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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갑’과 ‘을’이 마주보는 풍경 (2011.11.15)

갑’과 ‘을’이 마주보는 풍경

 

중앙일보, 2011.11.15, 오피니언, [삶의 향기]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664881&ctg=20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후 두 후보 선거 캠프를 방문했던 언론미디어학과 학생들의 관전 후기가 신문에 실렸다. 한 쪽은 “삽살개를 끌고 드나들 수 있는, 카페같이 편안한 분위기”였던 반면 다른 쪽은 “젊은이가 오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회사 같은 곳”이라는 직관적 분석이었다. 정치 공간을 가렸던 장막이 벗겨지고, 그 속살이 텔레비전, 신문, 스마트폰 화면에 뜨고 있다. 게다가 정치인들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연출해 가상공간을 통해 유포한다.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아 보좌진과 이야기하거나, 펜타곤의 지하벙커에서 국방장관에게 상석을 내준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은 고도의 기획상품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대통령이 저렇게 소탈할 수 있을까 감탄한다. 반면에 실각한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 바로 옆에서 걸어가는 것처럼 ‘포샵’ 처리를 한 사진이 들통나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들을 보좌하는 정치 연출가의 기획력 차이다. 그러나 현실 공간에서는 위압적인 분위기와 편안한 분위기는 그대로 느껴진다. 급조할 수도 조작할 수도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건축은 사회적 관계를 투영한다. 이것이 오래 지속되면 유형화 되고 규범화 된다. 칸막이와 표식이 없는 공간이더라도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는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사대부 집 안방 아랫목에 앉아 있던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들어오면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몽골 유목민의 천막집 ‘게르’는 사대부집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구조물로 보이지만, 화로의 전후좌우로 남녀, 주객, 노소, 상하의 신분이 구분되어 있다. 이처럼 우월한 지위의 ‘갑(甲)’과 그 아래에 놓인 ‘을(乙)’의 관계를 공간으로 조율하는 사람이 건축가다. 현대 건축 역사는 갑과 을의 위계적 공간을 수평적이고 열린 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여기서 한참 멀다.

 

#장면 1: 높은 분의 방에 들어가 보자.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커다란 책상과 번득거리는 자개 명패, 열지 않는 진열용 유리책장, 초록색 융을 깔고 유리로 덮은 테이블, 푹신한 소파. 수십 년간 고착화된 기관장 방의 코드다. 이런 과시적이고 권위적인 곳에 들어간 을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그 옆의 회의장도 마찬가지다. 긴 테이블 끝에 갑 중의 갑이 앉고, 지위나 연장자 순서대로 좌우에 줄지어 착석한다. 발표나 제안을 하러 온 을은 말석이나 뒤에 앉는다. 을이 잔뜩 긴장한 채 일어서서 보고를 하는 동안 갑은 음료와 다과를 들면서 이를 지적한다.

 

#장면 2: 각종 행사와 축제장에서도 갑과 을의 일방향성 관계는 계속된다. 열심히 준비한 사람들과 관객이 주인공이어야 하련만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정치인, 기관장, 단체장들이 단상에 올라가 테이프를 끊고, 서로를 치켜세우는 상투적인 축사를 지루하게 이어간다. 이렇게 김을 뺀 갑이 바쁜 일정을 핑계로 자리를 슬슬 빠져나간 후에야 을이 주인공이 되는 풍경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영화 ‘완득이’의 ‘똥주’가 욕을 섞은 막말을 내뱉어도 왜 우리들은 그를 따뜻한 선생님으로 받아줄까? 갑과 을 사이의 소통과 공감은 권위를 과시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높은 분들의 방과 회의장부터 바꾸자. 갑과 을이 마주 앉아 당당히 이야기하도록 하자. 회의 테이블 위에는 함께 목을 축이는 깨끗한 물 한 병이면 충분하다. 행사장의 높은 단상을 낮추자. 갑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을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고, 뒤에서 박수를 치시라.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 / 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