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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건축에서 본다는 것 (2000.02)

건축에서 본다는 것   
서울산업대(서울과학기술대) 강연

우리는 매일 일터로 나가거나 돌아오는 과정에서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다양한 이미지들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생산되고 소비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존 버거 (John Berger)는 그의 저서 “보는 방법(Ways of Seeing)"에서 ”본다는 것은 선택이다.“ 라고 말한다. 즉 본다는 것은 수동적 반사행위가 아니라 의지가 수반되는 적극적 행위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이미지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는 건축가들이 본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 과정과 결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건축에서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다른 관점이 있는가를 논의하기 이전에 회화와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후반에는 주로 건축작품의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면서 건축가들이 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을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현상설계에서 당선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소개한 신문기사의 사진을 보면 그 주석이 재미있다. “마포나루 황토돛배의 주름과 전통 방패연 모양을 본떴다”라는 문구는 건축을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보편적 방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문구와 그 것이 지칭하는 대상의 관계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황토돛배라든가 전통방패연처럼 ‘구체적인 이미지’를 전달의 매체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경기장의 일차적인 목적은 운동선수들이 경기를 하고 관중들이 이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경기장의 객석이 혁신적으로 개선되었다든지 경기장 그라운드가 기술적으로 진보되었다는 내용 대신 ‘전통의 모양을 땄다’ 라는 건축의 부가적 기능을 화두로 삼고 있는 점이다. 건축이 가지는 일차적인 기능, 즉 ‘행위’의 場으로서의 건축보다는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건축이 강조되고 있다. 셋째는 경기장 지붕을 보고 돛대와 방패를 연상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는 물리적 대상과 그 것이 지칭하는 의미를 사회집단이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아프리카 사람에게 황포돛배와 방패연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무런 공감을 얻지 못하거나 다른 의미로 해석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전달할 때 구체적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전제는 건축뿐만 아니라 상업광고에서도 나타난다. 신문사이에 넣어 배달되는 광고전단이다. 등산화 광고를 보면 남자 등산화와 여자 등산화 두 켤레가 있는데 색상, 값, 소재, 사이즈를 누구나 비교,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이미지와 문자까지 곁들여 기획된 것을 볼 수 있다. 언어와 이미지의 두 가지 소통방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빨간 구두광고에서는 가격, 색상, 소재 등과 같은 다른 신발과의 비교내용 대신 태양그림과 붉은 배경이 있을 뿐이다. 이 광고를 보는 사람들은 앞의 광고와는 달리 ‘이것은 여자의 구두인데 붉은 색조의 이미지는 정열과 성을 상징할 것이다’와 같은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좀더 애매 모호한 옷 광고(그림 1)를 예로 들어보자. 광고지면에서 여자 옷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미미하다. 바위의 배경과 여자 모델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정말 옷에 대한 광고인지를 인식하기조차 어려운 경우이다. 신발과 여성의류 광고의 차이점은 이렇다. 전자는 불특정다수를 위한 것이고 뒤로 갈수록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앞의 것은 시골 할아버지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뒤로 갈수록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인식하고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함축적인 내용을 내포한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아무런 의지 없이 망막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이미지가 가진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다. 닭고기를 파는 가게(그림 2)를 보면 닭과 유사한 모양을 건축물에 표현했다. 그것도 모자라 ‘Kentucky Fried Chicken'이라고 높은 간판을 설치하였다. 건축가 혹은 주인은 닭과 건축 두 가지 이미지가 유사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쉽고, 강하게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의 극단적인 예이다. 미국 어느 대학의 제조업연구센터의 입구를 보면 건축가는 제조업과 관련된 이미지를 나름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직물산업에서 필요한 기계의 나사모양을 유추해서 건물의 입구에 기둥으로 세웠다.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KFC건물을 볼 때와는 다른 해석을 하게된다. 