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onomad의 글쓰기

중간지대에 선 한국 건축가들 (2011.12.2)

중간지대에 선 한국 건축가들
Korean Architects Standing in the Middle

<한국건축의 새로운 지평 New Horizon in Korean Architecture>展

BankART 1929, Yokohama, 2011.12.2.-12.21
참여건축가 : 곽희수, 김동진, 김승회+강원필, 김찬중+홍택, 김헌, 문훈, 민규암, 민성진, 신창훈+장윤규, 유현준, 윤승현+서준혁, 윤웅원+김정주, 임재용, 조정구, 최욱, 한형우. 이상 16인(팀), 총괄기획 : 임재용 (한국) + Masashi Sogabe(일본)
같은 제목의 책, USD Publishing Co. 2011, pp.6-11.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건축계에 드러난 두드러진 현상을 꼽으라면 건축교육과 해외교류의 질적 변화다. 5년제 건축학교육이 설계 중심으로 바뀌고 실무계의 많은 건축가들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론과 실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화학적 융합이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각종 비엔날레, 전시회, 강연회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해외교류의 폭이 넓어졌다. 특히 해외경험을 쌓은 젊은 건축가의 층이 두터워지면서 특정 집단이나 학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이전의 전시회와 다른 해외건축전의 물고가 트이고 있다. 건축의 문화적 잠재력을 인식한 정부의 재정적 지원도 가시화되고 있다. 2011년 12월 일본에서 열리는 <한국건축의 새로운 지평 New Horizon in Korean Architecture>展 (이하 한국건축전) 역시 이런 큰 흐름의 한가운데 놓여있다.

이번 한국건축전은 2010년 정부(문화체육관광부)가 해외건축전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의지를 건축계에 밝히면서 시작되었다. 2007년 12월 프랑크푸르트 독일건축박물관(DAM)에서 처음 열린 후 유럽 4개 도시를 순회하고, 2010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무리한 <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건축전>은 한국의 도시 현상과 17인 건축가의 작품을 중첩시킴으로써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메가시티전은 참여건축가의 자발적인 기획으로 시작되었으나 성과와 파급력을 인지한 정부가 그 후 지원에 나섰었다. 이번 한국건축전 역시 정부의 지원 아래 건축가를 초대했다는 점에서 메가시티전의 후속전 성격을 갖고 있다. 다만 메가시티전이 기획, 참여건축가 초청, 기금조성, 정부지원 요청의 순서로 이루어졌다면, 이번 한국건축전은 정부지원 결정, 건축가 초청, 기획이라는 역순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이번 한국건축전 서문을 급히 요청받고 아주 짧은 글에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개별 건축가와 이들의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이글이 건축계 안에서 유통되는 난해한 담론이 아니라, 건축 밖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건축가 개개인보다 이들이 모여서 만드는 큰 그림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16인(팀)의 참여 건축가는 한국의 도시와 건축 지형도의 어떤 지점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16인의 글과 작품을 속독하면서 이들을 큰 틀에서 묶거나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주 흔한 학연, 실무 배경, 소그룹 모임과 같은 동질성에 기초한 강한 네트워크가 작동한다고 볼 수도 없었고, 이들의 건축적 태도, 관점, 그리고 이들이 생산한 건축을 묶는 공통분모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건축의 울타리를 살짝 벗어나 경제, 사회, 문화적 틀거지에서 16인을 바라보는 것이 글을 더 쉽게 풀어갈 수 있는 생각이라 들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외인적外因的, exogenous’ 접근이다.

한국 현대건축의 세대(世代)

