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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우리는 토건족인가 (2011.12.13)


우리는 토건족인가

문화/과학 68, 문화이론전문지, 2011 겨울, 문화과학사, 253-264쪽

요즘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의 만만한 단골 메뉴가 ‘토건족’이다. ‘토목’과 ‘건축’을 묶고 여기다가 ‘족속’을 붙인 말이, 지난 50년 동안 한국 경제의 한축을 떠받쳐온 일등공신에게 향하고 있다. 중동의 사막을 누비던 ‘건설역군’이 어쩌다가 나라의 곳간을 축내는 ‘토건족’이 되었을까. 건축으로 밥을 먹고 사는 나는 이 말에 반쯤은 공감하면서도 듣기에 편치 않다. ‘건축’과 ‘토목’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건축가가 ‘토건족’으로 매도되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작가로서 대접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권력에 편승한 부패한 집단과 고매한 문화를 일구는 개인, 이 두 얼굴이 밖으로 비춰진 한국 건축계의 모습이다.

법에서 정한 자격을 가진 직업군 중 이런 두 얼굴을 가진 것은 비단 건축가만은 아니다. 권력의 하수인으로 비난 받는 정치검찰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도 있다. 소크라테스 선서 같은 것은 던져버리고 의술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의사도 있지만, 무의촌에서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좋고 나쁨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법고시와 의사고시를 ‘패스’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그리 모호하지 않다. 그들이 하는 일과 시민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명확하다. 판검사, 변호사, 의사는 인체의 구금, 질병과 죽음이라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식을 독점한 사람들이다. ‘을’인 피의자와 환자는 ‘갑’인 법조인과 의사 앞에 절대적으로 숙이고 들어간다.

법조인과 의료인과 달리 전문직업인으로 ‘건축가’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모호하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에 등장하는 건축가는 예술과 문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막상 내 집을 지을 때는 아주 먼 사람들이 된다. 일반인들이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부동산중개소라고 한다. 공인중개사가 알고 있는 시공자를 소개해주고, 시공자는 같이 일했던 건축사사무소를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건축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란 구청에 제출하는 도면과 서류를 준비하고, 인허가를 대행해 주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실 ‘건축가’란 이름을 쓰지도 않는다. ‘설계사’ ‘제도사’란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불린다. 집을 한두 번 의뢰한 사람들은 웬만한 건축가만큼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집짓는데 나름대로의 식견이 있다고 믿는다. 예술가 같기고 하고 어찌 보면 ‘업자’ 같기도 한 얼굴이 건축가다. 이러한 양면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건축가의 두 면모