전자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사용했고 후자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대상과 그것이 지칭하는 것이 닮았을 때만 그 관계를 인식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는 예를 들어보자. 서양건축사를 배운 건축가들이라면 미국의 국회의사당 건물(그림 3)이 유럽의 여러 건축양식을 복합적으로 절충한 건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이 건물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헌법을 만들고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곳, 즉 국가, 법, 정의, 권의 등 추상적 개념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워싱턴 모뉴멘트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복제한 모조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에게는 침략보다는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성스러운 탑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오벨리스크를 보고 영웅주의 혹은 애국주의를 생각하는 것과 KFC 건물을 보고 먹는 닭을 연상하는 것은 다른 인식과정을 가진다. 오벨리스크와 애국은 시각적으로 전혀 동질성이 없지만 그 사회와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그것을 보와 왔던 구성원은 관습적으로 둘 사이를 연결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이론을 미국의 문예비평이론가가 그림으로 옮긴 것(그림 4)이다. 이 그림은 사람을 상형문자 같은 것으로 추상화시키고 마지막에는 ‘MAN' 이라는 언어로 표현하는 인식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구체적 대상이 없는 머리 속의 이미지도 있다. 우정, 사랑, 정의, 악 등은 육안으로 보고, 만질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이다. 감각적, 육체적 상황과 연결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전혀 감각적 요소가 배제된 이미지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인식한다는 자체는 근본적으로 언어와 관련이 있다. 머리 속의 이미지가 언어에 연결되지 않으면 보는 것이 아니다. 시계를 보면 ‘시계’라는 단어, 즉 소리이든 문자이든 언어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이미지는 냄새, 촉각 등을 동원할 수 도 있지만 결코 언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맹인 안마사가 시력을 찾으면서 겪게되는 인식의 혼란을 그린 최근의 미국영화 ‘사랑이 머무는 풍경’은 이미지, 개념, 언어 사이의 관계를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발 킬머와 달리 눈을 가진, 그리고 말을 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언어는 이미지와 개념을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문자와 시각예술의 표현방법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세잔느(Cezanne)의 생 빅토아르산(Mont Sainte. Victoire)에서 특별히 느낌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뽑아내라고 하면 산의 모양인지, 숲의 모양인지, 집의 모양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 세잔느의 붓 터치, 비례, 색상이 꽉 짜여져 전체가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그림은 구성상(syntactically)이나 의미상(semantically)으로 치밀한 구조와 연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따로 떼어낼 단위요소가 없는 것이다. 몬드리안(Mondrian)의 그림과 같이 추상적인 그림에서도 이 점이 적용된다. 면과 면의 관계, 비례관계가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떼어 낼 수가 없는 그림 전체를 만들어 낸다. 물론 어느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강조될 수는 있지만 그 의미는 그 것이 놓여진 자리에서 벗어나면 상실된다. 부분의 의미는 전적으로 전체와의 관계성에서 맺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문자는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따로 뗄 수 있고 단속적이다. 문자가 떨어져 있다고 해서 의미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글씨의 모양과 터치에 관계없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서 붓의 터치가 바뀌면 의미는 달라진다. 넬슨 굿만 (Nelson Goodman)은 “그림은 연속적이고 글은 단속적이다“ 라고 말한다. 그림을 아날로그, 문자를 디지털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가장 명확한 비교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회화와 건축은 어떻게 다를까? 생 빅토아르산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감흥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림을 만진다고 해도 2차원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볼 수는 있지만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을 허상적 공간(Virtual Space)이라 부른다. 즉 그림과 우리를 매개하는 것은 시각밖에 없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뜨(Rene Magritte)의 그림은 우리가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상식(Common Sense)>은 2차원적으로 그려져야 할 과일과 그릇이 빈 캔버스 위에 3차원적으로 놓여져 있다. 마치 2차원의 캔버스 위로 돌출했거나 그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인 것처럼 생각된다.

