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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시애틀에서 아시아 도시를 보다 (2006.07)

시애틀에서 아시아 도시를 보다
서울시립대 소식, 34, 2006 여름, pp.6-7.

시애틀은 캐나다 밴쿠버와 자동차로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미국 서북단의 도시다. 태평양이 굽이굽이 들어와 이루는 만(灣)을 끼고 도시가 자리한다. 내륙으로는 해발 2,000 미터를 넘는 험준한 산맥이 둘러싸고 남에는 만년설산이 우뚝 솟아 있다. 위싱톤주 자동차 번호판에 붙이는 별명이 상록주(Evergreen State)인 것을 보면 자연은 이들의 최대 자랑거리다. 행정구역상 시애틀은 서울시 면적의 1/3, 인구 57만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국의 도시가 그렇듯 주변 도시를 묶어 인구 320만의 광역도시 푸제사운드(Puget Sound)를 형성한다. 푸제사운드 동에는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있고 북에는 보잉사가 있다. 도심이 공동화된 미국의 대부분의 도시와 달리 시애틀 다운타운은 여전히 활력이 넘친다. 일견 바다와 울창한 수림, 최첨단 산업이 공존하는 이상적 현대도시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나의 연구주제는 교외화 이후 (post-suburban) 미국대도시의 건축도시변화다. 2차 대전 후 미국도시는 고속도로를 따라 뻗어나가는 과도한 도시팽창의 문제를 공통적으로 겪었다. 교외가 도시와 전원의 장점만을 결합한 이상적 주거공간으로 믿었던 결과였다. 빈부의 공간격리, 도심공동화, 범죄, 교통체증, 대기오염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1970년대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도시재생 운동을 벌였지만 자동차를 개인의 권리로 믿는 미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고칠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지방정부, 전문가, 시민들이 함께 커뮤니티 재생운동을 일찍 시작한 도시들이 있었다.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이 대표적인 도시다. 연구대상으로 시애틀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지 불과 세 달 만에 우리가족은 교외화가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예산절감을 이유로 문을 닫는 11개 학교리스트에 우리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포함된 것이다. 교장선생님 조차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 의사결정과정을 최대의 자랑거리로 삼은 미국에서 사전예고 없이 언론에 일방적으로 발표한 사실이 놀라웠다. 다섯 차례의 공청회가 공고되고 각 학교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처음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책회의에 갔다가 소용돌이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말이 공청회지 각 학교별로 발언자가 나와 자신의 학교가 포함된 것을 조목조목 반박하거나 폐쇄결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리였다. 망설이다가 공청회 마지막 날 나도 발언대에 섰다. 고전적 도시계획에서 커뮤니티 중심은 초등학교다. 1920년대 클레렌스 페리라는 도시이론가는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도보로 5분 거리를 근린주구로 정의했다. 그 이론이 조금이라도 유효하다면 공립초등학교는 도시세포의 핵이다. 시애틀과 같은 부유한 도시가 1년에 50억 원을 줄이려고 공립학교 문을 닫는 것은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폐쇄기준 이면에는 다양성, 형평성에 이율배반적인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 공립초등학교는 경쟁과 효율을 위해 통폐합하는 대학이나 사립학교가 아니다. 작은 예산을 절감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도시 세포들을 죽임으로써 큰 것을 잃는다. 사람들은 점차 교외로 빠져나가고 도시의 예산도 줄어든다. 교육당국자와 지역정치인은 자신들의 도시가 지닌 힘과 매력이 정작 무엇인지를 모른다. 이것이 나의 발언의 요지였다. 공청회 결과 우리 아이의 학교는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나머지 10개 학교는 폐쇄의 길을 걷고 있다.

건축과 도시의 관계를 연구하는 나에게 이제 미국은 철저한 여과과정이 필요한 비교표본이다. 미국에서도 가장 살기 좋다는 이곳의 고속도로 정체는 한국을 능가한다.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지탱하는 거대공룡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여과하여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전 세계 최고밀도의 거대도시 서울에서 생존하는 사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질풍노도와 같이 달려온 지난 50년간의 과정과 결과에 지나치게 비판적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혼돈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보다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반증이다.

지난학기 최대 수확은 건축도시대학에서 개설한 “아시아 도시” 참여였다. 건축, 도시, 조경학과의 교수와 학생이 참여하는 다학제적(interdisciplinary) 수업이었다. 중국, 타이완, 인도, 일본도시가 중심이었지만 내가 거들면서 자연스럽게 서울도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글로벌화와 동사아시도시의 변화가 토론의 중심이었다.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데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특강을 한 시애틀 소재 건축설계, 도시설계회사는 현재 매출의 30%가 아시아 시장이 차지하며 그 수치는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역설적으로 1999년 글로벌화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도시가 바로 시애틀이었다.

글로벌시대에 동아시아가 경제의 중심이 되지만 지식생산과 공급의 주도권은 여전히 미국과 유럽이 행사할 것이다. 때문에 국제화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도 학문과 실천의 독자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방대한 이 곳 도서관에 한국건축과 도시에 관한 변변한 책이 없다는 것을 보고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학자로서 수치와 책임을 느꼈다. “유럽 변방화하기 (Provincializing Europe)”를 쓴 인도학자 챠크라바티는 서양이 동양에 무지한 것은 관용되지만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 소위 “무지의 불평등(inequality of ignorance)” 이 현대 문명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8년간 내 스스로가 지식의 불평등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을 반성한다. 유로아메리카 지식식민성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우리의 좌표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다. 그 좌표틀은 한반도 울타리를 벗어난 동아시아적 범주이어야 한다. 동아시아는 문제투성이지만 다이내믹하다. 나는 시애틀에서 태평양 건너편 도시와 건축의 무한한 잠재력을 읽는다.

김성홍/ 워싱턴주립대학 건축도시대학 풀브라이트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