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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路의 商業建築과 空間論理 (2002.04)

鐘路의 商業建築과 空間論理
종로; 시간, 장소, 사람, 20세기 서울변천사 연구 II, (서울학연구총서 13)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2002.4, pp.221-264.

1. 서론

세계 주요도시의 가장 활력 있는 장소를 상업건축이 형성하듯이 서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건국 이래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던 종로는 일제강점기, 전후복구기, 산업화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상업 중심지로서의 옛 명성은 상실했지만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 거리로 남아있다. 상업건축은 정치이념이나 고급문화의 상징보다는 도시의 집합적 가치관과 일상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건축유형이다. 종로에는 역사적 상업건축은 사라졌지만 수세기 전의 상업가로의 구조와 조직이 여전히 남아있다. 최근 역사학계와 지리학계에서는 도시경제활동, 정치이념, 도시공간구조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집합적 상징체계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건축역사에서 상업건축은 궁궐, 사찰, 주택과는 달리 가장 소홀히 다루어져 왔던 분야이다. 樣式的, 象徵的, 技術的 측면에 중점을 둔 역사관, 지배계층 중심의 사상과 가치관, 우주론적 관점이나 자연관으로 보는 건축도시이론 등이 주류를 이루어 왔던 연구경향도 있지만 한편으로 상업건축에 관한 문헌이나 도면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건축역사에서 상업건축은 도시맥락과 유리된 경제적, 기술적, 법률적 영역으로 간과되어 왔다. 종로는 60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변해오다가 최근에는 전면 재개발의 압력에 놓여있다. 고증과 기록의 필요성을 넘어 종로의 상업건축은 한국 현대건축과 도시의 관계를 이해하는 전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연구는 종로의 상업건축에 대한 다음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유럽이나 북미의 도시와 달리 종로변은 왜 밀도 높은 상업건축이 도시경관을 지배하고 있을까? 종로변의 상업건축과 그 뒤편의 모습은 왜 극적 대비를 이루는 것일까? 종로의 상업건축에서 나타나는 다양함 속에는 집합적 空間論理가 있는가? 종로의 특수성을 서울의 다른 상업가로를 이해하는 보편적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연구에서는 이를 두 가지 연구질문으로 압축하였다. 첫째, 종로에서 길-상업공간-주거공간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업화, 도시화, 고밀화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둘째, 종로에서 발견되는 상업건축유형 (architectural morphology)은 도시유형(urban morphology)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연구질문을 통하여 현대 종로의 시각적 경관에 내재하는 공간논리를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건축양식, 구조, 재료, 색상 등의 가시적 형태나 물성에 내재하는 공간관계와 그 사회적 기능을 이 연구에서는 空間論理(spatial logic)라고 정의하였고 그 이론적 토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건축은 시각과 촉각의 대상 이전에 사회영역이라는 전제이다. 건축을 樣式 혹은 기술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건축의 기본적 목적인 삶, 거주, 사용 등을 간과하는 오류에 빠진다. 인간은 건축형태를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움직이고 경험하고 다른 인간들과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간다. 공간을 만드는 것은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점에서 공간과 사회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둘째, 건축과 도시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창작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구성원의 집합적 산물이라는 전제이다. 건축과 도시의 궁극적 목적은 공간을 만들고 목적에 필요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므로 건축과 도시는 계획된 것이든 자연발생적인 것이든 공간논리를 가진다. 예를 들어 시장이나 상점에서 상인, 고객, 행인과의 관계,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 소유자와 임대자의 관계, 상인과 또 다른 상인과의 관계 등이 형성되는데 이를 안과 밖, 앞과 뒤, 아래와 위, 중심과 주변, 대칭성과 비대칭성과 같은 位相學的(topological) 공간관계로 추상화할 수 있다. 시각이나 촉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추상적 공간논리가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것이 건축형태이다. 도시공간에서도 이점이 적용된다. 점진적 변화를 거친 도시와 건축일수록 공간논리가 강하고 오래 지속된다. 셋째, 건축은 도시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서로 무수한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라는 점이다. 사람의 육안과 직관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까지 도시와 건축공간은 그물처럼 연결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건축공간연구는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 혹은 전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금까지 건축역사연구가 양식적, 상징적, 기술적 측면을 중시한 것은 바로 건축을 도시와는 독립적인 대상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나로 연결된 도시공간을 都市空間構造(urban spatial structure)라 정의하고 가로의 폭, 넓이, 필지의 크기, 비례와 같은 기하학적 특성을 지칭하는 都市組織(urban fabric)과 구별하기로 한다. 또한 구체적 형태, 양식을 지칭하는 形態的類型(typology)과 구별하기 위해 構造的類型(morphology)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 연구는 종로에서 전개되어온 변화의 동인과 결과를 기록, 고증하기보다는 기존의 역사연구를 바탕으로 공간논리를 추론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연대기적 서술 대신에 세 시점을 비교하는 공시적 연구방법을 택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1999년 현재를 분기점으로 삼았고, 시간적 간격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기술하였다. 이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현재 종로의 공간논리를 이해하려는 것이므로 세 분기점 중 1999년 현재를 주된 시간적 범위로 삼았다. 1910년대는 500여 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시대의 서울이 일본에 의한 일방적 도시계획에 의해 급변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분기점으로 다루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京城府 地籍原圖는 현재 발견된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지도라는 점에서도 1910년대를 이 연구에서는 중요한 시기로 간주하였다. 15세기초는 서울의 상업공간이 도시계획에 의해 최초로 형성된 시기이므로 이 연구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이 연구에서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경제성장기에 관한 부분은 기존 문헌과 자료를 인용한 2차 문헌연구임을 밝힌다. 대상지역의 비교문화적 고찰을 위하여 유럽도시의 상업화와 중국도시의 상업가로에 관한 기존 연구를 참조하였다. 중국의 경우는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형성된 상업공간의 사례를 비교하기 위하여, 유럽의 경우는 상업공간과 상인의 거주공간과의 관계를 비교하기 위하여 각각 인용하였다. 먼저 각종지도, 실측, 답사를 통하여 대상지역의 도시건축지도를 작성하였고, 공간구조에 중점을 둔 거시적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길, 도시조직, 상업건축의 관계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미시적 분석으로 진행하였다. 이 연구에서 사용된 이론과 분석의 틀은 부분적으로 ‘空間構文論’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구체적 방법론은 제한된 지면에 기술할 수 없으므로 본문에서는 개념과 용어를 간략하게 다루었다. 연구 대상지역은 조선시대 시전행랑이 들어섰고 그 이후 핵심 상업지역의 위치를 누려왔던 종로2가와 주변지역이다. 이 지역의 크기는 종로2가변이 380미터, 우정국로변이 540미터로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종로, 우정국로, 인사동길, 율곡로를 경계로 하는 종로2가동, 인사동, 공평동, 견지동, 관훈동의 일부이다. 종로 이북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은 가로확장과 1950, 1960년대 도시재개발로 옛 모습이 사라진 남쪽 관철동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오랜 도시조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2. 面과 線의 二重構造

사람들이 종로에 간다고 할 때 어디를 지칭하며 듣는 사람은 어디를 연상하게 될까? 南으로는 을지로를 맞대고 北으로는 북한산의 비봉을 만나는 면적 24km2, 인구 20여만 명의 행정단위 종로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일까? 西로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東으로는 동대문에 이르는 폭 약40m, 길이 2.7km의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일까? 종로2가 남쪽의 서점, 학원, 카페 그리고 북측 뒤편의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길의 음식점, 주점을 간다는 것일까? 아니면 종로5가에 늘어선 약국을 찾아간다는 것일까?

종로는 서울의 중심을 동서로 가르는 가장 오래된 길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종로는 행정구역상으로 광화문 사거리에서 보신각까지 1가, 탑골공원까지 2가, 종묘앞까지 3가, 광장시장 앞까지 4가, 동대문 종합시장 전까지 5가, 동대문까지 6가로 나누어진다. 종로1가에서는 북측에 한 켜의 필지, 2가에서는 남북 양측에 각각 한 켜의 필지를 포함한다. 종로3가에서 남측이 넓어져서 5가에 이르러서는 청계천로까지 확장되고 6가에서는 북측이 넓어진다 (그림 1). 서쪽 끝에서는 폭은 일정하지 않지만 인접한 洞과 확연히 다른 線形의 행정구역의 모습을 보이다가 동쪽 끝에 이르러서는 面形으로 바뀌는 모습이다. 종로와 丁字로 만나는 廟洞 역시 서측에 한 켜의 필지, 동측에 두 켜의 필지를 포함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종로가 이처럼 街路와 행정구역 區를 동시에 지칭하게 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개혁으로 개편된 漢城府, 中署의 坊, 契, 洞을 일제가 1914년 일본식으로 개정하면서 鐘路1丁目, 2丁目, 3丁目, 4丁目, 5丁目, 6丁目을 신설하였고 1943년 鐘路區를 다시 신설하면서 길을 지칭하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길과 필지를 포함하는 街區와 지역을 동시에 지칭하는 의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해방후인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 개칭을 하면서 丁目을 街로 바꾸었지만 일제가 구획한 선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즉 조선시대에 면으로 구획된 도시 위에 일제가 이식한 선의 구조가 중첩된 ‘前線後面’의 행정구역이 현재까지 유지된 것이다.