<두 가지의 비밀(The Two Mysteries)>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당연히 이젤 안에 있는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고 진짜 파이프는 이젤 밖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파이프 모두 그림 속의 정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 문구는 의미를 상실한다. 마그리뜨는 감상자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림 속의 공간은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다른 세계임을 표현하고 있다. 현실과 환영의 존재론적 차이, 그리고 회화와 언어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신문에서 오려낸 패러디 광고(그림 5)이다. 왼쪽의 그림은 진짜 고호가 그린 초상화(고호作)이고 오른쪽은 칼라프린트가 뽑아낸 고호의 초상화(엡손作)이다. 그러나 둘 다 실제 고호의 그림이 아니고 신문의 2차원적인 인쇄에 불과하다. 회화라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어떻든 그 안에 들어 갈 수 없고 보는 것에 의존 할 수밖에 없다. 건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건축은 사람이 그 안에서 존재하고 움직이고 생활함으로서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공간은 건축을 시각예술로부터 갈라놓는 분기점이다.

그렇다면 건축공간은 문자처럼 분리할 수 있는 단속적 단위의 결합인가? 아니면 그림처럼 조밀하게 짜여진 연속체인가? 건축에서 본다는 것을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보자. 롱샹교회는 불란서 동남부에 위치한 순례자들의 교회이다. 동산 위에 올라앉아 대지를 딛고 서서 땅과 교감하는 건축으로 꼬르뷔제의 다른 건축과 달리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많은 건축사가와 학자들이 근대건축의 대표작으로 이것을 뽑고 건축가들은 이 앞에서 영감과 감흥을 받는다. 이 교회는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과 이미지가 달라진다. 70년대 영국의 AA스쿨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롱샹교회를 보고 나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과제를 냈고, 학생들은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학생들은 이 건물을 보고 두 손을 합장한 모양, 배, 오리, 모자, 수도하는 신부님이 대중을 껴안는 모양 등의 이미지로 해석했다.

여기에서 상암경기장의 신문기사와 공통점이 있다. 교회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식을 통하여 개인이 신과 만나는 종교공간이다. 학생들의 생각은 교회의 본질적 기능과는 동떨어진 건축외적인 이미지들이다. 건축을 바라보는 대상, 그 것도 멀리 떨어져 관조적으로 보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학생들에게 물어봤을 때 역시 한 학생은 몇 마리의 거북이가 포개진 것처럼 보이는 형상(그림 6)을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을 통하여 건축물을 본다는 것에 대한 통념을 읽을 수 있다. 즉 본다는 것과 ‘건축물이 무엇과 닮았다‘는 것과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이 일반적 근대건축 이후의 건축관을 표현하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그림을 자신의 책에 인용했던 찰스 젱크스의 생각, 그리고 그가 옹호했던 포스트모던의 건축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랫동안 서구사회에서 무엇을 본다는 것을 사물의 이미지가 눈을 통해 머리 속에 닿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예술에도 적용된다. 근세 이전 유럽에서는 예술의 목적은 이미테이션(imitation), 즉 모방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은 세상의 사물을 완벽하게 다시 재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을 본다는 것을 아무 것도 없는 두뇌에 바깥 세계의 사물을 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인간의 머리 속은 마치 카메라의 어둠상자(camera obscura)와 같은 것이다. 머리 속에는 필름이 있고 카메라 렌즈에 해당하는 눈이 열리면 이미지가 머릿속 필름에 투사된다. 이것이 뇌에 전달되어 사람은 ‘내가 촛불을 봤구나’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머리 속은 마치 백지 상태(tabula rasa)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무엇을 본다는 것을 지각경험의 산물로만 간주하는 경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생각들은 서구사회가 비판하고 넘어야할 장벽이기도 하였다.

