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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이어지는 場所, 楊根里 (2000.03)

이어지는 場所, 楊根里
99楊平00, AC Files No.1, 산업도서출판공사
, 2000, pp.58-67.

楊平은 어디인가?

중앙선, 태백선 열차를 타고 청량리로 상경하는 경상도와 강원도 사람들에게 양평은 서울에 이르기 전의 마지막 정차역이다. 강원도나 충청북도 내륙에서 6번이나 37번 도로를 타고 서울로 가는 사람에게 양평은 길을 잃고 한 번쯤 들어가 보는 소읍일 것이다. 포구가 사라지기 전에 뱃사람들에게는 탁주로 목을 축이고 하룻밤 묵어가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서울 사람에게 양평의 知覺地圖는 뒤로는 산을 기대고 앞으로는 남한강을 바라보는 양근리나 공흥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용문산 국민관광 단지나 양평콘도를 가기 위해 지나치는 곳, 피라미드, 스핑크스, 쥬라기공원, 비행기 모양의 카페, 모텔이 늘어서 있는 강하면과 강상면의 88번 도로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특징 없는 소읍일 것이다.

중심의 와해는 양평만이 처한 현실은 아니다. 읍내 외곽 논바닥 위에 아파트와 슈퍼마켓이 들어서고 새 길이 뻗어나가는 전국의 대부분의 소읍에서도 중심은 힘을 잃어간다. 군청이나 읍사무소, 초등학교, 농협이 자리잡았던 읍내의 사거리, 삼거리는 자동차에 의해 공공영역으로의 기능을 잃어간다. 그러나 소읍의 중심을 약화시키는 더 큰 힘은 소읍의 둘레가 아니라 더 큰 도시, 그리고 궁극적으로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이다. 양평읍이 다른 소읍들과 다른 점은 서울이라는 자석을 지척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청량리역에서 39km, 서울시청에서 직선으로 41.2km의 거리를 둔 양근리는 이미 서울의 磁場에 들어가 있다. 양평읍이 비슷한 거리에 있는 용인처럼 되지 않는 이유는 수도권 상수원 취수장으로 지정되어 개발이 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평은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바뀌지 않는 대신 서울사람이 탈도시에 대한 욕망을 잠시 해소하기 위해 관류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양평은 어느 소읍보다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진 땅이다. 공간의 분절, 단절은 불균형,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사회적 불균형과 불평등을 의미한다. 양평에서의 건축행위는 이러한 단절 위에서 시작 될 수밖에 없다. 이때 건축가는 공간의 단절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치유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건축언어를 빌려오는 표상의 대상이나 매체로 볼 것인가?

서구의 근대주의 거장들은 도시를 통하여 건축을 바라보고 건축을 통하여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를 거대한 도면 위에 그려 보였었다. 이들의 실험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이제 서구 건축계에서 이러한 거시적 이론과 실험이 가능하지도 않고 무의미하다는 전제가 묵시적 동의를 얻어가고 있다. 과거의 도시가 지니고 있었던 에워쌈, 장벽, 경계는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전통적 의미의 定住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축과 도시의 매개체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도시는 건축가에게 자신의 건축어휘를 투사해보는 거울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자생적 실험과 조정보다는 수용만을 거듭해온 한국의 건축계에서도 과연 이런 가치와 태도로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양평과 같은 소읍을 도시민의 일탈의 장소로만 볼 수 있을까?

“이어지는 場所“는 도시를 자르고 길을 내었던 절대주의의 도시재건이나 과거의 흔적을 새 것으로 대체하였던 근대주의 영웅들의 매스터플랜과는 다른 개념의 都市建築 프로젝트이다. 첫째, 도시를 거시적 스케일에서 분석, 해석하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도시는 건축과 장소가 지니는 형태나 이미지가 아니라 공간이 연결되어 만들어 내는 추상적 구조이다. 도시구조는 사람과 교통의 흐름, 정보의 흐름, 사회적 장의 흐름을 가장 명확히 반영하는 지표이며, 흐름을 찾아내는 작업은 도시의 집합적 삶을 읽어내는 간접적인 방법이다. 둘째, 도시구조에서 흐름이 막힌 곳, 흐름이 왜곡된 곳을 찾아내고 이 곳에 布石으로 건축을 앉힌다. 이 지점은 공공의 힘과 사유의 힘이 만나는 접점이자 도시 내에 작은 파장을 형성해 나가는 震央이다. “이어지는 場所”는 巨視的 思考와 微視的 行動으로 축약된다.