종로의 상업활동 분포도 이러한 면과 선의 이중구조를 보인다. 종로1, 2가는 상점, 음식점, 사무소, 학원, 병원, 유흥시설 등이 혼합된 복합상업시설이 주종을 이루고, 3가에서 4가까지는 보석상, 의류점, 5가에서 동대문까지는 약국 및 약재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선을 따라 상업기능이 군집을 이루지만 종로의 전면은 낮의 상업활동 공간이다. 반면 배면은 여관, 음식점, 주점 등 밤의 상업활동이 지배한다. 건물의 높이는 남북방향의 길과 만나는 사거리에서는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는 패턴을 보인다. 한편 간격없이 늘어선 건축물의 저층부는 서에서 동에 이르기까지 연속적 가로경관을 이룬다. 그러나 전면의 건물 뒤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좁고 불규칙한 골목, 건물 배면의 비상계단, 상업용도로 바뀐 저층건물들로 급격한 전이를 이룬다. 반면 1950년대 이후 도심재개발로 도시조직이 바뀐 종로 이남은 북측과는 달리 높이가 비교적 고른 격자형 도시구조이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종로2가동, 인사동, 공평동에서도 역시 전면의 3-5층 중층 건물과 배면의 여러 겹의 1층 건물이 대조를 보이고 있다. 대로를 따라 중층규모의 상업건축이 전면에 나서고 여러 겹의 저층건물이 배면에 자리잡은 모습은 전면과 배면 모두가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는 유럽과 북미의 도시경관과는 대조된다. 이러한 도시경관에 내재하는 공간논리는 무엇일까?

현존하는 종로2가 북측변 건물은 전후복구 사업이 시작된 1950년대 전후 대부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YMCA회관, 장안빌딩, 종로타워를 제외하면 종로1가에서 종묘 앞 구간의 종로와 피맛길 사이의 건축물은 깊이가 불과 20m를 넘지 못하는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건물의 전면 폭이 깊이보다 긴 ‘廣短型평면’의 상업건축이 길과 평행으로 늘어선 모습은 구미의 격자형 도시의 폭이 좁고, 깊이가 긴 ‘細長型평면’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모두 전면도로를 향해 있어서 상업건축으로서의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넓은 면적을 필요로 하거나 분화가 필요한 용도에는 부적합한 단점을 지닌다 (그림 2). 자본주의 도시에서 길에 면한 상업건축의 전면 폭은 면적만큼 중요하다. 유럽이나 북미의 격자형 도시에서는 가로를 잘게 나누어 최대한 많은 상업공간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교토나 오사카 도심 상업지역의 경우에도 도로 양편이 폭이 좁고 긴 필지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장형 평면과 도시조직과의 관계는 유럽 및 북유럽만의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미의 교외 쇼핑몰에서도 매장 임대료의 산출기준은 내부 중앙통로에 면한 전면 폭과 면적이다. 좁고 깊은 평면, 즉 세장형 평면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점에서 종로의 상업건축은 자본주의 관점에서 비효율적인 평면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된 가로변에 면할 수 있는 상업건축의 입면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효율적인 도시조직과 건축유형의 바탕에는 어떠한 공간논리가 내재하는 것일까?

현재 종로주변의 도시구조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격자형 街區와 대비되는 불규칙한 길과 필지이다 (그림 3). 격자형 도시에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여러 가지이지만 최단 거리를 택하였을 경우 길이는 어느 경로나 같게된다. 또한 기하학적 도로구성 때문에 길을 잃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종로의 경우에도 종로타워에서 인사동 사거리까지 가는 경로는 여러 가지 이지만 경로에 따라서 걷는 길이는 달라진다. 막다른 길을 피하면 골목길이 오히려 큰길보다 단거리 일수도 있다. 그러나 골목에 들어서면 도시구조의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空間構文論은 도시공간을 거미줄처럼 연결된 하나의 조직체로 간주하고 한 공간이 전체조직에서 차지하는 위상학적 위치를 ‘位相度’라는 수치로 환산하는데 위상도가 높은 공간을 ‘位相重心空間’, 위상도가 낮은 공간을 ‘位相隔離空間’이라 부른다. 위상중심공간은 어떤 지역의 위상학적 중심부에, 위상격리공간은 위상학적 주변에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 중심이나 주변은 기하학적인 중심이나 주변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 중심공간이 어떤 지역의 주변에, 반대로 격리공간이 그 지역의 중심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위상도는 인식론적 중심, 주변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공간 자체의 특성이다. 공간과 공간이 만나서 생긴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수치는 공간과 사람들의 밀도와 일관된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다. 지난 15년간 공간구문론 연구에서는 위상도가 높은 공간은 용도나 기능에 관계없이 더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한다는 일관된 결과가 나타났다. 또한 위상중심공간은 街路依存的 상업공간이 밀집한 지역과, 위상격리공간은 고급 주택지 혹은 건물내의 私的성격이 강한 장소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였다. 도시나 건축공간 내에서 위상도가 높은 공간일수록 무목적의 대면접촉이 많이 일어날 수 있고, 반대로 위상도가 낮은 공간은 도시로부터 격리, 분절, 소외되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석의 첫 단계로 1914년 地籍原圖를 바탕으로 종로, 우정국로, 인사동길로 둘러싸인 대상지역의 모든 公路를 線으로 치환한 뒤 컴퓨터에 입력하여 길 하나 하나가 갖고 있는 위상도를 환산하였다 (그림 4). 그 결과 중 다음 두 가지 점에 주목하였다. 첫째, 종로, 우정국로, 인사동길은 위치 상으로는 주변도로이지만 위상중심공간에 포함되었고 반면 내부의 막다른 좁은 길은 위상격리공간에 속하였다. 위상도의 전체평균도 유럽이나 북미의 격자형 도시나 불규칙한 도시보다도 낮았다. 반면 부분과 전체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수치인 位相認識度는 유럽도시나 북미도시와 비슷하거나 높았다. 가장 깊숙이 자리잡은 인사동 194번지와 관훈동 198번지는 종로와 인사동길에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대로와 곧바로 연결되어 가장 격리된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막다른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밀집된 작은 필지들이 위상학적으로 길로부터 격리된 공간으로 나타났다. 도시 속의 섬처럼 고립된 인사동 221-4번지 한옥은 좋은 예이다. 1914년 지도를 토대로 조선시대의 모습을 복원할 수는 없으나 종로, 인사동길, 우정국로로 에워싸인 내부는 조선시대에는 주택이 밀집된 곳이었다. 소형 필지의 수십 배 크기의 대형필지는 대로에서 보이지 않지만 집과 대로를 연결하는 곧은 길 때문에 위상학적으로 깊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둘째, 1914년 공간구조 분석에서 주목할 부분은 남쪽 종로로 몰려있는 위상중심공간의 형태이다. 위상도가 높은 소로가 종로에서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내부로 침투하고 있고 비록 끊어지기는 하였지만 일부의 피맛길이 중심공간에 포함되고 있다. 피맛길은 폭이 불과 3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종로의 이면도로로 현재 식당과 주점 등이 밀집해 있다. 대로와 인접한 상업공간은 위상학적 중심에 자리잡은 반면 불규칙한 내부의 주택지는 위상학적 주변에 놓인 것이 1914년의 종로의 도시구조인 것이다. 이점에서 1914년 일제가 종로의 행정구역을 前線後面의 모습으로 개편한 것은 임의적 조처였다기보다는 이미 내재한 도시공간구조의 특징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前線後面의 도시공간구조는 조선후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도시화과정에서 생긴 결과인가? 아니면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내재하는 공간논리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인가?