AD1000년경 독일의 은부조를 선으로 트레이싱한 그림이다. 예수가 중심에 앉아 있고 뒤에는 종탑, 지붕, 의자 등의 소품들이 각각의 소점을 가지고 아이소메트릭으로 그려져 있다. 각각의 그림은 원칙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전체로 봤을 때 분절되어 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이전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부분의 질서가 있되 확고한 중심이 없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르네상스로 오면서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뒤러(Durer)가 발명한 투시도 그리는 기계이다. 현실세계의 삼차원의 사물을 이차원의 그림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카메라의 어둠상자의 생각과 유사하다. 역시 누워있는 나부를 그리는 화가를 묘사한 뒤러의 그림(그림 7)이다. 화가는 앞에 놓인 스크린을 통해 대상을 기계적으로 자기 앞의 종이에 옮기고 있다. 사물을 본다는 것, 사물을 그리는 것 모두가 세계와 나 사이에 가상의 스크린을 설정하고 이를 통하여 나는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르네상스가 발명한 회화의 기법이다. 르네상스의 회화 기법을 잘 대변해주는 그림이 15세기 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다. 중심에 앉아있는 예수가 모습은 매우 안정감이 있고 천장과 벽은 예수 머리의 후광에 설정된 투시도 소점을 향한다. 예수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대칭구조이고 그 정점에는 예수가 있다. 중심을 향한 세계관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60년쯤 뒤에 틴토레토(Tintoretto)가 그린 또 다른 최후의 만찬(그림 8)에는 예수가 가운데 앉아 있기는 하지만 그림의 정점은 아니다. 예수는 식탁 위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습도 매우 불규칙하다.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던 중심적 세계관이 무너지면서 다원화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1914년 데끼리꼬(Georgio de Chirico)가 그린 <거리의 우수와 신비(Melancholy and Mystery of a Street)>(그림 9)에서 건물의 열주와 굴렁쇠를 소녀만을 보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림 전체는 비현실적이고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만든다. 왜 그럴까? 투시도법에 의한 그림과 달리 이 그림 속의 물체는 서로 다른 소점을 가지고 있어서 일체감, 전체성이 상실되어 있다. 소녀가 굴리는 굴렁쇠는 현실이 아닌  허무 속으로 굴러가는 것 같다. 또 다른 데끼리꼬의 그림 (The Lassitude of the Infinite)에서도 여러 개의 소점이 어긋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가들이 왜 이런 작업을 했을 까? 서구사회가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던 본다는 것에 대한 통념에 회의를 가지고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 <기타(Guitar, 1912)>를 보면 현대로 오면서 훨씬 더 파격적인 생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카소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동일하게 본다는 것’ 자체를 부정한다. 그림에서 기타가 어떤 모습인지 분간 할 수 없도록 중첩되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세계를 일관된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브라크의 그림 <기타를 든 사람(Man with a guitar, 1911)>에서도 기타와 사람을 구별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여러 사람이 똑같은 대상을 놓고 사진을 찍어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계를 가지고 하는 작업도 다른데 심지어 그림을 그리거나 건축행위를 한다는 것은 작가의 가치와 사고에 따라 달라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곰브리치(Gombrich)는 “목적 없이 인간은 볼 수 없다. 순수한 눈은 장님이다”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해석이다. 해석은 의지와 관점을 수반한다. 인간의 머리는 결코 백지상태가 아니다. ‘본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선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관점의 틀을 가진 능동적 존재이다.

건축공간에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자. 근대이전에는 어떤 건축형태에 대해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일치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첨탑을 보면서 사람들은 신에 대한 경외심을 떠올렸다. 형태와 그 것이 지칭하는 대상은 사회의 구성원이 만들어 내는 집합적 산물이었다. 그러나 종교, 삶에 대한 일관된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건축형태 역시 일관된 의미를 상실한다. 현대인은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지만 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건축형태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상징 같은 것들은 근대로 넘어 오면서 대부분 와해된다.

콜로미나(Beatriz Colomina)의 최근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콜로미나는 여성의 입장에서 아돌프 로스와 꼬르뷔제를 비교하였는데 건축과 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보다는 건축공간에 대한 해석을 중점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아돌프 로스는 꼬르뷔제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비엔나의 건축가이다. 서양건축사에서는 근대이후로 넘어오는 하나의 경계지점에 있는 사람으로 로스를 기술한다. 최근에는 로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연구가 활발하다. <몰러주택(Moller House, 1928)>은 밖에서 보면 평범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실내공간은 흥미롭다. 소파가 창가에 면해 있는데 이 곳에 앉은 사람에게 창은 어떤 존재일까?(그림 10). 소파는 창 밖을 보기 위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광을 뒤로 받으며 내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악소노메트릭과 단면(그림 11)을 보면 창을 등진 좌석이 높아서 밖을 보는 사람의 시선이 중첩된 실내공간을 통과하도록 계획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밖을 바라보는 것과 실내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보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뮐러주택(Muller House)>이다. 거실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식당이고, 그 옆이 여자들의 방이 있다. 실내공간 안에 영화박스처럼 시각의 창을 만들어 내부와 내부사이 삽입하고 있다. 여성은 주택의 중심에서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확보하면서도 외부의 손님이 왔을 때나 가족이 생활하는 것들을 자신의 방에서 내부의 창을 통해서 바라본다 (그림12). 여성의 방은 가장 사적이면서도 가장 활동적인 공간을 응시하는 곳이다. 로스의 주택에서 여성은 보여짐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보는 주체이기도 하다. 로스의 건축공간은 보여지는 형태를 만들 뿐 아니라 사람간의 봄과 보임을 설정하는 적극적 장치이다.

