놓인 다른 모형 사진에서 잘 드러난다. 철거한 단독주택 박공지붕을 새집 지붕에 얹은 것처럼 쌓은집의 요소와 재료는 주변 풍경의 일부로 녹아든다. 그 결과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는 불규칙하고 혼성적인 가로경관에서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 집을 처음 찾았을 때 반대쪽 인도에서도 쉽게 식별하지 못했다. 콘크리트 슬래브 위에 쌓은 벽돌 마감과 경사지붕은 주택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테두리보 위에 벽돌을 쌓은 연와조 구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하 원리에 바탕을 둔 보편성과 서울의 중산층 집들에서 나타나는 평범함이 용해되어 있다. 에이오에이의 건축에서 느끼는 낯섦과 낯익음, 평범함과 생경함, 매끈함과 둔탁함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서재원과 이의행 이러한 대립항을 건축물 곳곳에 복선으로 깔아 놓았다고 말한다.

 

망원동 쌓은집이 중심에 코어가 있는 5층 도시주택인 반면, 음성 디귿집(2016)은 중심을 비워 마당으로 만든 단층 농촌주택이다. 하지만 전체 매스를 구성하고, 이를 잘게 나누는 기하학적 원리는 같다. 팔라디오가 비첸차 언덕위에 완벽한 중심성의 전원주택 빌라 로톤다(Villa Rotonda)를 설계했던 같은 시기에, 비첸차 도심에 중심을 비워 중정을 만든 도시저택 팔라초 발마라나(Palazzo Valmarana)를 설계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음성 디귿집은 마당을 중심에 두고 주변의 방을 모듈에 따라 나누는 사대부집의 구성 원리와도 같다. 만약 조선시대 수직적 구법을 발전시켰다면 추사고택을 지었던 조선 최고의 목수들은 한양에 팔라초와 같은 중층 중정형 집을 지었지 않았을까? 역사에 가정은 존재하지 않지만 조선시대부터 이러한 점진적 수직화 과정을 실험해 올 수 있었다면 한국 현대 건축가들은 르 꼬르뷔지에의 유니떼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에 버금가는 다양한 아파트의 유형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디귿집의 평면 기본 틀은 한옥의 안채를 닮았지만 구조, 재료, 마당의 비례에서 나오는 공간감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속하지 않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항공사진위에 배치도를 겹친 그림, 여름, 가을, 겨울의 들판 풍경과 원경에서 바라다 보이는 집을 합성한 이미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영화의 스틸 컷과 같다. 도시 속에서 발산하지 못했던 미학이 들녘을 배경으로 굴뚝 연기처럼 몽글몽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원천은 여전히 절제되고 정제된 기하 질서위에 심어둔 가벼운 냉소와 익살이다.

 

이처럼 절제된 건축언어를 자아가 강한 두 건축가가 공유하기란 쉽지 않다. 건축가는 거시적 도시에서 미시적 인테리어까지 다루며 각종 기술을 조율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건축설계는 형태, 공간, 구축을 통합(integrate)하는 고도의 지적 과정이다. 여러 개를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완결된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다수결로 좋은 디자인을 뽑을 수 없고, 이것저것을 무난하게 버무려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없다. “디자인은 민주주의가 아니다(Design is not a democracy)”는 말이 이를 압축한다. 글처럼 디자인도 저자(著者)가 있다. 어떻게 서재원과 이의행은 이처럼 강한 건축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진아건축에서 직장 선후배로 처음 만났다. 이듬해 이의행은 스위스 취리히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 사무실에서 2012년까지 일했다. 그동안 서재원은 진아건축에 남아 총 11년간의 실무 경험을 다지면서 2009년부터 단국대에서 스튜디오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013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aoa를 열었고, 같은 해 이의행이 단국대 강의에 합류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2년간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만큼 길지도 않았고, 확고한 태도를 세우기에는 이른 시기여서 파트너십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길을 걸었던 6 동안 상대를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공유점을 찾았을 것이다.