3. 조선시대 길과 商業建築

종로2가의 북측변 상업건축이 서 있는 자리는 한양천도와 함께 건설된 조선 초의 市廛이 있었던 곳이다. 시전은 신라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관허상점으로 궁궐, 관아, 양반 사대부들의 사치품이나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어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시전이 건설되기 이전에도 서울에는 종로거리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의 상업이 발달하고 있었으나 조선왕조가 상업활동을 직접 관장하게 되는 것은 시전을 건설한 이후부터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 초에 건설된 시전은 종로1가(雲從街)에서 종묘앞(樓門), 창덕궁 앞에서 종로3가(貞善坊 洞口)까지, 종각(鍾樓)에서 광교(廣通橋)까지이다. 그러나 이때 건설된 행랑 중 창덕궁에서 종로3가까지 설치된 것들은 宿直所, 창고 등의 관청업무용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상업용 행랑은 종로1가-종묘구간, 종각-광교구간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시전은 도시의 근간을 이루는 동서방향의 긴 대로와 남북방향의 짧은 길이 만나는 丁字形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연구에 주요한 단서가 되는 사실은 상업건축과 용도가 다른 관청건물이 같은 유형으로 건설되었던 점이다. 당시 시전행랑 중에서도 가장 번창한 곳은 두 길의 접점인 종각부근이었을 것이다. 이 접점 부근은 시전에서 취급하는 물품 중에서도 미곡잡물이나 우마류와 구별되는 왕실이나 지배계층의 고급 수요품을 거래하던 大市가 위치하였던 곳이다. 시전을 완성한 정부는 이주정책에 따라 개경에 자리잡은 富商大賈나 개경상인을 이주시킴으로써 수도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의 상업 및 상인을 관장, 통제하였다. 시전은 도성외부에 인구가 밀집되면서 17세기 후반이후 도성밖에 형성되는 시장과 더불어 서울의 상업중심지로의 역할을 계속하게된다. 18세기 들어서 종로의 시전은 거래하는 품목에 변화가 있긴 하였지만 여전히 궁궐과 고급계층의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기록된다.

시전의 건설배경, 시기, 칸수에 관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건물형태와 공간구성, 배면의 주택지와의 관계 등에 관한 기록과 도면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건축적 논의는 문헌과 지도를 통한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조선후기에는 시전에 대한 정부 통제가 약해지면서 종로변에는 무허가 점포가 들어섰고 여러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행랑도 많이 파괴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조선초에 형성된 도시조직이 여러 전란과 사회변동에 따라 합필 혹은 변화되었을 것으로 보여 시전행랑의 모습을 복원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현재 가로와 필지의 모습을 추적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京城府 地籍原圖와 1929년의 京城府 地形明細圖이다. 특히 1914년 지적원도는 일제의 도시계획이 실행되기 이전에 제작된 것이어서 구한말이전의 서울의 도시구조 및 조직을 추론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임진왜란이후 황폐해졌던 서울이 17세기 중반 효종 때부터 영조 30년(1750년)경까지 100년간에 걸쳐 복구되어 1760년경에는 초기의 모습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1910년대 종로변 필지가 당시 복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전행랑을 반영하고 있다는 가설을 확인해주는 사실이다. 반면 전해오는 조선시대의 지도의 대부분은 자연지형, 궁궐, 종묘, 주요도로 만을 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치수와 축척 또한 부정확하여 도시조직을 파악하는 자료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도시와 건축을 보는 당시 사람들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서울의 도시공간에 내재하는 논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1770년에 제작된 漢陽圖(新編標題纂圖寰瀛誌)를 보면 산과 물 그리고 성과 성문이 도시의 윤곽을 이루는 가장 큰 요소로 그려지고 있다. 도시 속에서는 담으로 에워싸인 경복궁, 창덕궁, 경덕궁과 도성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르는 행랑이 확연히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권력의 최고 중심지였던 궁궐이 경계가 분명한 폐쇄공간으로 그려진 반면 상업공간인 행랑은 선형의 개방공간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이외의 주택지와 가로는 생략되고 육조의 건물은 그림대신 글로 위치를 표현하고 있다 (그림 5). 한양이 건설된 지 350여년이 지난 18세기 후반의 지도이지만 궁궐과 행랑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물리적 요소라는 점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서울은 왕권이 지배하는 정치도시였다.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도시에서 모든 물리적 요소는 어떤 형태로는 권력이 위치하는 중심공간과 관계를 맺는다. 서울의 중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종로는 물리적으로 도시의 뼈대를 이룰 뿐 아니라 가장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설치된 것도 바로 종로가 서울의 일상의 중심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궁궐 밖의 공간이 바로 종로인 점을 감안하면 종로는 궁궐과 더불어 한양의 일상이 펼쳐지는 중추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왕이 궁궐밖 행차를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는 공간으로 종로는 정치권력과 民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한편 유교이념이 지배하는 조선시대에 종로는 위계상 가장 아래에 속하는 상업행위가 이루어 졌던 곳이다. 고려와 달리 성리학에 바탕을 두었던 조선의 통치이념은 농업을 생업의 근본으로 삼았고 상업활동으로 인한 財利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최대한 억제하는 抑末政策을 유지하였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지배층의 재화 축적은 왕권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았으므로 상업활동을 국가가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현재의 서울의 상업가로를 이해하기 위한 관문이 되는 것이 바로 도시의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공간과 천시하면서도 통제, 관리해야하는 상업공간을 線形街路에 통합한 점이다.

서울의 도성계획원리는 주나라부터 이어 내려오는 중국의 도시규범에 토대를 두고 있으나 자연지형, 방위개념, 풍수사상 등에 따라 변형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가설이다. 중국 및 극동 아시아 도시계획의 전형으로 알려져 온 중국 周代의 周禮考工記와 서울의 도시구조를 비교했을 때 나타나는 가장 현저한 차이는 도시를 나누는 방법과 상업공간의 배치방식이다. 고공기의 핵심은 도성을 9里 四方의 正方形으로 정하고 중앙에 왕궁, 좌에 왕의 조상을 위한 宗廟, 우측에 地神을 위한 社稷, 전면에 관아, 배면에 시장을 두는 이른바 前朝後市, 左廟右社의 원칙이다. 서울에서는 좌묘우사의 원칙은 지켜졌지만 경복궁이 백악산 자락에 자리잡음으로써 전조후시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평지 도시에도 전조후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있어 자연지형과 우주론적 관점만으로 이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국도시 상업공간 변천에 관한 연구는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唐의 長安(西安)의 경우 왕궁이 남북축의 북쪽 끝에 놓여 좌묘우사의 원칙은 지켜졌으나, 시장은 東市와 西市로 나누어 전조후시의 원칙은 지키지 않았다. 장안의 시장은 배치원칙 뿐만 아니라 구성형태에서도 서울의 시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장안의 시장이 동서 양측의 구획된 街區내에 놓인 반면 서울의 시전은 길을 따라 배치된 점이다. 唐은 상업을 궁궐이나 상류층의 물품을 조달하는 기능 이상으로 보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상업을 천대시하고 이를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반면 宋의 開封은 상점이 제한된 상업가구를 벗어나 모든 가로에 등장한다. 농업의 조세에 의존하였던 당대와는 달리 송대에는 상업에서 보다 많은 조세를 거두기 시작했고, 지배계층도 상업활동의 이윤에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통제형 시장은 面을 중심으로, 자유형 시장은 線으로 형성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강력한 왕권을 기반 위에 건설된 서울의 시전이 長安의 東市나 西市같이 제한되고 통제된 街區形 시장대신 어떤 이유에서 가로를 따라 형성되었을까? 왕궁의 위치가 고공기의 원칙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풍수지리나 방어의 목적으로 鎭山에 의지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市場이 面이 아닌 線으로 형성된 것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面-市場과 線-商業街路의 관계는 유럽 도시사에서도 발견된다. 시장과 상점의 다른 점은 상업활동의 주체, 상업활동의 시간, 도시구조와의 관계이다. 지붕이 없는 외부공간에서 시작되었던 시장의 원시적 형태는 동서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시장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장소였다. 교역의 주체는 물품의 생산자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는 소비자이기도 하였다. 시장은 권력의 중심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통제가 가능하도록 제한된 구역에 놓여 있었다. 상인들은 정기적으로 열렸던 장을 따라 마을을 이동하면서 교역을 하였다. 유럽에서는 이렇게 이동을 하던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11세기이후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때 상인들은 각자의 상점을 가지고 길드에 참여한다. 그러나 당시의 상점은 상품의 생산과 교환의 기능을 병행하였다는 점에서 현대의 상점과는 다른 성격이었다. 우리말의 상점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는 숍(shop) 혹은 스토어(store)인데 숍은 물품을 생산, 스토어는 물품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적어도 11세기경부터는 상인들이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물건을 제작하고 판매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4세기경에는 1층에는 상점, 상층부에는 주거공간을 배치하는 수직형 주상복합이 보편화된다. 상점의 전면은 개방하여 물건을 진열하고, 상점 뒤는 작업장 혹은 거주공간을 배치하였다. 건물이 2층 이상인 경우에는 지상층은 주거공간으로 할애되고 지하층은 창고로 쓰여졌다. 그러나 모든 상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살면서 상점을 운영하기는 어려웠고, 부유한 상인이나 부호들이 소유한 건물을 소매상인들이 임대하는 형태였다. 최초의 상인은 일상용품을 생산하는 장인들이었으나 점차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교역만을 담당하는 중간상인으로 탈바꿈한다. 상점은 시장과 달리 상설로 열렸고 단순한 교역의 장소에서 여가와 소일을 하는 사회적 공간의 성격을 띄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규시장이 미치지 못하는 마을이나 외진 곳은 행상인의 몫이었다. 행상인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을 주로 찾아갔지만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전위대이기도 하였다. 행상인의 상업활동은 유럽의 도시에서 19세기까지 지속된다. 한편 권력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도시내의 상점은 시장과 달리 길을 따라 뻗어나가기 시작하였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상업건축은 도시경관을 지배하게 된다. 市場-面, 商店-線의 이원적 구성은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미국의 도시에서도 관찰된다. 도시중심부 격자형 街區內에 집중되었던 시장은 자동차의 보급과 함께 교외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는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외곽을 향하여 선형으로 뻗어나간다. 중국의 長安과 開封, 중세유럽의 도시, 19세기 북미 도시의 경우에서 보듯이 상업활동과 권력의 통제는 면과 선이라는 보편적 공간논리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시전은 유럽의 시장과는 달리 정부가 건물을 직접 세우고 관리 통제했던 어용상점이었고 시전의 고객은 궁궐과 사대부였다. 궁궐과 관아에 거주하거나 소속된 자와 그 가족을 제외한 도성내 인구의 대부분은 시전상인과 시전에 물품을 납품하는 관영수공업자가 차지하였다. 중세유럽의 상점의 주체가 상업의 발달로 등장한 시민이었다면 조선시대 시전의 주체와 사용자는 정부였으므로 시전은 물품을 사고 파는 일상의 상업공간이라기보다는 권력의 통제하에 이루어졌던 제한적 의미의 상업공간이었다. 반면 종로거리는 시민의 일상공간이 사대부 및 권력의 공간과 접하는 정치적, 상징적 경계이기도 하였다. 상업공간과 상징적 공간을 분리했던 당의 장안이나 중세유럽의 상업가로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러한 종로의 통합적 기능이다. 시전행랑을 도시경관을 정비하고 길을 관류공간 이상의 場所를 만드는 도시건축적 장치로서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이 조선초에 건설된 행랑 중 창덕궁에서 종로3가 구간은 상업적 용도가 아닌 관청용 건물인 점이다. 漢陽圖에서 보여주듯이 시전은 처음부터 궁궐, 관아, 주택과 더불어 도시를 형성하는 주요건축물이었다. 전자가 길과 독립적인 구성원리에 충실한 반면 시전은 집합적 구성원리에 바탕으로 둔 건축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후기 서울의 상류주택은 집의 방향을 먼저 정하고 칸을 기존단위로 채와 외부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길을 따라 집합적으로 전개되는 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구성방식이다. 상류주택이 多方向으로 확장되는 공간구성이라면 시전행랑은 一方向으로 확장되는 공간구성이다. 시전행랑이라는 이름이 내포하듯이 조선 초의 종로거리는 행랑채로 에워싸인 사대부 주택의 마당에 비유할 수 있다. 조선시대 노비제도의 유물로서 일제시대에는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큰집으로 들어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급료나 음식을 제공받았는데 이를 행랑살이라 불렀다. 행랑채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의 거주공간이자 외부로부터 주인들의 사적공간을 에워싸는 전이공간이기도 했다. 행랑은 앞은 열리고 뒤는 가려진 反외부공간이며 집안과 밖을 나누고, 앞과 뒤를 뚜렷이 표현하는 건축물이다. 시전행랑 역시 사대부 주택을 민의 공간으로부터 차폐하고 에워싸는 도시의 立面이었던 것이다.