‘건축’이란 말은 대부분의 학문 분야가 그렇듯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아키텍처(architecture)를 번역한 말이다. 기원전 1세기 경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는 ‘건축’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그로부터 1400년 후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terti, 1404-72)는 이를 다듬어 서양건축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들과 시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한국인의 관점에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건축 이야기는 좋은 참고서일지는 몰라도 교과서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 근현대건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1920년대 정점을 찍었던 근대주의(modernism)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학자, 엔지니어들이 근대주의가 만든 규범과 이론을 사실상의 교본처럼 받아 공부했다. 2차적 영향을 준 것은 유럽의 근대주의를 수용하고 변형해 전 세계로 유포한 미국의 대학과 네트워크다. 현재 한국 건축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럼 2차 대전 후 건축의 대량생산 및 공급자로 떠오른 미국에서 건축가란 어떤 존재였던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가 건축가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미국의 건축학도들에게 전설적 고전으로 통했던 영화 <파운틴헤드>(Fountainhead, 1949)에서 주인공 하워드 로크(게리 쿠퍼 분)는 자신이 설계한 건물을 건축주가 맘대로 바꾸어 짓자, 연인의 도움을 받아 폭파해 버린다. 법정에서 선 로크는 자기변론에서 건축가의 권리를 유창하게 설파해 무죄 평결을 받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 짓고 있는 마천루의 꼭대기 층에서 연인과 만난다. 자신의 설계안을 바꾸었다고 건물을 폭파하는 중죄를 저지르고도, 고상한 정신세계를 지켜낸 문화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니 건축가는 얼마나 근사한 직업인가. 게다가 자신을 추종하는 미모의 여인까지 아내로 얻는 행운을 거머쥔 사나이가 되었으니. 이 영화가 나왔던 당시 미국에서는 근대주의 거장으로 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있었다. 라이트는 부인을 버리고 연인과 유럽으로 잠적했던 바람둥이였다. 할리우드는 라이트와 같은 인간형을 건축가의 전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 <은밀한 제의>(Indecent Proposal, 1993)에서 건축가 데이비드 머피(우디 해럴슨 분)는 예술가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건물을 폭파하는 대담성은 고사하고, 돈 때문에 아내(데미 무어 분)를 갑부(로버트 레드포드 분)에게 하룻밤 빌려주는 제의를 받아들이는 처량한 신세로 등장한다. 팍팍한 건축가의 현실이 할리우드 영화에 그대로 녹아있다. 그런데 두 영화 속 주인공이 보여준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두 건축가상은 공통점이 있다. 현실에서 한발 비껴나 있는 ‘로맨티스트’와 ‘에고이스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대중매체에서 그리는 건축가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20년전에는 건설현장에서 안전모를 쓴 엔지니어가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별안간 디자인을 구상하는 건축가로 ‘변신’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이 나오곤 했다. 요즈음 건축가는 현장기술자의 모습을 탈색한 상큼한 직업인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현실 세계를 헤쳐 나가는 치열함 같은 것은 묻어 나오지 않는다. ‘에고이스트’와 ‘로맨티스트’를 적당히 버무린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건축가와 사촌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계획가들은 건축가를 현실을 외면하는 순진한 이기주의자로 여긴다. 반면 건축가는 도식계획가를 미학의 깊이와 맛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규제와 제도를 들이대는 관료주의자로 본다. 협동과 협업을 중시하는 도시학과 개인의 창작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건축학이 충돌한다.


법과 제도 속의 건축가

건축은 과연 이처럼 낭만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나? 건축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건축사법」은 ‘설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설계라 함은 자기 책임 하에 건축물의 건축·대수선, 건축설비의 설치 또는 공작물의 축조를 위한 도면·구조 계산서 및 공사시방서 기타 국토해양부령이 정하는 공사에 필요한 서류(설계도서)를 작성하고 그 설계도서에서 의도한 바를 해설하며 지도·자문하는 행위를 말한다.” 건축을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궁색하기 그지없게 느껴진다. 예술품을 만드는 고도의 지적 작업은 고사하고, 시청이나 구청에서 인허가를 받기위해 잡다한 도서를 작성하는 업무라니 실망스러울 것이다. 이것이 1962년 제정된 이후로 60여 차례 개정을 거듭한 법에서 말하는 건축의 위상이다.

그럼 건축사(建築士)와 ‘건축가’(建築家)는 어떻게 다른가? 여기에 관해서 건축계 안에서조차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건축사’란 명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건축가’란 유사 명칭을 쓰고 있다고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반면 자신을 예술가(藝術家)와 작가(作家)와 동류로 여기고, 작품 세계를 일궈낸 소수만이 쓸 수 있는 이름이 건축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업역에 대한 방어, 단체 간의 알력, 엘리트 의식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건축사법」에서 정의한 ‘설계’는 법적 지위를 가진 건축사만이 할 수 있다. 반면 건축가는 일정 기간의 건축 교육을 받고, 건축 설계를 하는 직업인을 일컫는 일반적 칭호다. 건축사(建築士)는 건축가(建築家)의 부분집합인 셈이다. 달걀에 비유하면 건축사는 흰자(건축가) 위의 노른자다.