都市는 왜 이어져야 하는가?

현대도시공간은 유동성, 속도, 정보, 이미지에 의해서 초월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가는 지금 장소를 연결하는 전제는 무엇인가? 도시공간의 변화에 대한 생각은  미국 학계에서 35여년전에 이미 제시되었다. 멜빈 웨버(Melvin Webber)에 의하면 인접성, 접근성을 토대로 한 사회는 장소와 거리를 뛰어넘는 공통의 관심사로 연결되는 새로운 사회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회를 非場所的 都市領域(non-place urban realm)이라고 명명하였다. 웨버의 생각은 교통, 정보기술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힘이 실린다. 비릴리오(Paul Virilio)는 현대의 도시민은 도시경계와 영역이 없는 곳에 살기 때문에 도시안과 밖의 구분도 없다고 말한다. 도시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입구와 출구를 가지지 않는다. 모든 곳이 입구이며 모든 곳이 출구이다. 건축 속으로 들어가도 문은 없어진다. 제임슨(Frederic Jameson)은 자동차가 지배하는 로스엔젤리스나 애틀란타의 호텔을 예로 들면서 도시내의 밀폐된 세계를 만들고자 건축물은 눈에 띄는 입구를 가지지 않는다는 진단을 내린다. 장소를 상실한 건축은 주위의 이미지를 자신의 투명한 외벽에 반사시킴으로써 스스로의 내부를 더욱 감싸안는다. 그 대신 내부의 움직임은 계단,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를 통하여 극화된다. 반면 도시의 門을 대체하는 것이 도시내의 通路이다. 그 통로 위를 자동차가 질주하고 속도는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대체하고 궁극적으로 물리적 차원을 무너뜨린다. 도시형태는 물리적 형태보다 시간을 어떻게 계획하는가에 좌우된다. 정보화 사회에서 건축은 이를 인정하고 건축화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이 맞아들일 미래는 공학이 남긴 부수적인 기능을 담당하면서 예술적 지위를 유지하지만 사회변혁 과정에서 주체적 위치는 상실해 간다는 것이다. 근대주의의 巨大敍事(grand narratives)은 실무적인 小敍事(little narratives)로 위축되었다가 종국에는 건축의 자율을 내세우는 微視敍事(micro-narratives)로 축약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주장이 지니는 가장 큰 함정은 공간의 사회, 문화적 기능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도시공간은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이동하는 과정만은 아니다. 거리, 지하철, 자동차안에서 사람들은 도시내의 다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고 집단적 가치, 문화, 생활양식을 간접적으로 인식한다. 공적영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목적의 만남은 도시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현대인이 집착하는 패션은 텔레비전, 잡지 등을 통하여 전달되지만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공간이라는 매체가 필요하다. 정보통신과 교통이 발달하면서 생산과 분배과정에서 공간에 의존적이던 부분은 줄어들지만 도시공간의 문화적 기능은 오히려 강화된다. 정보화사회에서 점과 점의 연결만이 중요해지고 물리적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증은 최첨단 산업의 거점인 실리콘 밸리에서 드러난다. 실리콘 밸리의 생명력은 도시에 모여있는 관련기업, 대학, 문화시설, 항만 등의 총체적 도시인프라와 문화이다. 호주의 최첨단 테크노파크의 입지는 광활한 대지가 아니라 시드니의 낡은 철도수리공장을 개조한 곳이다. 도시문화, 기업, 대학이 만들어내는 합작품이다. 탈교외화로 공동화되었던 북미의 대도시가 정보, 문화, 소비의 새로운 중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추세는 도시공간이 오히려 중요해짐을 보여준다. “영화 유브 갓 메일”에서 탐 행크스와 멕 라이언은 가상공간에서 서로를 알게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실제 공간에서 만남을 향해 전개된다. 정보화 사회에서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는 곳은 컴퓨터가 놓인 방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전히 걸어다니는 뉴욕의 거리, 카페, 서점이다. 공간과 장소는 유동성, 속도, 정보, 이미지에 의해서 초월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족 관계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도시에서 지리적 유동성 때문에 도시의 경계와 장벽은 허물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도시간의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도시정부는 자신의 도시를 기업활동, 소비, 문화적 장소로서의 매력을 끌기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압력을 받게된다. 하비(David Harvey)의 주장이다. 도시간의 경쟁 과정에서 장소가 지니는 미세한 차이는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즉 거시적 스케일에서 유동성, 속도, 정보, 이미지는 도시공간을 초월하지만 미시적 스케일의 차이는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에서의 삶이 공간을 초월한다는 주장의 또 다른 함정은 기술결정론 관점과 태도이다. 기술은 삶의 질을 높이지만 자본주의 도시에서 그 수혜를 받는 계층간의 격차가 생겨난다. 도시공간이 단절되고 장소가 정체성을 상실할 때 이 격차는 점차 커진다. 도시공간의 극단적 단절과 분열은 사회병리의 징후이다. 한국의 소읍 양평에서도 이점이 예외 일수는 없다.