4. 超空間的 商業空間

건축공간은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도시내의 다른 사회구성원과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空間依存的(spatial) 유형, 超空間的(transpatial) 유형으로 구분된다. 공간의존적 유형에 속한 집단은 인접한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직접적 관계를 맺는다. 반면 초공간적 유형에 속한 집단은 공간상으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는 관계에 의해서 연결되는 집단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상점이다. 상품을 판매하여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것이 목적인 상점은 고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시를 향하여 모습을 최대한 드러내려고 한다. 단골 고객을 상대하는 고급상점은 불특정 다수로부터 고객을 차별화하기 위해서 길에서의 인지성보다는 폐쇄성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가로에 의존하는 성향을 지닌다. 후자의 예로는 상인의 동업조합인 중세의 길드(guild)건축을 들 수 있다. 내부의 중정은 가로와는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을 뿐 숨겨져 있다. 길드건축이 모습을 드러나는 것은 중정에 들어선 다음이다. 더 나아가 길드조직의 회의장소는 중정에서 더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길드에 모여드는 상인들은 근접성, 인지성에 구애받지 않고 공간을 초월한 길드조직으로 묶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인은 한편으로는 공간의존적 집단 다른 한편으로는 초공간적 집단에 속한다. 초공간적 유형은 현대 도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증권사의 객장, 경제단체의 회관, 동문 혹은 동호인 사무소등은 불특정 보행자에 의존하기보다는 분명한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 의존한다. 두 가지 성격의 공간은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성격이 도시공간구조와 어떻게 엮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시전이 도시경관을 정비하는 미관용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전이 길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면서도 초공간적 성격을 지닌 이중적 상업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시전상인들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독점적 상업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15세기 후반에는 중국사신과의 공무역 및 권력과 결탁한 대외무역, 국고잉여품의 처분까지 독점하여 시전상인의 상업활동의 공간적 범위는 종로나 수도 서울을 넘어서게 된다. 동업시전상인들의 조직과 위계 그리고 이들이 벌였던 상권보호와 국가에 대한 市役의 조정과 분배의 활동은 시전의 초공간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시전행랑은 길과의 직접적 공간관계보다 광범위한 지리적 범주에 의존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시전은 수도 서울에 위치한 어용상점이자 전국의 상업활동의 거시적 거점지였던 것이다. 시전과 궁궐내의 관리들과의 관계, 사대부주택과의 관계, 시전을 관장하는 京市暑, 司憲府 등과의 관계 등은 일상 시민이 점유한 길과의 관계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거래 역시 시전의 물품의 내용이나 물품을 궁궐과 사대부주택에 직접 갖다주는 간접거래의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전이 정부가 주도한 위에서 아래로의 상업공간이라면 도성외부에 장시의 형태로 형성된 巷市가 자생적인 상업공간의 성격을 지닌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상설시장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항시는 시전과 달리 넓은 공간에 상인들이 각자의 물품을 펼쳐놓고 상행위를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항시에서 거래되는 품목도 일반 시민의 생필품인 곡류, 채소, 탄 등으로 궁궐과 사대부의 고급일상용품과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종로의 넓은 가로폭도 상인과 행인 사이에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지기에 적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실중의 하나이다. 현재 종로의 폭은 약 40m이고 길을 점유한 자동차 때문에 양편의 인도는 시각적, 공간적으로 서로 단절된 상태이다. 조선시대 종로는 수레가 7대 정도 지나갈 수 있는 大路로 규정되어 최소 56尺(약 17.48m)의 폭을 가졌던 넓은 길이었다. 실제 종로의 폭은 그 보다도 넓었으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1895년 갑오경장으로 정부가 근대적 도로정책을 수립할 때에는 오히려 노폭을 55척으로 줄이는 도로령을 발하고 정비하게 된다. 주요간선도로 폭이 50여 척에서 7,80여 척으로 지나치게 넓어 오히려 무허가 건물이 빈번히 들어선다는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조선시대 종로는 부분적으로 이미 22-25m 폭을 가지는 넓은 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구한말 사진에서 종로는 한 쪽의 상점에서 길 건너 다른 쪽의 상점 내부를 자세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넓어서 상업가로로서의 공간적 긴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림 6). 1915년에는 일제에 의한 京城市區改修 예정계획에 따라 종로는 28m로 확장된다. 이때 노폭이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갑오경장 때의 기록을 참조한다면 넓은 구간은 도로 양측으로 각각 1.5-3m 정도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6.25 전쟁 중 많은 건물이 파괴되어 종전 후에는 다시 종로의 양측을 정비하게 된다(그림 7). 1979년에는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면서 현재와 같은 40m로 다시 확장하여 기록상으로 종전보다 12m가 넓어졌으나 종로2가 북측의 YMCA건물이 1966년에 완공된 점으로 미루어 북측변은 그대로 두고 주로 남측을 후퇴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종로는 태생부터 의례적, 정치적, 상업적 기능을 통합하는 장소로서 길의 성격을 넘어 유럽의 봉건도시에서 나타나는 대로(boulevard)와 광장의 기능을 모두 수용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시전을 공간의존적 성격과 초공간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상업공간으로 해석할 때 제기되는 의문은 시전과 이면지역과의 관계이다. 도면과 문헌이 전해오지 않아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궁궐과 사대부 주택의 행랑의 공간구성이나 형태로 미루어 시전행랑 역시 단층목조 건물로 도로변 전면은 개방되고 배면은 폐쇄된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초 서울의 인구는 거의 종로구 일대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당시 서울은 현재 종로구의 인구밀도에 버금가는 고밀도의 도시였다. 이러한 높은 인구밀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건축물은 대부분 단층 목조가구식이었다. 궁궐건축의 경우에도 다른 건축물보다 층고는 높지만 거주용 공간이 2층으로 분화된 경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시전행랑의 경우에도 2층으로 분화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을 뿐 상업적 용도로 나누어졌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점포를 2층으로 하도록 정비령을 내려 한인상가가 파산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2층 한옥상가의 대부분은 1910년대를 전후하여 건축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통건축에서 겹평면, 즉 깊이 방향으로 내부공간이 분화된 경우가 거의 없는 점을 감안하면 시전행랑 역시 수평적으로 분화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가가 건설, 소유, 관리하는 건물을 상인이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미분화된 단층의 내부공간에서 시전상인의 가족이 거주할 수 있었을까? 성종 16년 (1485)에 도성인구가 증가하고, 시전행랑이 부족함에 따라 종묘앞에서 현재 연지동에 이르는 지역까지 시전을 확장하고 업종별 시전구역을 조정하게 되는데 이때 시전상인들이 불만을 제기하여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옮긴 시전이 자신들의 집에서 멀다는 이유였다. 당시 시전을 어떻게 옮겼는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시전건물과 상인의 주택이 분리되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시전행랑 이면의 주거지역이거나 시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인이 거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전체상민의 절반이 상업활동에 종사하게 되는 19세기말에는 상업과 주거의 분리현상은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시전에서 거래했던 물품의 제작공장 역시 시전에서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생활용품을 제작하던 제조작업이 종로 이남의 서린동, 관철동, 관수동에 종각 서쪽의 관철동, 공평동등에 밀집되어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종각과 종로를 경계로 동측과 종로2가 배면에는 들어서지 않았던 것 같다. 현재로 보면 공업지역에 속한 당시 생활용품작업장이 사대부 고급주택가와 분리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시전행랑은 이처럼 고급주택지를 공업지역과 길로부터 에워싸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상업을 가장 천대하였던 조선시대에 최고의 엘리트집단의 주거공간이 상업공간과 인접해 있었다는 사실은 현대 서울의 도시와 건축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앞의 1914년 지적원도의 분석에서 밝혔듯이 위상도가 가장 낮은 공간은 큰길 이면의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이에 면한 소규모 주택지이다. 외부와 내부의 급격한 전이를 이루는 도시구조는 서울만의 특징은 아니다. 유럽의 중세도시와 이슬람 도시 역시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 막다른 길, 여러 겹의 필지로 종로와 유사한 도시구조를 보이고 있다. 종로의 도시조직이 이들과 다른 점은 필지의 비균질성이다. 필지 규모가 불규칙한 것은 도시화가 진전되는 도시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형건축물, 주차장 등을 위하여 잘게 나누어 졌던 소형필지는 합필되는 경향을 보인다. 1920년대 장안빌딩 뒤편의 4개 필지가 인사동 262-3번지로 통합되어 3층 건물이 들어섰고 바로 옆 263번지 일대의 3개의 필지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종로 이면의 대형필지는 도시화가 진전되기 이전인 19세기에 이미 대형화되었다는 점에서 ‘先分割 後合筆’과 구별된다. 즉 종로 필지의 비균질성의 근원은 서울의 도시화로 인한 산물이 아니라 유교가 지배했던 위계적 사회의 공간분화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1929년 지형명세도를 보면 인사동 194번지와 관훈동 198번지는 수십 여 개의 작은 필지를 합한 규모이다. 현재 이 곳에는 태화빌딩, 하나로빌딩, 관훈빌딩, 홍익빌딩, 성화빌딩등의 고층사무소 건축이 들어서 있다. 1914년 당시 이 두 필지는 조선초 국가가 법으로 규정한 최고관리의 대지분급기준보다 2배 가까이 큰 반면 소형필지는 기준보다 작아 법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았거나 후기로 오면서 필지의 크기가 양극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인사동 194번지는 조선시대 왕족이나 최고권력자의 주택지로서 소유권이 중종반정의 공신 구수영, 철종 때의 김흥근, 헌종 후궁 경빈이씨의 순화궁, 이완용으로 넘겨졌다. 관훈동 198번지는 고종때 민승호의 아들 민영익이 살았던 곳이다. 관훈동 197번지 일대는 율곡 이이가 살았고 조선말에는 김병학의 대저택이 있었던 곳이었다. 1902년 세워진 승동교회 자리(인사동 137번지)도 그 규모로 보아 19세기에는 주택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견지동 85번지 일대는 윤치호의 집터로 알려져있다. 반면 17세기 중엽 이완장군의 집터로 알려진 인사동 221-4번지는 필지가 잘게 나누어졌고, 지금은 도시 속의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위에서 열거한 대부분의 대형 주택지는 1914년 당시에는 우정국로와 인사동길을 관통하는 통로가 없어 위상학적으로 보면 도시의 내부였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길에 면한 필지보다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은 곳이 더 좋은 주택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초 행랑건설을 위해 철거된 건물 중 기와집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건물이 초가였던 점도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물길이나 저지대를 피해 주택지를 정한 점도 있었지만 상업공간을 완충지대로 삼아 도시의 깊숙한 내부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상업공간이 앞에 나서고 주거공간이 배면에 자리잡은 ‘수평적 住商竝置’의 구조는 1층을 상업공간, 지상층을 주거공간으로 결합한 유럽 상업도시의 ‘수직적 주상복합’과 대별되는 서울의 독특한 도시구조인 것이다.