 

내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이의행이 건축의 기본에 충실한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고 실무를 경험했던 동안 서재원은 국내에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한국적 현실을 깊게 통찰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좋아하는 건축가중 한명으로 아돌프 로스(Adolf Loos) 발레리오 올지아티(Valerio Olgiati)를 각각 꼽았다. 90년의 시대적 간극을 두고 있지만 두 건축가는 단순한 기하학의 원리에 기초를 두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복잡성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재원과 이의행은 이 부분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같은 학년을 맡은 적이 없었지만 서재원이 지도한 3학년의 공동주택,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와 이의행이 지도한 1,2학년의 패턴과 구조’, ‘요소와 구조’, 미술관, 주택, 도서관 프로젝트에서 공유지대가 드러난다.

 

모형에 재료와 물성을 입히고 사진을 촬영하면서 내부공간을 탐구하는 서재원과 이의행의 설계 방법론은 서울시립대 학생의 건축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해주었고, 1학년 설계 스튜디오의 주요 프로젝트가 되었다. 기하와 구조, 논리와 감성, 추상과 구상을 연동하는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자기발견 장치(heuristic device)’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독일의 역사학자 파울 프랑클(Paul Frankl, 1868~1962)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브라만테와 같은 천재 건축가의 걸작들은 번득이는 순발력과 즉흥적 기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적 도형의 무수한 반복과 변형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들의 독창성과 창의성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파울 프랑클은 기존 건축역사관을 탈피하여 공간 모폴로지의 눈으로 고전건축을 분석한 최초의 학자였다. 독일어로 쓰인 난해하고 방대한 그의 글을 당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대표작 <건축역사의 원리 (1913)>의 영어번역판이 나온 것은 55년이 지난 후였다.

 

다른 사람들이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의 양식으로 서양건축의 변화과정을 세세하게 나누었던 반면 그는 피렌체 성당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 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를 연속된 시기로 간주했다. 심지어 르네상스라는 이름대신 후기중세건축이라 불렀다. 그의 눈으로 보면 르네상스에서 19세기까지의 서양건축은 획기적 변화가 없는 내부공간 분화의 연속된 과정이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교회의 차이를 더하기(addition)’에서 나누기(division)’의 변화 과정으로 본 프랑클의 혜안을 양식의 틀에 갇힌 역사학자와 건축가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클의 영향을 받았던 기디온은 19세기 이후 유럽의 건축을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상호 관입하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 개념의 탄생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후 수많은 사조와 양식이 뜨고 지면서 건축에서의 기하학적 원리와 질서는 낡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하지만 프랑클이 던졌던 단순하고 명료한 틀은 지금 한국 건축가들의 테이블위에서, 컴퓨터 앞에서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핵심이다. 모더니즘은 유럽만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 현대건축의 토대가 되었다. 지난 60년간의 한국 현대건축 역사는 모더니즘을 학습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제 그 방법은 수동적 이식(transplantation)을 넘어서야 한. 모더니즘의 기본원리를 소화하되 우리 도시와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사회문화적 관성(inertia)을 찾아내야 한다.

 

앞으로 에이오에이의 향방에 기대와 희망을 갖는 이유다. 젊은건축가상 공모를 위해 제출했던 4채의 집 - 망원동 쌓은집 (2015), 음성 디귿집(2016), 성산동 고양이집(2017), 서귀포 쌓은집(2017) -을 통해 서재원과 이의행은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적 현실을 담은 건축을 표방했고, 창조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범람하고 있는 표피적 건축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녹록치 않는 건축시장의 틈새에서 이에 공감하는 건축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지금까지의 건축에 심었던 풍자와 익살이 의미론(semantics)을 넘어 구축적으로 심화되기를 희망한다. 벤츄리의 복합성과 대립성은 힘이 잔뜩 들어갔던 모더니즘의 허를 찌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 이론적 버팀목이 되지는 못했다. 건축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형태론과 의미론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더니즘은 낡은 과거를 전복하고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지만 철, 콘크리트, 유리의 기술 혁신이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시대가 대면한 현실에서 형태의 완결성에 버금가는 기술적, 미학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한국건축 최대의 숙제다. 여전히 건축을 압도하는 건설 주도의 산업,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 건축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을 탓할 수만은 없다. 이러한 1차 전선을 넘어 건축 본질의 2차 전선으로 나아가야 한다.

 

서재원과 이의행은 서로에게 훌륭한 조력자이며 비판자가 될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자질과 경험을 갖추고 있다. 곁눈질 하지 않고, 지루함을 견디면서, 본질(fundamentals)과 정수(essentials)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에게 <젊은건축가상>이 새로운 동력과 응원이 되었으면 한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