로스의 다른 작품인 <골드만숍(Goldman & Salatsch shop, 1898)>(그림 13)의 실내 공간의 벽면 은 동시대의 건축가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 매장으로 들어서면 사방의 벽이 규격화된 크기의 벽장과 진열대로 싸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거울과 유리의 표면 때문에 작은 상점 내부는 더 넓게 느껴진다. 석고 마감의 천장은 벽처럼 광택이 있지는 않지만 거울과 유리와 같은 반사의 효과를 돕는다. 로스가 강조하는 것은 벽에 진열된 상품뿐만 아니라 벽에 비친 사람들 자신의 모습이다. 골드만숍에서 거울과 유리는 작은 상점 내부를 시각적으로 크게 보이는 효과만을 내는 것은 아니다. 벽은 사람에게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상’을 반사시킴으로써 오히려 사람을 보임의 대상으로 만든다. 로스가 작은 실내공간에서 시각의 상호교환성을 추구한 반면 꼬르뷔제의 접근은 다른 것 같다.

꼬르뷔제의 5원칙(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연속창, 자유로운 파사드)이 잘 나타나 있는 사보이주택은 근대건축사의 획기적인 작품이다. 입구를 지나 홀에 들어서면 한쪽은 나선형의 계단이 있고 다른 한쪽은 경사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경사로는 건축의 산책로(promenade architecturale)라는 이름으로 건축사에 자주 등장한다. 현대의 많은 건축가들도 건축 내부로 도시를 끌어들이는 장치로 건축의 산책로를 사용한다. 2층으로 올라가 보자. 방의 창은 밖의 광경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도록 수평으로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로스의 주택의 작은 창들과 대조적이다. 의자들은 로스의 주택에서와 달리 창 밖을 볼 수 있도록 벽에서 떨어져 있다. 로스에게 창이 빛의 근원이라면 꼬르뷔제에게 창은 바깥세상을 향한 시각적 틀이다. 꼬르뷔제는 자신의 건축을 설명할 때 영화 감독처럼 치밀한 기획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9년 당시 불란서의 건축잡지에 실린 <빌라 가르쉬(Villa Garches)>의 사진을 보면 자동차가 건물을 사분의 일쯤 가리고 서 있다. 금방 도착한 자동차의 문을 열고 방문자가 내릴 것 같은 광경이다. 건물 전경을 보여주는 대신 꼬르뷔제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홀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꽃병, 중절모, 코트가 놓여져 있다. 남자 방문객이 찾아온 흔적이다. 경사로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는 중간쯤에서 창을 통해 여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림 14). 그녀는 방문객인 것 같지는 않다. 2층 부엌에는 주전자, 선풍기, 생선 한 마리가 놓여 있다. 부엌은 요리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그림15). 삶의 흔적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아파트의 모델하우스와 같다. 옥상에 놓인 테이블에는 중절모, 썬글라스, 담뱃갑이 놓여 있다. 남자 방문객은 현관-산책로-2층의 방 등을 지나 마지막 옥상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남성 방문객의 모습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꼬르뷔제와 로스의 주택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읽을 수 있다. 로스의 집 속의 주체는 그 곳에서 사는 사람이다. 주택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살고 그리고 소멸하는 전과정의 장소이다. 반면 꼬르뷔제의 주택의 주체는 방문자이다. 자동차에 내려 중절모와 옷을 벗고 건축의 산책로를 따라 움직이는 남성이다. 집은 영속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잠시 들리는 일시적인 공간이다. 로스의 집은 가족의 극장이고 꼬르뷔제의 집은 미술관이다. 꼬르뷔제의 건축에서는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재한다. 그의 건축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건축설계를 하면서 무엇인가를 연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다.