5. 都市化와 鐘路

종로의 건축과 도시조직은 600여 년 동안 생성, 소멸, 변화하였지만 前線後面과 住商竝置의 공간논리는 최근까지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었던 조선시대의 도시구조는 도시화와 상업자본주의의 힘 앞에 새로운 공간논리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1914년 地籍原圖, 1929년 地形明細圖와 1999년 항측도를 비교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태화관길의 확장과 주변부의 개발이다. 태화관길은 1913년에서 1929년까지 17년간 일제가 실시한 京城市區改修事業 기간 중에 새로 뚫린 길이다. 주변 고층사무소건물은 공평지역 재개발 사업으로 1980년대 초반에 건축되었다. 태화관길의 북측에도 대형필지 때문에 막혀 있었던 내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길이 생겨났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일부는 곧은길로 펴졌다. 그러나 종로와 우정국로가 만나는 모서리가 깎이고 필지가 커져서 시전행랑과 피맛길의 연속성은 단절된다. 1999년 항측도를 바탕으로 공간구문론 분석을 한 결과 평균 位相度는 여전히 유럽과 북미의 격자형 도시지역보다는 낮았지만 1914년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다. 반면 位相認識度는 오히려 1914년보다 낮아졌다 (그림 8).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길을 내고 고층사무소를 건축하였지만 부분과 전체를 연결하는 구조적 변화는 지난 80년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태화관길이 위상중심공간에 새로 포함됨으로써 대상지역은 남과 북의 두개의 블록으로 나누어지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내부의 좁은 골목은 1914년과 같이 위상격리공간에 포함되었다.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상지역을 에워싸는 종로, 인사동길, 우정국로의 위상도가 모두 1914년에 비해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는 도시조직은 변했지만 1910년대 종로가 지녔던 前線後面의 공간구조는 현재까지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종각 사거리에는 최초의 근대 한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하고, 자본 역시 한인 박흥식에 의해 모아 건설한 화신백화점이 들어선다. 지하1층, 지상6층의 철골콘크리트구조의 이 건물은 1930년대 당시 장안의 명물이었다. 당시 1, 2층에 불과했던 주변의 상업건축에 비교하면 6층 백화점은 고층건물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종로에서도 상업공간의 수직분화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1936년 일본인에 발간된 ‘新版 大京城案內’ 책자에서 종로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화신백화점 주위에 포목상, 옷가게, 고무신가게 등이 즐비했다고 소개하고 있어 조선시대 시전행랑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종로의 뒷골목은 선술집이 많이 들어서서 주거지역이 유흥가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1993년 동아일보가 조사한 1930-40년대 종로의 모습에도 화신백화점, 시계포, 백양당, 장안빌딩, YMCA회관내 안과, 악기점, 카페, 양복점, 서점 등이 있었다. 반면 피맛길 안쪽으로는 이문옥(설렁탕집), 인쇄소, 여관, 색주가 등이 들어서 있었다. 외부에는 복합상업공간이 들어선 반면 내부에는 유흥업소들이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에서 구한말까지 종로 내외부의 급격한 전이는 상업화가 되면서도 유지되었고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다시 공고화된다. 1928년 ‘京城府및附近用途地域’에는 서울을 상업지역, 주택지역, 특별지역, 공원지역으로 나누고 있는데, 상업지역은 주요간선 도로를 따라 선형으로 지정하였다. 연구대상지역의 경우에도 종로, 인사동길, 우정국로가 상업지역으로 지정되었고 내부는 모두 주택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1952년 ‘서울特別市都市計劃用途地域圖’에는 동서 방향으로는 태평로에서 동대문까지 남북 방향으로는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도심부 대부분이 상업지역으로 지정되는데 이때 종로의 이북 블록의 절반이 상업지역에 포함된다. 그러나 법과 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600년 이상 내재된 근본적인 선-상업, 면-주거의 공간논리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1950년대 발간된 것으로 추측되는 서울의 상업안내도인 서울商界畧圖에 대로를 따라 상점의 이름이 조밀하게 기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종로2가의 경우 현재의 상점 수보다도 더 조밀한 것으로 보아서 2층 이상의 점포까지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내부는 여관, 음식점, 출판사 등이 군데군데 위치할 뿐 여전히 주택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종로변은 점차 밀집화, 고층화되는 반면 내부는 여전히 저층 한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와 외부의 급격한 위상학적 차이는 상업화 과정에서 새로운 독특한 도시경관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시의 안과 밖에 대한 상반된 인식은 도시관련법에서도 나타난다. 1934년 일제의 朝鮮市街地計劃令에서부터 법제화되어 왔으나 1960년대까지 시행이 되지 못했던 美觀地區에 관한 법령이 그것이다. 중앙청 앞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가로를 포함한 4개 노선이 미관지구로 1966년 지정되었고 그 이후 1970년대까지 서울의 주요간선도로에 미관지구가 계속 지정되었다. 1966-1970년 기간동안 1종에서 3종으로 지정된 미관지구는 대부분 외국사절 및 관광객의 출입이 잦은 도로에 집중되어 있었다. 미관지구가 서울시민보다는 외부 방문자를 위한 치장의 수단으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1975년 미관지구의 세분에 따르면 1, 2, 3종 미관지구가 모두 도로변에 띠모양으로 지정되었다. 미관지구에 관한 한 연구에 따르면 현행 미관지구의 지정은 노선미관지구가 전체의 74.2%를 차지하고 있고, 대부분 건축선으로부터 폭 12m-15m의 깊이로 지정되어 있다. 12-15m의 깊이는 종로2가와 피맛길 사이의 폭 정도밖에 되지 않아 대형건축물의 경우 전면부만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도시의 미관을 정비하기 위해 시전행랑을 건설한 것처럼 현재도 미관을 도시조직의 표피에 국한된 문제로 간주하는 법과 제도의 통념을 읽을 수 있다.