해방 후 한국 현대건축은 정치, 경제적 맥락에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해방 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약 40년간으로 한국 전쟁과 군사 쿠데타에 이은 장기 집권, 산업화를 통한 고도성장과 함께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던 시기다. 둘째, 1980년대 중반부터 외환위기를 맞은 1990년대 말까지의 약 15년간의 시기다. 외적으로는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 행사를 개최하여 경제 성장의 결실을 과시했고, 내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전면 경제 개방을 서둘러 한 결과 외환위기를 맞았던 시기다. 셋째, 20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의 10여 년간의 시기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산업구조가 신자유주의 체제에 편입되고 경제의 양극화와 함께 사회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 시기다. 물론 ‘현대’라는 용어부터 시작해서, 현대건축의 출발을 해방 후부터 잡는 것에 논란과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다. 또 65년간의 격동의 변화 시기를 단 세 시기로 구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경제적 큰 맥락에서 이틀을 벗어나기는 힘든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건축의 1세대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이미 작고를 했거나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는 세대다. 1세대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김수근과 김중업이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긴 것도 이시기다. 이들에게 가장 큰 숙제는 해외에서 습득한 근대주의 건축을 어떻게 전통건축과 결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1960년대 부여 박물관으로 왜색 시비에 휘말렸던 김수근은 1970년대 들어서서는 추상적 한국성을 찾는 쪽으로 돌아서게 된다. 김수근은 더 나아가 예술계와 교류하고, 건축(가)의 자존감을 세우고,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많은 후학들을 길러낸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전통을 재해석하려고 했던 1세대의 ‘건축 안’의 노력은 역설적으로 ‘건축 밖’의 군사 정권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문화 엘리트를 특별히 대우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정권을 정당화하고, 군사 문화의 결핍성을 숨기려고 했던 관료들이 없었다면 이들은 한국 건축가의 아이콘으로 뜨지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경제, 사회적 현실을 정면으로 맞닥트리고 이 문제를 도시 건축 속에 녹이지는 못했다. 그들은 근대주의의 학습자였고, 문화 엘리트였다. 그들 옆에는 건설역군들이 있었다. 이렇게 ‘건축’과 ‘건설’이 정치권력과 공생한 시대에 1세대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활동이 두드러진 2세대는 1세대에게 직접적 영향을 받고 이를 작업의 뿌리로 삼거나 유지함으로써 정당성을 얻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한국성의 지속적인 재해석, 건축을 통한 공공성의 회복, 상업자본과의 거리 두기 등 거대 담론을 내세우며 작가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집단속에서 이를 공고화하려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980년대 중반부터 독자적 활동을 시작한 2세대와 1990년대 말부터 두각을 나타낸 3세대와 차이는 신체적 나이라기보다는 학습과 경험의 배경, 관점, 태도, 연대의 방식에서 구분된다. 나이로는 2세대 속하지만 태도와 관점은 3세대의 색채를 띠고 있는 건축가가 있는 반면, 3세대에 속하는 연령대이지만 2세대에게 강한 동질성을 느끼는 건축가도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어려운 과정에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제3세대의 대다수는 해외에서 유학하거나 실무를 익힌 경험을 갖고 있다. 3세대의 한 부류는 한국성의 재해석, 공공성, 건축의 윤리와 같은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건축의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해서 열린 실험을 감행한다. 건축주의 성격, 그들을 만나 일을 수주하는 방식, 짓는 건축유형도 다양해졌다. 제3세대는 위계적 연대보다 수평연대에 익숙하다. 한편 3세대의 다른 부류는 기업형사무실의 조직, 자본, 기술, 관리의 위력과 잠재력을 맛보았다. 이들은 생존의 험한 파고 속에서 공공성, 윤리, 실천과 같은 거대담론을 논할 여유가 없다. 생존과 실험은 분리할 수 없는 현실로 작품에 이것이 그대로 녹아있다.

건축가를 둘러싼 현실

이런 거친 세대적 틀거지로 참여한 건축가를 들여다보았다. 우선 신체적 연령으로 보면 4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으로, 요즘 ‘젊은 건축가상’의 기준으로 꼽는 만 40세전후면서,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정치적 격변을 학창시절에 목격한 80학번 이후의 젊은 층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서울 소재 몇 개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점에서 교육 배경의 범위가 좁지만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경험의 폭을 넓혔다. 또한 유학 1세대가 공부를 마친 후 곧바로 귀국하여 학계와 실무계에서 비교적 쉽게 중요한 위치를 선점했던 것과는 달리, 해외의 건축사사무소에서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체득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학연에 기초한 우리 사회의 닫힌 연대에 기대지도 않고 2세대처럼 사회적 이슈를 앞세워 집단적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반면 이들은 대학과 실무를 넘나드는 가로지르기를 하며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건축학교육이 5년제로 전환되고, 인증제도가 도입되면서 과거 일본의 학제를 모델로 삼았던 건축교육이 미국과 유럽식 설계 중심으로 바뀌었다. 교육의 주체도 연구자에서 현장가로 옮겨가고 있다. 참여 건축가 대부분은 대학에서 건축설계 스튜디오를 담당하고 있고, 전임교수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설계실은 교육 현장이며, 작업의 실험장이며, 학계와 실무계의 가교이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계속되는 건축의 양극화와 건축사사무소의 대형화는 아틀리에 사무소의 생존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데 대학은 이들에게 생존의 중간지대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건축계도 이와 비슷했다. 근대주의의 거장 건축가들이 사라진 빈자리를 실험적 성향의 소수 건축가들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대학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실제 지은 건물보다는 대중매체나 글을 통하여 담론을 형성해나간 부류였다. 이른바 ‘페이퍼 아키텍트paper architect’들이었다. 한편 기술과 조직을 바탕으로 한 대형사무소는 건축의 절대적 원칙을 고집하지 않고 비즈니스와 마케팅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전 세계의 상업건축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두 부류의 건축가 집단 사이에서 탄탄한 건축가 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작은 규모에서 새로운 공간, 형태, 구축의 실험을 축적하면서 서서히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단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이들은 최고 수준의 기술자문을 받으면서 더욱 과감한 혁신을 주도했다. 미디어에 등장하기 전에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점에서 이번 참여자들은 현장에서 완전히 유리된 ‘페이퍼 아키텍트’와 대형조직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꿈틀거리는 건축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결코 녹녹치 않다. 문민정부 이후 우리 사회의 곳곳에 스며든 신자유주의는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건설주도형 산업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겪고 난 후에도 우리나라의 건설투자비율은 여전히 OECD국가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에서 고공행진을 계속해왔다. 민간건설 부문은 극심한 정체가 계속되어 왔지만 정부는 인위적인 부양정책으로 공공부문에 직접적인 투자를 해왔다. 그러나 건설이 주도하는 산업구조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앞으로 공공이 주도하는 거대한 도시 건축 사업이 줄어들고, 민간부문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에서 고쳐서 쓰는 것으로 급격히 옮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흐름을 먼저 읽은 건축가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포진하는가에 한국 건축의 미래가 달려있다.