문제는 일반인들은 이와 정반대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건축사는 시청이나 구청 앞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인허가 업무를 대행하는 ‘업자’이고, 건축가는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가진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명함에 건축가라고 쓰는 건축사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건축가(작가)-건축사(업자) 논란에 가려진 건축의 본질이다. 하나의 건물은 기획, 계획, 설계, 시공, 관리라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세워진다. 좋은 건물을 만들려면 이 모든 과정에 건축가가 참여해야 한다. 홀로 방에 앉아 설계를 구상하는 일은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한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설득하고, 조율하는 일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건축가는 ‘작가’라기 보다는 ‘조정자’에 가깝다.

작가와 예술가는 소비를 예측하고 생산하지 않는다. 물론 작품을 소비하는 독자와 딜레탕트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지만 이들의 작업의 원천은 자발적 창작의지다. 반면 건축가는 건물을 의뢰하는 건축주가 없으면 행위를 시작할 수 없다. 건축은 창작과 예술행위가 아니라 특별 주문생산을 하는 서비스업이다. 설사 예술적 직관으로 경지에 오른 건축가라고 하더라도 협업과 시스템이 없으면 건물을 구현할 수 없다.

건축의 삼각축과 양면성

고대 로마의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을 이루는 세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건축은 튼튼하고(firmistas), 아름다우며(venustas), 쓸모가(utilitas)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천 년 전에 만든 이 단순 명쾌한 정의는 현대건축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서양건축의 공리(公理)가 되었다. 이를 현대적 건축 개념으로 바꾸면 구축(構築, tectonic), 시각(visual), 공간(spatial)이다.

첫째, 더 크고 더 높고 더 복잡한 내부 공간을 만들면서도 자연광이 들어오는 따사한  실내 공간을 견고하게 만드는 기술 혁신은 서양건축사를 관통하는 줄기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판유리의 제작이 가능해진 19세기 중반까지 기술의 딜레마는 계속되었지만, 이를 극복하자 근대건축이라는 전무후무한 전 방위 건축예술 운동이 가능해졌다.

둘째,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짓는 기술은 건축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견고하면서도 질서를 갖는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이건 위상 기하학이든 기하학은 건축을 만드는 객관적 논리, 선험적 법칙, 혹은 주관적 경험 체계를 구현하는 원리로 작동한다.

셋째, 건축의 본질은 ‘보는 것’(感覺), ‘인식하는 것’(知覺)이면서도 ‘살아가는 곳’이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대상이기 이전에 사회적 마당인 것이다. 사람들은 형태를 바라보고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움직이고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든다. 건축의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삶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바로 건축과 시각 예술과의 차이가 여기에서 생겨난다.

문제는 ‘공간’은 비어있으므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벽, 지붕, 바닥, 기둥과 같은 구축과 미학의 대상으로만 모습을 드러낼 뿐 스스로는 형상을 가질 수가 없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면 산업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건축 공간은 극단적으로 추상적이거나 초현실적인 것이 된다. 건축이론은 철학과 심리학을 등장시켜 공간을 현학적이고 애매한 것으로 종종 만들어 버린다. 근대건축의 거장 건축가들이 구사하는 ‘상호 관입하는’ ‘부유하는’ ‘무한히 확장하는’ 공간과 같은 언어는 대중이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 반면, 산업계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계량적 틀로 공간을 전환해 버린다. ‘몇 평’ 아파트와 ‘몇 천 평’ 땅이 그것이다.

건축의 진정한 힘은 형태 덩어리가 아니라 공간이다. 중세도시의 권력은 교회였고, 사회주의 도시의 권력은 군부이며, 현대도시의 권력은 상업자본이다. 당대 최고의 건축이 어떤 것인지를 보면 드러난다. 교회와 파시스트 건축, 그리고 마천루를 보라. 그런데 이들의 이미지에 가려진 숨은 힘은 삶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공간구조다.

