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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도시의 진정한 힘은 사람과 사람 (2011.07) 서평: 도시의 승리

도시의 진정한 힘은 사람과 사람

서평: 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 지음
한겨레, 책을 말하다. 2011.7.2, 11면 톱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85519.html
 

지난 10년간 세계 언론과 평단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건축물을 꼽는다면 단연 프랑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번쩍거리는 금속판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이 미술관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도시 조각품이다. 쇠퇴한 산업도시 빌바오를 단번에 전 세계의 주목을 끌게 한 이 기이한 미술관은 도시 르네상스의 전형이 되어 버렸다. 미술관을 보기위해 빌바오를 찾는 관광객 수만 한해 100만 명에 이른다. ‘구겐하임 신드롬’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과연 이처럼 하나의 건축물이 쇠퇴하는 도시를 단번에 부활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야심을 품은 정치인이라면 한번쯤 도전해 볼 문화전략이며, 건축하는 사람들로서도 무척 반길 일이다. 그런데 구겐하임처럼 매년 몇 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세운 영국 셰필드의 문화센터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실패했다. 빌바오에 대한 환상, ‘거대건축 지향주의’의 패착은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근사한 새 건물은 경관을 멋있게 보이게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도시의 근본 문제는 치유하지 못한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도시를 살리는 것은 건축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숙련된 사람이며, 세계경제와 연결된 산업이다. 500쪽이 넘는 묵직한 이 책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뒤져 본 곳은 참고문헌이었는데, 젊은 경제학자 글레이저가 도시의 부침을 분석하기 위해 어떤 이론적 지평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놀랍게도 현대 자본주의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번쯤은 건너 가야할 길목인 앙리 르페브르, 데이비드 하비, 에드워드 소자, 프레더릭 제임슨과 같은 후기 마르크시스트 연구자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글레이저의 뒤에 거목처럼 버티고 있는 스승은 1961년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쓴 제인 제이콥스다. 그는 도시계획가도 학자도 아니라 행동하는 언론인이었다. <도시의 승리>는 현대판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으로 읽힌다.  다만 제이콥스가 체험에서 우러나온 분노와 감성으로 호소했다면, 글레이저는 방대한 자료, 치밀한 분석, 정연한 논리로 무장한 채 조목조목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인류의 최고의 발명품은 도시며, 성공한 도시의 공통점은 똑똑한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는 곳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도시는 일자리를 만들고,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놀거리를 선사한다. 이런 시각에서 글레이저는 도시의 빈곤마저 살아 꿈틀거리는 도시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책 전반에서 글레이저는 ‘세계화’의 옹호론자 모습을 띈다. 경제의 장벽은 없애고, 다양한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교육경쟁력을 높여 인적 잠재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글레이저의 사유엔 도시정부가 현명한 정책을 견지한다면 도시는 윤활유를 친 수레바퀴처럼 잘 돌아갈 것이라는 낙관론이 깔려있다. 이점에서 그는 제인 제이콥스와 닮았다.

글레이저의 큰 그림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지만, 화석에너지의 위기의 시대에 미래 도시에 대한 논리적 전개는 흥미롭다. 첫째, 숲과 전원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은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사실이다. 전원 도시의 건물은 친환경기술로 지었는지 모르지만 일터를 오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더 많은 기름을 길에다 쏟아 붓는다. 탄소배출량을 줄이려면 사람들은 전원에서 나와 도시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 밀집된 도시일수록 정보기술이 대면접촉을 촉진시켜 더욱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도시의 밀도가 인간의 창조성과 직결되므로, 과거의 문화유산을 박제화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도시 내에 과감한 개발을 감행해야 한다는 경제학자다운 주장도 편다.

둘째, 도시는 작지만 패기 있는 기업이 경쟁할 때 번성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거대한 기업들은 단기적으로는 생산적일 수 있어도 장기적 성공에 필요한 역동적 경쟁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자동차산업의 신화도시 디트로이트의 몰락에 대해 글레이저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문제는 글레이저가 진단한 자동차중심의 미국식 라이프스타일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개발도상국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하지만 미국인은 중국이나 인도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줄이라고 설득할 자격이 없다. “에스유브이(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 운전자들의 나라가 자전거 운전자들의 나라에게 모페드(모터 달린 자전거)를 몰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387쪽)처럼 자신조차 위선적이라고 글레이저는 실토한다.

<도시의 승리>라는 근사한 제목에 끌리는 독자라면 두 가지를 유념하길 권한다. 첫째, 화려한 도시 이미지를 기대했다면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꼼꼼한 자료와 치밀한 논리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스스로 상상력의 세계에 빠져들라. 둘째, 이 책에서 한국적 해답을 얻고자 하는 조급함을 잠시 접으라. 경제학자로서의 당연한 한계이겠지만 글레이저의 이론을 도시건축의 현실에 적용하려면 분명 논박과 수정이 필요할 듯하다.

해박한 경제지식으로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폭넓게 들여다본 <도시의 승리>야 말로 ‘통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반가운 책이다.

김성홍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