상업화가 진전되면서 종로의 공간논리는 역전된다. 길에 면한 필지일수록 가치가 높아지며 그 중에서도 길과 길이 만나는 결절점은 지가가 더욱 높아진다. 반면 최고의 주택지였던 내부는 주거환경이 악화되면서 점차 상업의 배후지로 전락한다. 1983년에 조사된 종로의 지가분포도에서 사거리를 중심으로 지가가 등고선을 그리며 도로 뒤로 갈수록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종각전철역, 광화문 사거리, 종로3가 전철역, 종로4가, 종로5가 전철역 순으로 결절점의 지가가 낮아지고 있다. 종로1가에서 5가에 이르기까지 길과 길이 만나는 곳의 건축물의 높이가 이를 반영한다. 한편 격자형 상업가로인 명동의 경우에는 남대문로와 명동길이 만나는 곳이 가장 지가가 높지만 명동의 내부로 들어가더라도 지가가 유지되고 있다. 폭이 좁은 전면에 상업공간이 밀집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전면과 배면이 위상학적 중심과 주변으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종로의 도시구조 때문이다. 격자형 街區에서 가로 세로의 모든 길은 위상학적으로 균질하므로 상업건축이 골고루 분포될 수 있다. 반면 종로의 경우 상업건축은 위상중심공간인 대로변에 면한 한 켜의 필지로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종로가 을지로, 명동, 남대문로의 상권에서 밀리게 되는데 선형의 가로가 갖는 물리적 한계도 그 원인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내부와 외부의 이중구조, 필지의 비균질성은 현대에 와서 건축물의 수직과 수평의 이중구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시전이 자리잡았던 대로변은 현재 중층의 상업건축으로 바뀌어졌다. 도심재개발로 새로운 길이 난 곳에는 고층사무소건물이 들어섰다. 반면 상업화되지 못하는 이면에 놓여 있는 건물은 주택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여관, 주점 등의 2차 상업지로 변하고 있다 (그림 9). 이면 깊숙이 자리잡은 주택은 전면재개발의 혜택을 기다리며 孤島와 같이 남아 있다. 종로는 이제 前線後面, 住商竝置의 공간구조와 함께 여러 개의 이질적인 도시조직이 합쳐진 모자이크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6. 모자이크의 都市組織과 商業建築類型

현재 종로에는 확연히 구별되는 네 개의 도시조직 유형이 공존하고 있다. 첫째, 시전행랑의 평면구성을 반영하고 있는 종로북측 한 켜의 조직이다. 둘째, 부분합필을 통하여 크기가 확장된 내외부의 중규모 조직이다. 셋째, 소규모의 전통한옥이 있었거나 아직도 남아있는 내부의 소형조직이다. 넷째, 조선후기 상류주택이 자리잡았던 곳으로 고층사무소 건축이 들어선 대형조직이다(그림 10). 도시유형이 건축유형을 결정한다고 보는 견해는 지나친 결정론적 관점이지만 서로 무관하거나 독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관점 역시 건축과 도시의 관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네 개의 도시조직을 통하여 종로의 현재 모습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상업건축의 유형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6.1 종로와 피맛길

종로2가 북측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동측 160m는 피맛길이 남아있어서 필지의 폭이 10-14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서측 210m는 종로타워, 장안빌딩, YMCA회관에 의해 피맛길이 단절된 상태이다. YMCA회관은 1966년 종합건축연구소에서 설계한 지하1층, 지상7층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당시 체육관, 강당, 교실, 집회소 호텔, 사무실 등이 포함하여 교육, 여가, 숙박, 업무기능을 수용하는 대규모 복합건축이었다. 이 자리에는 1908년 지어져 조선인의 문화활동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3층 벽돌조 회관이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소실된 회관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 할 수는 없지만 1914년 지적도의 필지(종로2가 9번지) 형태로 보아 1908년 당시 이미 회관의 부지가 현재처럼 피맛길을 끊고 북쪽으로 확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1930-4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종로2가 8번지의 지상3층 장안빌딩 역시 피맛길을 끊고 확장된 필지에 서있다. 두 건물 모두 별도의 계단실이 두 군데 이상 있지만 내부 공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홀이나 복도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YMCA회관과 장안빌딩의 공통점은 복도를 중심으로 전면과 배면에 다른 용도의 상업공간을 배치한 점이다. YMCA회관의 1층 전면은 5m, 7m 폭으로 나누어 상점으로 쓰고 상부층은 여행사 등의 사무공간으로 임대하고 있다. 장안빌딩 역시 전면은 상점으로 임대하고 있지만 반대편 방들은 음식점, 유흥시설로 임대하여 전면과는 다른 성격을 띈다. 두 건물의 前後, 上下의 공간은 길에서부터의 위상학적 깊이에 따라 그 용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외부에서 홀, 복도, 계단실 등의 공용공간을 많이 경유할수록 보행자의 접근성에 의존하는 소매점으로서의 매력은 떨어지는 반면 초공간적 성격의 사무공간에는 적합해지기 때문이다. 길과 실내공간의 관계를 공간구문론의 連繫圖로 표현하면 장안빌딩의 경우 길과 실내의 복도가 나뭇가지에 해당하고 각 실들이 가지처럼 뻗어나간 구조를 하고 있다 (그림 11). 나뭇가지형 구조는 내부공간이 一方向으로 연결되어 경로의 수가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YMCA회관 동쪽의 건물들은 건축물의 깊이, 계단, 복도, 임대공간구성에서 서측의 건물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지하1층, 지상6층 통일빌딩(종로2가 13번지) 역시 전면 폭이 깊이 보다 큰 평면으로 전면을 네 부분으로 잘라서 패스트푸드점, 의류점등으로 임대하고 있다. 홀을 거쳐 계단실로 이르는 점은 위의 두 건물과 같으나 13m 밖에 되지 않는 필지의 깊이 때문에 중복도형 평면대신 편복도형의 배치방식을 취하고 있다. 2층에 오르면 짧은 복도를 통하여 사무실, 병원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좌우측 양단의 패스트푸드점과 의류점은 별도의 내부계단으로 1, 2층이 연결된다. 이를 連繫圖로 옮겨보면 상층부는 장안빌딩처럼 복도를 중심으로 나뭇가지 구조를 하고 있으나 저층부에서는 고리모양의 구조를 하고 있다 (그림 12). 고리구조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경로가 하나 이상임을 의미한다. 고리의 수가 많을 수록 내부공간의 경로가 원활해진다. 상업공간이 1층에 국한되지 않고 2층으로 확장된 경우 고리모양의 구조는 분리된 내부공간을 위상학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이다. 즉 전면폭이 넓은 장안빌딩이나 YMCA회관은 1층에 많은 소매점을 배치할 수 있는 반면 폭이 제한된 통일빌딩은 1층 이상을 통합하여 소매공간을 확보하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 지상3층의 완영빌딩(종로 2가 19번지)은 통일빌딩보다 깊이가 더 얕아 10m밖에 되지 않는다. 1층의 귀금속 매장과 2층의 안경과 보청기 매장이 연결되는 별도의 계단이 있기 때문에 옆길로 난 계단실은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용될 뿐이다. 3층은 1, 2층 상점관련의 사무실과 가공공장으로 사용된다. 건물전체를 유사업종의 임대자가 사용하는 경우이다.