꼬르뷔제의 <작은집(Une Petite maison, 1954)> 스케치(그림 16)를 보면 시각이 그의 건축을 지배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호수와 커다란 눈 사이에 조그만 집이 있다. 눈 뒤에는 건축가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다. 집의 존재보다 우선 하는 것이 눈이다. 집은 대지에 놓여 있지만 독립적이다. 리우데자 네이로 주택의 스케치(그림 17)에서도 바다를 앞에 두고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다음 그림에서 바다의 원경과 앉은 사람의 근경사이에 프레임이 등장한다. 이 틀은 곧 주택의 창이다. 앉은 사람의 자리는 실내공간이 된다. 집은 대지와 무관하게 놓여지는 카메라와 같은 것이다. 장소에서 뿌리를 내리고 건축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장치로서 건축이 들어서는 것이다.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 1933)>의 아파트스케치에서 집 자체가 큰 눈으로 그려진다. 아파트는 외부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들어 있는 셀의 집합체이다. 꼬르뷔제의 건축관이 근대건축의 전부는 아니지만 건축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주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최근 한국건축가들의 주택작품들을 보면 거주성보다는 시각적 연출에 집착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된다. 좋은 미술관, 박물관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이야기를 현재로 전환해 보자. 소비문화가 지배하는 오늘 건축가에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 뉴욕의 윌리웨어 전시판매점의 입구는 건축가 그룹 사이트(SITE)가 자주 구사하는 ‘무너져 내리는 벽’으로 시작된다. 전시판매점은 패션쇼도 하고 물건도 파는 쇼룸이다. 리셉션 데스크를 지나 매장 안으로 들어서면 벽 주위로 모델이 거닐 수 있는 통로가 있고 가운데에는 패션 행렬을 지켜 볼 수 있도록 콘크리트와 유리로 만들어진 고객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져 있다(그림 18). 매장에 들어서서 받는 첫 인상은 도시와의 시각적 유사성이다. 격자모양의 벽면, 배수관, 쓰레기통 등은 뉴욕 뒷골목의 거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사이트에게 뉴욕 거리는 배우와 관객이 공존하는 場이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스스로 배우이자 관객이 되는 것이다. 사이트는 뉴욕 거리에서 보이는 행위와 관람을 매장 속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이트가 구사하는 건축언어는 도시의 광경을 단순히 복제하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는다. 회색의 도료로 덮여진 사면의 벽 때문에 내부는 도심의 뒷골목을 초현실주의적으로 옮겨 놓은 듯 느껴진다. 이 점에서 사이트의 방법론은 KFC나 상암경기장처럼 형태와 그 것이 지칭하는 대상과의 시각적 유사성을 전제로 하는 유추(Analogy) 이다.

치퍼필드가 설계한 미야케 상점은 런던의 쇼핑가에 자리잡고 있다. 윌리웨어 전시판매점이 시각적으로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면 미야케 상점은 거리를 향해 그 내부를 완전히 드러낸다. 내부의 구성은 아주 단순하다. 입구는 곧바로 접수부에 연결되고 접수부의 뒤쪽에 위치한 탈의실은 대리석 표면의 벽으로 분리된다. 왼쪽으로 접수부의 바닥보다 조금 높은 장방형의 매장이 이어진다(그림 19). 매장에는 벽쪽에 부착된 일렬의 옷걸이와 가운데의 작은 전시대만 있을 뿐 공간을 세분화하는 요소가 없으므로 지극히 절제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미야케 상점에는 상품을 품목 혹은 테마로 구별하거나 고객을 차별화 시키는 시각적 장치가 제거되어 있다. 매장으로 올라선 순간 고객은 곧바로 점원의 시선에 놓이게 되므로 이 영역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구매에 대한 적극적 표현이 된다. 매장의 전후방을 거닐며 상품을 고르는 행위는 상품을 사는 행위 그 자체만큼 중요하게 된다. 즉 쇼핑의 의미는 구매로 인해 얻어지는 경제적 효용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구매를 향한 상징적인 예식에 참가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고객 스스로가 배우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야케 상점의 접수부에 들어선 고객은 상품을 고르기에 앞서 단상의 다른 고객을 바라보는 관객이 된다. 접수부의 긴 의자는 이러한 관객의 역할을 고무시킨다.