물길은 양평읍의 공간을 분절시키는 첫째 요소이다.

멀리 백두대간의 끝 백운봉에서 내려오는 楊根川은 동에서 서로 휘어져 읍내 서쪽 머리부분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중앙선 철길이 종단하면서 이 좁고 긴 양평읍내는 다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여기에다가 인천에서 주문진까지 이어지는 6번 국도는 읍내를 다시 동강낸다. 남쪽 강변에서 시작하여 길-조직1-길-조직2-하천-조직3-철길-조직4-길로 반복되어 마치 시루떡을 쌓아놓은 것 같은 도시조직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양평읍내 사람들의 일상이 하천 남쪽에 국한되었던 옛날 분절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근 마을에서 3, 8 장날 물길, 철길을 건너오기는 했지만 읍내는 자연지형을 따라 그 삶의 경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읍내가 철길을 넘어 북쪽 공흥리로 확장되면서 삶의 영역은 더 이상 강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양평역 뒤편의 아파트 사람들은 읍내로 오기 위해 철길 아래 터널을 빠져 구불구불한 길을 거쳐야 한다. 그 대신 널찍하게 뚫린 북측의 우회도로는 자동차위주의 삶을 유혹한다.

자동차를 타고 읍내를 벗어나면 경관은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 미국의 도로변 건축을 연상시키는 각종 문화의 키치들이 즐비하다. 식당, 카페, 모텔은 평범한 소읍의 삶과는 동떨어진 것들이다. 양평읍내가 지방자본이 오랜 시간을 걸쳐서 만들어 낸 것이라면 읍밖에 도로변 건축은 서울의 투기자본이 불과 10년 안에 만들어 낸 것들이다. 양수리에서부터 강변 북측의 찻길이 서울의 강북사람들이 주로 찾는 통로라면 강변 남측 길은 강남, 분당 사람들을 몫이다. 자동차 길을 따라 먹고 자고 소비하는 공간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를 표방한 공연, 전시시설도 제법 들어서 있다. 그러나 이곳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자동차를 타고 가야만 하는 目的空間이다. 지난 8, 9월 바탕골예술관에는 두 달간 1000명이 다녀갔는데 서울사람이 80%였다. 서울을 벗어나 양평읍에 정착한 문인, 화가, 조각가가 늘어간다는 신문기사도 등장한다. 그러나 읍내 외곽에서 벌어지는 음악회, 전시회, 경연대회, 이벤트 등의 행사위주의 ‘문화’는 이곳에 터전을 내리고 살아왔던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타자의 것이다.

99년 가을 양평교 남단의 강상면 교평리 둔치에서 열렸던 양평군민대회는 지역문화, 서울외곽의 문화거점의 구호를 내세우는 문화행사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군내 11개 면에서 대절버스를 타고 대회에 참가한 선수와 관중은 둔치를 꽉 메웠는데 버스를 내리는 사람 중에서 60대 이상의 노인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동차 두고 행사장에 걸어오는 읍내 사람들로 양평교는 북적대었고 길 한가운데서 교통정리는 하는 군복차림의 중년들은 양평교 북단 갈산나루터 자리에 콘테이너 박스에 차려놓은 해병대 전우회 소속의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이 행사가 양평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비록 강 건너 둔치이지만 양평의 전통적 중심 가까이 에서 행사가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서종면 중미산 휴양림이나, 용문산 관광단지, 혹은 강상면 강하면의 문화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이 만큼 넓은 곳이 없기도 하지만 양평군 사람들에게 지리적, 지각적 중심은 여전히 양근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행사의 주체가 관주도로 열리긴 했지만 참가자의 대부분은 양평을 삶의 근거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서울외곽으로 문화공간이 이동한다는 것은 서울의 중심이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서울도심에 뉴욕처럼 미술관이 자리잡고 소호와 같은 문화저변층의 주거, 작업공간이 살아있다면 양평은 서울의 유사문화공간이 되지는 않는다. 뉴욕을 벗어나 작은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소호의 갤러리나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보는 전시회보다는 그 마을의 삶과 정취가 묻어 있는 것을 찾을 것이다. 문화는 정부가 하달하는 지침도 아니고 특정한 사람들이 전유하는 상부구조의 산물도 아니다. 문화는 일상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것을 통칭한다. 전원생활과 창작활동을 하기 위해 이곳에 새로운 둥지를 튼 사람들의 문화가 “공급자의 문화”라면 서울에 아직 빨려 들어가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이 곳 사람들이 만들어 가야할 문화는 “자생적 문화”이다.