새로운 지평

이번 참여건축가들의 작품에서는 이미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이들이 내놓은 작품 중에는 지역도서관, 커뮤니티센터, 가로 시설물 등 몇 점을 제외하면 대부분 민간 프로젝트다. 2000년대 이후 건설산업계에는 지구단위계획의 법제화, 공공사업의 일괄계약방식(턴키방식)과 건설관리(CM)의 본격적 시행, 민간투자유치사업(BTL), 프로젝트파이낸싱 사업(PF), 부동산 개발업자(시행사)의 등장, 지방자치단체의 사업 추진으로 대형 사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건축은 대형화, 수직화, 복합화되었다.


그런데 이번 참여 건축가는 이런 대형 도시 건축과 거리가 멀다. 대형 프로젝트의 건축주가 개인에서 공공기관, 부동산개발업자, 건설사로 바뀌면서 조직과 자본을 축적한 대형 건축사사무소의 독식체제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소규모 공공 프로젝트마저 저가 입찰제도, 질보다는 양 중심의 실적 평가, 드러나지 않는 공공기관의 ‘전관예우’의 관행 때문에 작품성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에게 남아 있는 곳은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사업과 거대 상업자본이 주도하는 각종 개발사업의 틈새시장이다.

건축유형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단독주택, 펜션, 게스트하우스, 근린생활시설, 상업갤러리, 개인도서관, 학교처럼 보편적 유형뿐만 아니라 아파트 모델하우스, 골프 클럽하우스, 한옥 호텔, 도시 단독주택, 주유소처럼 일반인들에게는 가깝지만 건축가들과는 멀었던 유형이 등장했다. 건축가에게 의뢰를 하지 않았거나, 설사 의뢰를 했더라도 작품성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에게 까지 오지 않았던 것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소 상반된 해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건축에 대한 전반적 의식 수준이 올라가면서 건축가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로 보는 것이다. 일상 환경에 까지 건축가들의 손길이 미친다는 것이다. 반면 디자인의 경제적 가치에 눈을 뜬 상업자본과 건축가들의 밀월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건축도 상품처럼 미화할 수 있고 곧 돈이 된다는 ‘디자인 경제주의’는 지난 수십 년간 건축계를 지배한 ‘건설신화’와 일견 달라 보이지만 동전의 양면일 수 있다. 

1세대 건축가들이 활동했던 시기에는 이런 건축 유형이 없었고 설사 있었더라도 일을 얻기 위해 까다로운 상업 자본에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정치권력과 공공기관이 쏟아내는 일감이 넘쳤고, 민간자본이 만드는 사업도 이처럼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았다. 반면 2세대 건축가들은 급격한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소수의 1세대 주자들이 가졌던 지위와 품격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었다. 그들이 구사하는 묵직하고 난해한 언어의 이면에는 건축이 직면한 복잡한 현실과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번 건축전에 참여한 3세대의 건축가들은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대신 냉엄한 현실과 대면해야 한다. 생존과 실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이들에게 공공성이나 윤리와 같은 이념적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존의 위한 절박함은 유형뿐만 아니라 작품의 규모에서도 드러난다. 학교, 골프클럽하우스, 아파트 모델하우스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연면적이 5천m2 이하다. 사무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적어도 1만평(약 3만m2) 이상은 돼야 한다고 건축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런 규모는 대형 사무소의 몫이거나 해외 초청건축가에게 돌아간다. 각종 건축 전시회에 선보이는 건축물의 대부분이 2천m2 미만의 주거와 상업시설이라는 사실이 이를 확인해주고 있다.

16인 건축가에게서 나타난 희망의 신호는 독특한 한국의 도시 현실을 건축 공간에 담아내는 유연성이다. 건축주가 원하는 복합적이고 때로는 상충되는 프로그램을 창작의 걸림돌로 여기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동인(動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접근 태도와 방식은 다르지만 16인의 작품에서는 과감하고 신선한 구축성이 돋보인다. 프로그램과 구축성을 통한 건축의 완성도는 역설적으로 2세대가 지고 있었던 묵직한 언어와 담론을 내려놓음으로 가능해졌는지 모른다.

나는 이번 한국전에 참여한 건축가들을 ‘중간지대에 선 건축가들’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개발신화와 얄팍한 디자인 경제주의의 중간지대, 대형건축사사무소와 ‘허가방’의 중간지대,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공룡복합건축의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와 중간건축이 서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서 있는 지점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이 우리 도시의 현실에 깊이 발을 담그고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있는가에 한국 건축계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이 들의 뒤에는 변화하는 시대에 당당하게 홀로서는 중견 건축가의 모델에 목마른 젊은 건축가와 학생들이 있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KIM, Sung Hong, University of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