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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철도역사, 어디에 숨었나 (2011.07)

철도역사驛舍, 어디에 숨었나

 

중앙일보, 2011.7.19, 오피니언, [삶의 향기]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699/5810699.html?ctg

 

고향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오랜만에 상경 기차에 혼자 몸을 실었다. 소백산맥의 준령을 힘겹게 오르고 나니 차창 뒤로 초여름의 신록을 힘차게 밀어낸다. 30년 전엔 홍익회에서 파는 삶은 달걀 한 꾸러미를 다 까먹고 한숨을 청해야 서울에 다다를 수 있는 먼 길이었다. 삼곡, 간현, 석불 이런 생소한 간이역까지 모두 섰던 60년대 완행열차는 7시간을 힘겹게 달려 청량리, 왕십리, 용산을 거쳐 종점인 서울역까지 갔다. 우리 고향은 한국에서 제일 긴 터널을 지나야 갈 수 있다고 서울 ‘깍쟁이’들에게 자랑했던 그 ‘촌놈’의 순진함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 먼 길을 이제는 기차가 3시간대에 주파한다. 더구나 양평을 지나면 수도권 전철과 교행하면서 서울은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이렇게 빠르고 편안한 기차가 한산하다. 서울까지 2시간대를 주파하는 고속도로가 뚫리고 난 뒤 ‘행락철 특별 관광열차’를 빼고는 기차는 느리고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부모님은 경로 우대가 안 되는 버스대신 기차를 고집하시지만 삶은 달걀을 까먹는 가족의 모습을 객실에서 보기란 무척 어렵다. 명절 기차표를 사려고 청량리역 광장에서 새벽부터 진을 친 귀향객의 머리 위를 대나무 장대를 휘휘저어 주저앉히던 ‘비인간적인’ 풍경,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통성명을 하는 순간 족보가 펼쳐지고 어느 마을 누구의 사촌, 선후배식으로 항렬과 서열이 쫙 정리되던 열차간의 대화도 우스운 옛이야기가 되었다. 고속도로와 고속철에 도저히 맞설 수 없는 기차는 서서히 보조 교통수단으로 밀려나고 있다.

철도는 도시를 잇는 연결망이기도 했지만 철도역사驛舍라는 새로운 건축유형을 낳았다. 수탈의 도구로 시작되었던 탓에 철도역사는 옛 고을을 압도하는 관문이 되었는데, 고향에서도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관아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수탑과 함께 역사가 서고 거기서부터 읍내로 내리뻗는 ‘역전驛前거리’가 났다. 철도는 마을을 두 동강내고 지나갔지만 읍내 사람들에게 역사는 번듯한 얼굴이었다. 밤이면 부랑자와 배회자들의 서식처였지만 그래도 대합실은 그들을 내치지 않는 ‘공공공간’이었다. 지저분했지만 상경한 소년의 눈에 비친 60년대의 서울의 역사 역시 만남의 장터였다. 오죽하면 주머니 사정이 시원치 않았던 때 ‘역전 시계탑’이 고향 사람들의 저렴한 약속 장소였을까.

그런 철도역사가 ‘복합’이라는 구실로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시야에서 묻혀버렸다. 60년대 상경열차가 지나갔던 청량리, 왕십리, 용산, 서울역 모두가 비대해졌는데 그중에서도 용산역은 200배로 커졌다. 하지만 승객이 이용하는 면적은 10%밖에 되지 않는, 배보다 배꼽이 큰 변종건축이다. 이제 철도역사는 만남과 이별, 설렘의 역지대閾地帶, liminal zone보다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소비 공간’이 되었다. 상업공간은 한 곳이 흥하면 다른 곳은 문을 닫는 냉혹한 ‘제로섬’ 게임을 벗어날 수 없다. 2000년 이후 들어선 서울의 민자역사는 대부분 10만 평방미터를 훌쩍 넘는데, 이때마다 100평방미터 크기의 동네가게 1,000개씩은 문을 닫아야 한다.

이 거대한 도시의 아침에 소박한 ‘역전驛前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밥집을 찾는 역발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김성홍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