양평사람의 최대 관심사는 물과 경제이다. 군민대회에서 등장한 “청정양평”“맑은 물 사랑“ “문화적 가치창출”과 같은 구호는 물이 문화로 이어지고 문화가 경제로 이어졌으면 하는 양평군과 군민의 바램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물은 사랑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1925년 신작로가 생기기 이전 양근은 한강의 중심 驛院의 하나로서 여주로 가는 물길의 길목 구실을 했다. 나루터 자리인 갈산강변에는 邑內店幕, 客宿所가 모여있었다. 포구가 사라진 후에도 강은 범람의 위협을 주는 존재였다. 팔당댐이 들어서면서 양평읍, 개군면, 강상면, 강하면, 양서면, 옥천면은 남한강보다 땅이 낮아지면서 농경지와 주택이 잠기는 일이 흔해지고 겨울에는 농작물의 냉해를 더 많이 입게된다. 1980년 이후 양근리 강변에는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이 쌓인다. 읍내에서 강으로 이어졌던 길은 끊기고 집들은 아래에 놓이는 모습이 된다. 잡초만 무성한 폐가들이 강변도로 옆에 방치되어 있다. 물에 대한 애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팔당댐 윗목에 자리잡은 양수리에서 양평읍 일대는 상수원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경제활동이 제한된다. 서울 사람들에게 물을 대 주는 대신 자신들의 경제활동의 터전이 묶인 것이다. 그렇다고 양평에는 특별한 산업도 없다. 공장도 불허되고 농사에 농약도 제한된다. 일정면적 이상의 건축도 허락되지 않는다. 물이 그들의 삶을 묶어두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에 기댈 수밖에 없는 양평의 현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이 경제와 문화로 환원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해소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서울사람들의 돈이 외곽도로에만 뿌려져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이 돈은 서울로 혹은 전원주택을 짓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 돈은 양평군으로 들어와야 하고 그 중에서도 양평군의 경제 중심지인 양근리로 들어와야 한다. 이어지는 장소의 대상이 양근리로 들어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現在 양근리의 중심은 어디인가?

비석만이 서 있는 갈산나루터인가? 양평군청인가? 아니면 강변까지 수직으로 이어진 길의 정점에 놓인 역앞인가? 아니면 시장인가? 이 질문 역시 사람들의 知覺地圖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어지는 장소를 위한 구체적 방법론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프로젝트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은 공간구문론(space syntax)이다. 공간구문론은 다음의 이론적 토대를 둔다. 첫째, 공간의 구체적 크기, 형태, 비례와 같은 기하학적 특성 대신 중심과 주변, 깊고 얕음과 같은 위상학적 특성을 분석한다. 둘째, 사람의 육안과 직관이 미치지 못하는 도시공간 전체를 하나로 연결된 구조로 간주하고 하나의 공간이 다른 모든 공간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한다.

프로젝트 1단계는 양근리와 공흥리 일대의 모든 길을 線이라는 요소로 치환한 뒤 컴퓨터에 입력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길 하나 하나가 갖고 있는 위상학적 깊이를 수치로 표현한다. 이를 집적도라고 부른다 집적도가 높은 공간은 어떤 시스템의 위상학적 중심부에 집적도가 낮으면 위상학적 주변에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집적도는 사람들의 지각 속의 중심, 주변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공간 자체의 특성이다. 공간과 공간이 만나서 생긴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수치는 도시와 건축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를 예견하는 힘을 지닌다. 집적도가 높은 공간은 기능에 관계없이 더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결과가 지난 15년간 공간구문론 연구에서 나타나고 있다. 공간구문론은 현상을 분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건축과 도시설계의 보조 장치로 사용된다. “이어지는 장소”에서도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세우고 이를 분석한다.