완영빌딩의 오른쪽의 5층 건물(종로2가 20번지)은 1층을 이분하여 두 개의 제화점으로 임대하고 있다. 피맛길 쪽으로 계단실이 있지만 비상계단으로 방치된 상태여서 고객이 사용할 수 없다. 대신 종로2가에서 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난 계단실은 2층의 커피숍, 3층의 성형외과, 4층의 대중연설학원으로 연결된다. 길과 면한 상점은 불특정 다수를 고객으로 하고 있다. 분명한 구매의지를 갖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구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2층의 커피숍 역시 배회하는 보행인이 들어갈 수 있지만 1층의 상점보다는 좀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찾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3층의 성형외과의 고객의 성격은 좀 더 분명해진다. 환자는 우연히 찾아온 보행자가 아니라 병원에 대한 사전 지식과 정보를 갖고 찾아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고객과 점원의 우연한 접촉과 달리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면관계로 바뀐다. 외부공간에서 내부공간에 이르는 위상학적 깊이와 상업공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연계도로 표현하면 여러 개의 가지가 하나로 줄어든 간략화된 나뭇가지형으로 나타난다.

종로2가 22-3번지의 4층 건물은 1968년 이래로 제화점으로 쓰이고 있다. 폭 6m의 두 건물을 하나로 통합하여 현재는 4층 전층을 제화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과 2, 3 4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분리되어 있다. 이 건물의 공간구조는 매장과 계단을 반복하면서 4층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연계도로 표현하면 막대형이 된다. 길에서 4층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든 공간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경우이다. 길에서 내부공간까지의 위상학적 깊이는 층수와 방이 많은 통일빌딩보다 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단일 회사가 모든 층을 사용하지만 위상학적 깊이에 따라서 매장을 구분하고 상층부에는 사무실을 배치하는 예이다. 내부공간구성은 건축물의 외관에서도 드러난다. 상층부의 상업공간이 많이 분화되는 통일빌딩과 달리 단일 이미지를 강조하는 외관을 드러낸다. 종로2가 22번지의 3층 건물은 깊이와 전면 폭의 비율이 2:1인 세장형 평면으로 1층의 전면폭이 불과 7m밖에 되지 않아 하나의 매장으로만 쓰고 있다. 조사대상 중 조선시대 시전행랑의 폭에 가장 가까운 경우이다. 1층은 현재 귀금속상점으로 쓰이고 2층과 3층은 커피숍으로 쓰인다. 전면폭이 좁아 일직선으로 계단을 통해 2층 커피숍과 3층으로 연결된다. 3층에서는 도로 쪽은 성형외과로 뒤쪽은 사무실로 임대한 경우로 공간의 연계는 20번지 건물과 유사하다.

이상 예로든 YMCA 동측의 건물은 제한된 깊이 때문에 前後방향으로 방을 나누지 못하고 左右上下로 공간을 나누어 최대한의 임대공간을 마련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조선시대 시전행랑이 수직화, 고밀화된 상업건축으로 대체된 모습이다. 건축물의 건립시기도 건축법이나 주차장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1960-70년대로 추정된다. 전면부가 건축선에 정렬해 있고 인접건물과 간격없이 밀집할 수 있었던 것은 사선에 의한 높이제한과 인접대지경계선으로부터 이격거리 등의 건축법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업용도도 가로의존적 소매점에서부터 초공간적 상업공간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을 가는 볼 수 있다. 반면 서측의 YMCA회관은 중복도와 계단실 등의 코어(core)를 통하여 수직화하면서 저층부와 상층부의 용도가 소매점-사무실로 이원화됨을 볼 수 있다. 장안빌딩 역시 중복도이지만 뒷부분은 전면과 달리 주점, 음식점등 종로배면의 성격에 부합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6.2 종로와 인사동길의 배면

종로2가의 전면의 도시조직이 불규칙한 배면조직을 띠처럼 에워싸고 있는 반면 인사동길에 면한 필지는 세장비, 크기, 형태적 측면에서 집합성을 보이지 않는다. 건물의 폭, 깊이 높이 등도 심한 편차를 보인다. 1948년 건축된 새마을운동 중앙본부는 도로에서 후퇴하여 전면에 마당을 갖고 있다. 전면부는 3등분되어 중앙에는 대형 로비를 두고 좌우에는 업무공간을 배치하였다. 종로변의 건물과 다른 점은 계단실, 화장실, 창고 등을 합한 코어를 건물의 뒤쪽으로 배치한 점이다. 파고다빌딩의 1층은 편의점과 문방구, 2층은 서예실, 3층에서 6층은 화실과 여행사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새마을운동 중앙본부처럼 계단이 도로에서 식별이 되지 않는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YMCA회관 뒤의 인의빌딩(인사동 235번지) 역시 ㄱ字形의 평면이지만 파고다 빌딩처럼 코어가 뒷부분에 숨어있다. 종로에 면한 건물에서는 소매점이 저층부에 골고루 분포된 반면 종로이면의 건물은 소매점이 1층에만 국한되고 상층부에는 업무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공간의존적 유형과 초공간적 유형이 수직적으로 이원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6.3 도시형 한옥

구한말에 중형필지였던 곳으로 현재 균등하게 나누어져 여러 채의 개량한옥이 밀집한 지역이다. 서울에 이러한 도시형 한옥이 지어진 것은 1920-30대부터 1960년대까지로 조사되고 있다. 이 당시 지어진 한옥들은 가운데 마당을 두고 ㄷ字나 ㅁ字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상류주택과 달리 담이 없이 건물자체가 곧 인접건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인사동 154번지 일대가 대표적 예이다. 154-8번지의 평면구성을 공간구문론 연계도로 표현하면 마당을 중심으로 한 단계의 위상도내에 모든 방들이 가지처럼 붙어있다 (그림 13). 건축당시 방들이 많았으나 전통음식점으로 개조되면서 방들이 통합되었다. 마당을 덮어 실내공간으로 개조한 경우도 있다. 종로내부의 남아있는 한옥들은 주거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전통음식점으로 쓰이고 있거나 전면재개발을 기다리며 남아 있다.  