이러한 구성은 벨라즈꿰즈의 그림 <라 메니나스(La Meninas)>(그림20)을 연상시킨다. 미쉘 푸코 (Michel Foucault) 는 그의 저서 ‘사물의 질서 (The Order of Things)’ 의 서두에서 이 그림을 해석하는 데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라 메니나스에서 화가와 모델과의 관계는 그림 밖의 감상자 때문에 동시에 ‘보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감상자가 화가 앞에 놓인 캔바스를 볼 수 없으므로 화가가 그리는 대상이 모호해진다. 벨라즈꿰즈는 그림 밖의 감상자가 그림 속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따라서 화가, 모델, 감상자간의 삼각관계는 회화가 지니는 불가성을 역설적으로 그리고 있는 셈이다. 푸코에 의하면 서구의 전통적 표현방법에서 사물을 분류하거나 그 질서를 부여하는 주체는 ‘지식’ 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즉 주체는 ‘표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의 감상자인 주체가 벨라즈꿰즈의 라 메니나스에서 ‘봄’과 ‘보임’의 대상으로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푸코에게는 이 그림이 전통적 표현방식의 붕괴를 우회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앞의 두 작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윌리웨어가 ‘도시’의 유추를 구사한다면 미야케는 ‘극장’의 유추를 구사한다. 전자에서 고객이 거리를 활보하는 행인을 엿보는 또 다른 ‘행인’이 된다면 후자에서 고객은 무대 위의 ‘배우’와 객석의 ‘관객’의 두 역할을 부여받는다. 후자의 유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무대와 객석은 거리를 향해 동시에 열려 있으므로 내부의 배우와 관객의 주체-객체의 관계는 외부의 제삼자 때문에 깨어진다. 공연이 진행되는 극장의 단면을 바라보는 개념적 ‘타자’가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윌리웨어와 미야케가 구사하는 유추의 기법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의 ‘도시유추’는 도시의 像을 구체적 형태로 이식하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설계의도는 대중에게 쉽고도 명백하게 전달된다. 효과를 더 풍부하고 한편으로 모호하게 하기 위해 사이트는 인용된 형태를 변형시키고 중첩시킨다. ‘인용’이 먼저이고 ‘변형’이 다음이다. 반면 후자의 ‘극장유추’는 극장이 갖는 구체적 특성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미야케가 지니는 劇的인 요소는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무대장치나 객석의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와 객석사이의 추상적 공간관계에 있다. 윌리웨어는 복제를 전제로 하고 미야케는 재구성을 전제로 한다.

소비시대에 건축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건축이 상표처럼 되는 것이다. 건축이 개인이나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건축행위는 그 문화를 비판적 각도에서 보는 힘을 상실한다. 집단의 동일성을 중요시하는 문화상황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건축행위의 당위성은 하나의 상표에 쉽게 식상하는 대중을 향해 ‘새로운’ 상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데에 집중된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움’은 어떤 구조적 변환에 있지 않고 표피적 치장에 국한된다.

우리는 무수한 이미지 속에 둘러 싸여서 산다(그림 21). 건축잡지를 통하여 우리들 역시 무수한 건축의 이미지에 유혹을 받는다. 건축을 바라보는 대상, 분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았을 때 건축 역시 이러한 이미지의 홍수에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다(그림 22). 탈 근대주의의 많은 건축가들은 근대주의의 규범에 항거하면서 건축의 ‘인간화’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화는 대중에게 가장 호소력이 있는 형태를 효과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공간과 그 속에서의 행위는 기능주의로 매도당했다. 긍정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탈 근대주의 건축이 상업주의의 키치로 전락하는 경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그림 23). 탈근대주의를 비판하고 등장하는 여러 사조 역시 건축을 보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오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진단하기에 아직 이르다. 여전히 이들의 건축에서 시각적, 가촉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탈근대주의의 이미지를 딛고 나타난 또 다른 이미지가 아닌지 비판적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건축의 전체성은 거주를 통하여서만 완전히 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건축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관된 이론과 방법론은 없다. 그러나 건축가는 이러한 체험에 다가갈 수 있는 사고와 방법론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사람들이다.

교실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이 강연을 마치고자 한다. 설계지도를 하면서 나는 우리대학교 주변의 과제를 많이 주고 있다. 학생 뿐 아니라 나도 매일 매일 장소를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는 과제를 주면서 가능한 한 개념, 상징 등의 어휘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이 단어가 지니는 왜곡된 의미 때문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학생들이 마치 무거운 짐을 진 듯 개념과 상징과 같은 어휘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이한 단어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지 종종 거대담론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 것은 대부분의 경우 시각적인 것으로 치환된다. 반면 건축 프로그램은 매우 기계적 데이터로 취급한다. 방을 필요한 치수에 따라 분할하고 실명을 기입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충족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강연에서 나는 많은 사례를 보여 주었다. 로스와 꼬르뷔제의 건축에서 이야기하였던 봄과 보임의 문제는 형태의 문제이자 궁극적으로 프로그램의 문제이기도 하다. 건축공간에서의 삶과 행위를 읽고자 노력하는 작업은 이미지로 전락하는 건축을 제자리에 서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관조적 거리로부터 건축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 강연에 사용된 슬라이드 이미지는 제한된 지면에 모두 실지 못하였고 출처가 명확하지 못한 이미지는 원전을 명시하지 못하였음을 밝힌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