양근리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6번 도로와 양평교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이다. 장날 교통경찰의 단속이 가장 빈번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공간구문론으로 분석결과 집적도가 높은 상위 10%를 重心核(intergation core)이라고 정의하는데 삼거리를 정점으로 뻗어 나가는 길이 포함된다. 삼거리 이면의 좁은 길들도 중심핵에 포함된다. 그 중에서 양평경찰서에서 시작하여 양근천에서 끝나는 길은 분석 대상 전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집적도를 가진다. 이 길은 자동차가 쉽게 다닐 수 없는 보행자 길로 6번 도로나 37번 도로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남으로는 조선조 양근군의 客舍가 자리했던 양평경찰서, 북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양근천 너머에 위치했던 양근군의 官衙를 연결하는 官門거리이다. 서울에서 楊根을 지나 여주와 홍천으로 가는 육로와 직각으로 만나는 이 길은 도시의 주요한 남북축을 형성했던 것이다. 동서방향의 육로는 현재 6번 국도의 남측에 있는 좁은 길인 것으로 추측된다. 즉 관문거리는 兩端에 붙어 있었던 관청건물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읍내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등뼈와 만나 갈비뼈 모양을 이루는 작은 길들이 현재 양평의 시장과 상가를 이룬다. 양평종합시장 갈비뼈 구조의 내부에 포함된다.

공간구문론으로 분석한 양평의 重心核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관아, 나루터, 시장이 자리잡았던 곳에 모여 있다. 그러나 동서축의 육로와 남북축 관문거리는 오늘에 와서 다른 성격으로 바뀐다. 중심핵은 자동차도로와 보행자 위주의 상업가로로 이분된다. 동서육로는 위치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서울과 강원도, 충청북도를 잇는 자동차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반면 관문거리는 북으로는 중앙선 철길에 잘리고 남으로는 새로 난 6번 국도에 잘리면서 흐름도 단절되고 상징성도 상실한다. 동서방향 흐름은 현대 문명과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지만 남북흐름은 걷는 사람의 느릿느릿한 행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양평의 위상학적 중심공간 전부가 자동차에 점유되지 않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관문거리를 중심으로 도시조직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보행자 망은 양평의 삶을 지탱하는 상업가로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양평의 중심이 양근리 남쪽에 밀집된 반면 중심핵에서 자장 소외된 隔離核(segregation core)은 읍내의 깊숙한 주택지, 철길너머 새로 생겨난 아파트 진입로 등으로 분산되어 있다. 공간구문론 연구에 의하면 重心核은 상업, 隔離核은 상류층 주거지와 부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양평에서도 이점이 부분적으로 적용된다. 불규칙 하지만 양근리의 중심이 길은 서로 만나 망상조직을 이루는 반면 새로 생겨나는 주택지들은 대로에서 외길로 이어져 나무구조를 띄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주거지역이 읍내의 오래된 주거지역, 상가에서 점차 단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未來에 양근리는 어떻게 바뀔까?

현재 양평군이 계획하고 있는 도로와 택지개발지역이 구체화되는 시점에 도시구조는 어떻게 변할까? 우선 중앙선 서울-제천 구간이 복선화 되면서 새로운 선상역사가 들어선다. 역사는 철로로 갈라졌던 남과 북을 역사 내부에서 이을 계획이다. 역앞의 저지대는 메워져서 주택이나 상업건축이 들어서고 관문거리 북쪽 끝에서 새로운 역사 앞을 지나 서쪽 우회도로와 연결된다. 공흥리 일대는 격자형으로 주거지역이 생겨나고 양근리와 연결되는 대로가 뚫린다. 현재보다 분석 대상의 공간이 늘어나고 더 넒은 지역으로 분산된다. 양평군이 계획한 도로이외에 관문거리가 양평경찰서 앞마당을 관통하여 강변도로와 만나고 북쪽으로는 철길을 넘어 주거지역과 연결된다고 가정하여 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공간구문론을 이용한 결과는 흥미롭다. 중심핵은 대부분은 지금과 같이 삼거리, 옛 관문거리에 모여 있지만 역앞에서 군청에 이르는 길과 이와 만나는 6번 도로, 새로 뚫릴 역앞의 길과 이와 만나는 우회도로가 重心核에 추가된다. 중심이 남동에서 점차 서북으로 이동하게 될 전망이다. 반면 隔離核에는 공흥리 일대의 주거지역이 포함된다. 현재의 ‘南北 二重構造’가 미래에는 ‘東西 二重構造’로 변환되는 것이다. 읍내 외곽에 지금 예상하는 것보다 주거지가 많이 들어서면 이중구조의 범위와 격차는 점차 커질 것이다.

