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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아픔 - 욕망의 교차점에 선 근대문화 상징 (2009.07)

시대아픔 - 욕망의 교차점에 선 근대문화 상징
 
동아일보 기획특집 [공간의 역사] 기고
(1)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동아일보 2009.7.8자 20면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7080158

시대의 아픔과 욕망이 교차했던 도시건축, 신세계 백화점

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인공,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가 아내에게 수모를 당한 뒤 ‘주저앉아 지난 세월을 해부하던’ 자리,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한 박완서의 나목(裸木)에서 옥희도가 미군의 초상화를 그렸던 곳. 신세계백화점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던 보이와 모던 걸, 룸펜, 문인, 예술가들의 방황과 훼절, 모멸과 생존의 현장이었다. 지금은 거대한 주변 건물에 에워싸여 고만한 크기지만 일제강점기에 경성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혼마찌(本町)라 불렀던 충무로와 명동에 몰려든 일본 상인들은 500년간 이어온 상업중심가로 종로를 급속히 무력화시켰다. 혼마찌에서 성장한 미츠코시(三越)는 1930년 조선은행(한국은행) 맞은편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을 지었다. 설계는 미츠코시 건축사무소의 하야시 고헤이(林幸平)가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00m2를 넘지 않는 단층건물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건축면적 1,400m2의 이 건물은 초대형이었다. 서울에는 서양인들이 지은 큰 건축물이 있었지만 일반인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미츠코시백화점 정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매장이 좌우로 펼쳐지고 뒤에는 눈부신 대리석 계단이 4층까지 열렸다. ‘어찔어찔’한 엘리베이터는 시골사람들의 구경거리였고 모던 걸은 옥상 정원에서 차를 마시면서 우쭐했다. 그러나 달구지를 끌고 가는 무기력한 조선인의 뒤에 버티고 있는 미츠코시와 조선저축은행(제일은행)의 빛바랜 사진은 가히 초현실주의적이다.

        백화점을 통해 서양을 동경하고 소비문화에 눈을 뜬 것은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4년 동경의 니혼바시(日本橋)에 들어선 미츠코시본점은 런던의 해로드, 뉴욕의 와나메이커, 파리의 봉맑셰를 모델로 개장했다. 한쪽에서는 식민지를 경영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서양의 문물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2004년 우연히 니혼바시본점을 갔다가 미츠코시 100년 기념 대형포스터를 보았다. 사무라이 복장에 칼을 찬 남자와 기모노를 입고 종종거리는 여인의 모습은 서양에 대한 열등감과 아시아에 대한 우월성을 표현한 것으로 느꼈다.

        에밀 졸라의 소설 ‘여자의 행복’은 일자리를 찾아 파리에 올라온 시골뜨기가 봉맑셰 백화점 앞에서 충격을 겪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졸라가 묘사한 것처럼 백화점은 산업화, 도시화, 대량생산, 소비문화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서울은 아무것도 자발적으로 성취하지 못한 식민지 도시일 뿐이었다. 백화점은 민간상업자본으로 지었지만 일제의 치밀한 도시공간전략에 따라 세워진 식민건축임이 드러난다. 조선을 강점한 1910년대에는 식민지 경영에 최우선인 은행과 금융건축을 세웠다. 남대문로 일대에 조선은행을 포함해 6개의 은행을 세웠다. 1920년대는 2단계로 경성전기회사사옥 (한국전력)을 포함한 십여 개의 업무용건축을 세웠다. 여건이 조성되자 1930년대에 3단계로 미츠코시와 조지야(丁字屋) (미도파백화점)과 같은 상업건축이 들어섰던 것이다. 혼마찌에 대항해 조선인 박흥식이 자본을 대고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화신백화점도 이 때 세웠다.

        백화점은 서양건축사에서 결코 고상한 건축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의 랜드마크도 아니었다. 무목적의 배회가 허용되는 생경한 세속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원칙과 규범에 철저했던 고전 건축의 내부 공간이 해체되고 밖으로 열리는 근대도시의 중심에 백화점이 있었다. 성리학적 이념이 지배했던 한양에서도 물건을 사고파는 시전행랑(市廛行廊)은 가장 아랫것들의 공간이었다. 그러니 500년 수평도시 위를 갑자기 솟아 오른 미츠코시 백화점을 어떻게 느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암울한 현실과 문화적 동경이 교차하는 도시건축의 상징이었다. 미츠코시는 광복 후 동화백화점을 거쳐 신세계백화점으로 탈바꿈했다. 6.25 전쟁의 폭격에도 살아남아 암담했던 시대를 그린 박완서의 처녀작 나목의 배경이 되었다. 반면 조선 상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화신백화점을 1987년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우리 손으로 헐어버린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김성홍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