현대 건축의 양면성과 모호함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삶의 공간의 이론과 실천은 멀리한 대신 미학과 기술을 줄다리기 했다. 나는 서양의 근대주의 건축이 도시와의 결별을 전제로 진행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시각 예술과의 밀월 관계를 가졌던 건축은 기술과는 결코 갈라설 수 없었지만 공간을 다루는 도시학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예술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건축의 정체성을 잃은 단순한 기술자로 전락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건축가들은 예술가의 옷을 입은 기술자의 지위를 얻었지만 대신 공간 권력의 각축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거나 배제되었다. 공간을 멀리한 건축가는 미학의 뒤로 숨거나, 자본과 권력에 순응하는 길 밖에는 없다.

근대주의 이후 한때 건축계에는 무슨 양식, 무슨 사조, 무슨 주의(主義)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류를 내세운 이론과 비평이 범람했다. 상업 자본주의가 팽창하던 시점과 일치한다. 후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예술변동을 분석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18~19세기 말까지 건축가는 왕실과 부르주아지의 든든한 후원아래 생존할 수 있었는데 그 배경을 시장 자본주의(market capitalism)로 본다. 시장 자본주의가 옹호하는 것은 사실주의(realism)예술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시장 자본주의는 점차 독점 자본주의(monopoly capitalism)로 옮아갔고 모더니즘의 예술과 건축과 공생했다. 과학의 객관성, 세계의 보편적 질서위에 팽창할 수 있었던 독점 자본주의하에 건축은 사회적 현실보다는 자율성과 내재적 논리를 내세웠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독점 자본주의는 다국적 자본주의(multinational capitalism)와 소비 자본주의(consumer capitalism)로 바뀌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배경이다. 제임슨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생산, 소비, 재생산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를 은폐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예술과의 관계를 한국 현대건축에 그대로 투사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이 수세기에 걸쳐 겪어왔던 자본주의를 한국이 불과 50여 년간 압축 성장을 통해 흡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건축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 열매를 따 먹고 몸집을 키워왔다. 재벌의 거의 대부분이 건설사를 만들었고 상품생산과 병행하여 부동산 개발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했다. 국가는 전폭적으로 이를 지원했다. 이런 고도 성장기에 한국 현대 건축가가 탄생했다. ‘건설’이 ‘건축’을 압도하고, 건설현장의 ‘건축기사’나 건축사사무소의 ‘건축가’나 대학에서 받았던 교육이 별반 차이가 없었던 시대였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건축 문화를 말하기에는 너무나 팍팍한 시대였고, 그 이후에는 전국을 불어 닥친 부동산과 개발의 광풍 속에 건축은 묻혀 버렸다.

물론 김수근과 김중업과 같은 시대를 앞서간 건축가들이 있었다. 근대주의 거장들이 했던 것처럼 김수근은 한국 현대건축의 씨앗을 뿌리고, 예술계와 교류하고, 건축의 자존감이 무엇인지를 각인시켰다. 그러나 이들 역시 질풍노도의 개발시대 울타리 안에 있었다. 문화 엘리트를 특별히 대우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정권을 정당화하고, 군사 문화의 결핍성을 숨기려고 했던 관료들이 없었다면 김수근은 한국 건축가의 아이콘으로 뜨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 1세대 건축가들은 서양의 근대주의와 전통의 넓은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가 가장 큰 숙제였고, 작품에는 새로운 한국성의 실험이 배어있다.

그러나 도시와 건축 공간의 사회적 현실을 정면으로 맞닥트리고 작품 속에 녹이지는 못했다. 그들은 근대주의의 학습자였고, 문화 엘리트였다. 그들 옆에는 건설역군들이 있었다. 이렇게 ‘건축가’와 ‘토건족’은 정치권력과 공생하며 같은 시대를 풍미했다. 80년대 후반부터 건축계에는 공간사회적 정의를 위한 운동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이 둘 사이에서 갇혀 들리지도 않았고 동력도 얻지 못했다.