6.4 도심재개발과 상업건축의 고층화

연구대상 지역 중 태화관길을 경계로 남쪽 지역은 1978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19개 지구로 나누어져 사업이 진행되었다. 태화관길에 면한 3, 5, 6지구가 1980년대 초반 재개발되었고 14, 19지구가 최근 사업이 완료되었다 (그림 14). 이 사업은 수세기 동안 점진적으로 변화해왔던 도시조직을 완전히 소멸하고 블록위주의 새로운 도시조직으로 대체하고 있다. 노후한 목조와 연와조 건물을 허물고 합리적인 토지이용을 하는 것이 재개발의 기본목적이었지만 이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되면 서울의 상업건축역사는 기록으로만 남게 될 전망이다. 도시환경의 관점에서도 대규모의 재개발은 오히려 기존의 도시보다 퇴행하는 측면이 있다. 블록을 나누는 大路 때문에 전체 도로면적은 늘어나지만 그물처럼 연결된 좁은 골목을 없앰으로서 오히려 도로의 전체길이는 줄어들게 된다. 도시민의 무목적의 배회와 대면접촉의 공공공간이 오히려 감소하는 것이다. 1928년 일제에 의한 京城都市計劃 제2차 案의 鐘路區劃整理 案을 보면 종로이북을 동서방향으로 잘게 나누는 배치를 보여준다. 이 안은 당시 종로의 도시조직을 무시한 구획정리 수법이지만 나누어진 구획 위에 건축물의 배치까지 가정하여 도시와 건축의 관계를 전제로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서로 잘게 나누어진 블록내부를 관통하는 보행로를 만든 점은 50년 뒤 1978년 서울시가 수립한 공평지역 재개발 안보다 구체적이고 진보적인 구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림 11). 1978년 서울시의 안이 블록 단위에만 중점을 둔 반면 1928년의 안은 비록 현실적인 계획은 아니었더라도 도시와 건축 사이의 일관된 질서와 원리를 구축하는 시도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종로에 면한 공평재개발 19지역에는 10여 년의 우여곡절 끝에 1999년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이 자리는 1937년 한국 최초의 근대상업공간이었던 화신백화점이 들어섰던 곳이다. 화신백화점은 모서리를 정면출입구로 배치하여 남북축의 시전행랑축을 변형하였고 대지 규모도 커서 종로1가에서 2가사이의 피맛길을 단절시켰다. 화신백화점은 1950년 이후 대표적 백화점으로서의 명성을 잃었고 1987년 도심 재개발의 과정에서 건축계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철거되었다. 백화점으로 계획되었던 종로타워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임대 사무실로 프로그램이 바뀌었다. 재개발이전에는 화신백화점, 동쪽의 동아백화점등의 중규모필지를 포함해서 75개의 필지가 있었으나 하나로 합쳐졌고 내부로 난 길도 합필의 결과 차단되었다. 미국의 엘레베 베켓 건축사무소와 라파엘 비뇰리에 의해 세워진 이 건물 중앙의 뚫린 거대한 공간은 도심용적률 상향조정, 높이제한 완화, 그리고 중간에 건축가가 바뀌면서 생긴 결과이다.

태화관길은 재개발 계획에 따라 낙원상가와 직접 연결되는 폭 20m의 도로로 확장되었다. 공평지역 제3지구는 공평동 25번지를 중심으로 70필지를 합하여 하나의 필지를 만들었고 지하4층 지상12층의 1984년 한미빌딩이 들어섰다. 공평지역 5지구는 194-27번지를 중심으로 6필지를 합한 곳으로 1981년 지하3층 지상12층의 태화빌딩이 세워졌다. 제6지구는 194-4번지 일대의 15필지를 합한 곳으로 1983년 지하3층, 지상12층의 하나로빌딩이 들어섰다. 제5지구와 제6지구는 조선시대 구수영, 김흥근, 順和宮, 이완용별장, 명월관분점, 태화회관의 역사를 거친 장소이다. 한미빌딩, 태화빌딩, 하나로빌딩은 도시재개발 사업으로 같은 시기에 지어졌지만 건축물의 저층부와 외부공간 그리고 건물사이의 일관된 질서나 연결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세 건물의 평균 대지면적은 3,570M2, 용적률은 490%, 건폐율은 38%로 저층부의 이격거리는 커진 반면 고층화하는 현상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79년 제정된 주차장법에 따라 평균 97대의 지하주차장이 설치되었다. 자동차의 진출입과 주차면적에 따라 결정되는 지하주차장평면은 지상층의 공간구성과 직결된다. 상업공간을 고층화하기 위해서는 길, 인접건물과의 관계보다 구조개념, 평면구성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태화빌딩은 코어가 중앙에 위치한 가로 세로 40m의 장방평 평면이다. 두 면이 길에 면해 있지만 종로와 인사동길에 면한 상업건물과는 달리 건물과 길 사이의 영역에서 보행자의 흐름이 차단된다. 용도도 길과의 직접적 관계보다는 초공간적 성격의 사무실용도로 단일화되고 있다. 내부공간은 전후좌우에 관계없이 위상학적으로 균질한 성격을 띄게 되고 이는 동일한 외관에서 표현된다. 주변과의 공간적 관계보다는 시각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공평지역 재개발 19지구 가운데 1, 3, 5, 6, 14, 19지구는 원안대로 사업이 끝났지만 나머지 지구들의 사업을 진행하는 데에는 앞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1978년 지역을 지정한지 20년이 경과하는 동안 재개발 관련 당사자들의 이해가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 점도 중요하다. 종로는 무한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재개발을 통한 단기적 이익보다는 거시적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고 있다. 현재 종로의 모자이크 도시조직은 불규칙하고 비정형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봉건시대, 일제강점기, 산업화와 도심공동화의 과정을 지닌 도시건축사의 단면이다.

7. 변화하는 鐘路의 空間論理

종로는 空間依存的 건축과 超空間的 건축이 새로운 사회, 경제, 문화환경 속에서 전환되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종로의 도시구조는 ‘線-面’의 이중성에서 출발한다. 조선시대 상류주택은 길과의 관계보다는 권력의 중심인 궁궐에 근접하면서도 間이라는 단위요소와 이를 결합하여 寨를 이루는 독자적 구성원리를 중시했다. 반면 이를 감싸기 위해서 시전행랑은 선형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집이 길에 의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에 의해 길이 형성되는 ‘先住宅 後街路’의 과정이었다. 당의 장안, 일본의 교토, 중세유럽도시의 건축이 분할된 面을 채워 넣는 것이었다면 조선시대의 주택은 단위와 조합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즉 전자의 도시와 건축은 ‘나누는’ 문제, ‘분할’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면 조선시대 서울의 주택과 상업건축은 ‘더해 가는’ 문제, ‘확장’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산업화, 도시화, 상업자본주의 앞에서 이러한 ‘線-面’의 二次元的 二重性‘은 세 가지의 압력을 견뎌낼 수 없게 된다. 첫째, 권력공간과의 근접성에 의존했던 ’超空間的 面‘은 주택지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상업공간 중에서도 超空間的 성향을 지닌 2차 상업공간으로 전락한다. 둘째, ’街路依存的-線‘은 상업공간의 절대적 부족으로 수직화의 압력을 받는다. 유럽과 북미의 도심상업건축이 1층-상업공간, 상층부-주거공간으로 이분된 반면 종로변 상업건축은 위상학적 깊이에 따라 空間依存的 상업공간과 超空間的 상업공간이 수직방향으로 분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밀도 높은 상업가로경관과 배면이 이중성을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셋째, 貫流空間과 場所로서의 양면성을 지녔던 종로는 자동차에 의해 점유되면서 장소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관류공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세 가지 압력과 변화의 결과 종로는 여러 도시조직이 공존하는 모자이크의 도시유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로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線-面의 이중구조와 같은 심층도시구조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도심재개발의 압력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종로와 명동의 경쟁, 1970년대 강남개발 후 드러나는 강북과 강남의 경쟁을 초월하는 도시간의 경쟁과 이로 인한 공간의 유동성이다.
강남이 새로운 서울의 경제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지만 종로는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 거리이자 문화산업이 꽃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거리이다. 인사동과 사간동으로 이어지는 미술관과 골동품의 거리, 그리고 경복궁, 창덕궁, 운현궁, 종묘와 같은 도심의 오아시스가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종로는 서울의 寶庫이다. 피맛길을 따라 펼쳐지는 도시의 뒷모습조차도 자동차에 의해 허덕이는 대로에 비하면 오아시스이다. 그러나 냉혹한 상업자본주의 앞에서 종로가 그저 문화산업의 중심이 되지는 않는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대상만을 문화재라고 인식하고 그 문화재를 담는 거대한 그릇인 도시를 경제적인 수단으로만 이해하는 한 도시문화의 구축은 불가능하다. 도시계획은 여전히 길을 내고 땅을 나누는 거시적 차원에 머무를 뿐 미시적 실행전략은 간과하고 있다. 그 결과 도시의 물리적 실체를 만드는 건축가들은 이러한 변화의 힘과 과정에서 소외되어 왔다. 위계와 통제하에서 서울은 오랫동안 봉건적 공간논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상업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재 건축과 도시의 새로운 공존의 논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도시의 정체성은 집합적 원리 속에서 부분이 개성을 가질 때 가능한 것이다.

종로가 서울의 대표적 가로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종로의 특수성이 서울의 다른 상업가로를 이해하는 보편성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서울을 이해하는 관문임은 분명하다. 또한 종로의 건축과 도시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해석이 곧바로 구체적 대안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실험을 위한 선결조건이다. 종로는 박제처럼 화석화되어서도 안되지만 을지로 재개발의 전철을 밟아서도 안된다. 도시조직의 작은 부분을 비우고, 재생시키는 건축적 스케일의 대안모색을 위해서도 종로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계속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와 유사한 유교적 봉건사회 속에서 형성된 중국과 일본의 도시상업공간과의 차이를 밝혀내는 작업은 앞으로 극동 아시아 상업건축사 연구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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