토건족에서 공간의 조율사로

건설신화의 단 맛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설산업계가 토건족으로 매도되는 당연한 결과다. 또한 구축과 미학에 숨어 공간사회적 문제에 침묵했던 건축계도 비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건축이 삶의 공간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결코 저항의 사회학은 아니다. 근대주의가 절정에 오른 시기에 거장 건축가들은 명성만으로도 많은 사업을 수주할 수 있었다. 건축은 고급문화의 첨병이었고 건축가는 소수의 문화향유자나 권력의 상층부만 상대하면 되었다. 때문에 그들은 건축의 공간사회적 정의를 부르짖는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낭만의 시대가 저문 지 오래다. 세계화 시대에 건축가들은 주어진 일감을 입맛에 따라 고르거나 거부할 겨를이 없다. 이제 일감을 찾아 나서고, 심지어 일을 만들어야 한다. 건축가의 입지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한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시대정신이나 윤리성과 같은 거대 담론을 유보하고 국경을 넘어 넓은 시장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누렸던 건설신화가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건설산업계 안에서조차 이제 부수고 새로 짓는 것보다는 고쳐서 사는 것으로 건설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토건족으로 매도당하는 것은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부문별하게 짓는 것에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양’ 중심에 몰입해 ‘질’과 ‘격’을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 도시와 건축 공간은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각종 대형 복합건축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면서 비싼 상업공간은 넘쳐나는 반면 중소상인들의 터전인 골목길의 근린생활시설은 경쟁에 밀려 쇠퇴하고 있다. 수도권 대형 아파트는 입주자를 찾지 못해 비어있는데 도심에서는 일하는 젊은이들이 감당할 만한 소형 주거는 턱 없이 모자란다. 막대한 예산을 들려 지은 각종 지자체의 문화시설은 소프트웨어가 빈곤해 활용이 잘 안 되는 반면 일상의 문화적 공간은 상업공간에 압도되고 있다.

2천여 년전에 비트루비우스가 내인 명징한 정의, 건축은 튼튼하고, 아름다우며,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세 마디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마지막의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도시에서 재정의 되어야 한다. '쓸모'의 기준과 시각은 개별 건물에서 도시 단위로 확장되어야 한다. 넘쳐나서 쓰지 못하는 공간은 줄여서 절실한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 높은 벽으로 에워싸인 거대한 아파트 단지, 상업자본에 종속된 공룡 복합건축, 각종 도시의 이방지대의 사이에 놓인 일상의 공간이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사는 곳, 일하는 곳, 소비하는 곳이 한데 얽혀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서민과 중산층, 일하는 젊은이 들이 활동하는 저변을 살려야 한다.

앞으로 토건족으로서의 건축가들은 혹독한 체중 감량에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2007년 한국의 건설투자 비율은 17.9%로 OECD 가입국인 독일,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일본의 평균치 보다 7% 이상 높다. 개발도상국에 속하는 멕시코보다도 4% 이상 높다.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국가부도까지 거론되는 스페인이 예외다. 그러나 2009년 건설산업계의 한 연구원은 국내 건설산업은 산업의 수명 주기상 이미 성숙기 단계에 진입했으며, 2015년 이후 성장 둔화가 본격화되고 2020년에는 GDP에서 건설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11% 정도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국내에서 토건족으로서의 할 일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조율사로서의 건축가는 할 일이 너무 많다.

이런 일에 덤벼들기 전에 건축가들은 우리끼리 속삭이는 미학과 기술의 언어에 갇히지 말고 대중과 소통하는 공간의 언어부터 되찾아야 한다.

*각주 위치는 생략하였음을 밝힙니다.
1) 건축사법 제2조(정의) 제3호
 2) 이 소단원은 『도시 건축의 새로운 상상력』 (현암사, 2009) 중 “건축의 세 가지 딜레마” (29~45쪽); “제3의 공간”(46~53쪽); “다시 뜨는 동아시아 도시”(207~221쪽)의 일부를 발췌, 수정하여 집필하였음을 밝힌다.
 3) 김성홍, 「2000년 이후 도시건축의 대형화와 건축사사무소의 변화에 관한 연구」, 大韓建築學會論文集 계획계 25권 10호 통권 252호, 2009, pp.121-130.
 4) 한국 건축계, 산․학의 현주소「건축과 사회」, 제19호․2010 봄, 권두언, pp.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