미래의 양평읍내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양평역-군청-강변을 잇는 길이다. 이 길이 중심핵에 포함된 다른 길과 구별되는 것은 잠재적 공공성이다. 1937년 청량리 양평구간의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제가 만든 양평역사는 군청을 곧바로 이으면서 식민통치와 수탈을 극대화하는 목적으로 건설했을 것이다. 식민지에 건설된 철도가 도시를 관통하는 경우 역사와 관청을 직선으로 잇고 관청 주위에 교육기관을 배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식민시대 건설된 대표적 도시인 대전의 경우 북단에 驛舍, 남단에 도청을 배치에 격자형 도시의 뼈대를 이룬다. 행정과 권위의 상징인 공공건축을 철도역사에서 내려다보게 하는 식민지시대의 도시구조는 조선왕조의 營造개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1930년대 말 양평역사는 이처럼 古邑의 歷史와 中心에 도전하는 포석으로 놓여졌을 것이다. 역사학계의 한 연구는 철도는 한국인에게 문명의 이기이자 침략과 지배, 수탈과 분열, 탄압과 차별의 기구로 인식되었다고 진단한다. 정재정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과정에서 형성된 반발적, 저항적 철도관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주국가를 만들어 가던 1950-60대 까지 한국인에게 남아 결과적으로 공공의식과 시민정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늘의 양평 驛舍는 이렇게 천대받는 공공의식을 대변한다. 1988년에 새로 세워진 건물은 역사의 정취도 느낄 수 없이 퇴색되고 있다. 그 뒤로는 이십 층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역사를 더욱 왜소하게 만들고 있다. 배웅과 환송의 장소, 우연히 동네사람 만나서 담소하는 공공장소의 매력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철도역의 위상은 사용자의 수에서도 드러난다. 철도청 자료에 의하면 양평군 소재의 용문역, 신아역, 국수역, 신원역, 양수역, 원덕역, 석불역, 구둔역, 양동역의 승차, 하차의 인원은 80년대 후반 매년 줄어들고 있다. 양평역은 이들 역과는 달리 완행, 특급열차가 모두 정차하는 큰 역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승하차 인원은 줄어들고 있다. 도로교통에 압도당하고 있는 대중교통의 위상이다. 콘도, 카페, 공연장, 용문산을 가기 위해 양평역으로 들어오는 서울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들에게 양평역은 도로 표지판에 나타난 참고 정도일 것이다.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래도 청량리역과 양평역을 도시의 관문으로 여기는 양평사람들일 것이다. 일제하에 지배와 수탈의 상징으로 시작한 철도역은 80년대 후반 개인적 편리함, 효율성, 속도에 압도당하여 타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선이 복선화되고 선상역사가 들어서면 삶은 달라진다. 청량리까지 50분 걸리던 여행시간은 줄어들고 배차간격도 짧아진다. 지금 서울역에서 일산역까지 전동차를 타고 가면 정확히 50분이다. 일산신도시의 계획인구만도 276,000명인 중소도시이다. 양평군 전체인구는 1994년 현재 약 77,000명이고 양평읍은 약 19,000명이다. 일산 인구의 1/15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양평읍이 계속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농현상으로 줄어들었던 인구는 95년 이후 다시 늘고 있다. 기술이 자연환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양평은 전원에 다가오고자 하는 서울 사람의 압력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전원도시에서 베드타운으로 성격이 변해 갈 때 개발에 가장 민감한 지역은 철도 이북의 공흥리일 것이다. 양평역의 일대는 단순한 정거장에서 양근리와 공흥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결절점이 되고 역사의 일대는 새로운 위상학적 重心核으로 부상할 것이 예측된다. 현재 양근리의 모습에서 드러난 것처럼 重心核은 자동차에 의해 점령되거나 새로운 상업지역으로 변모할 것이다. 이때 도시구조와 삶을 어떤 모습으로 유도 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과 청사진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巨視戰略에서 微視戰術로

비릴리오, 제임슨이 진단한 대로 현대도시에서 전통적 의미의 입구와 출구는 사라지고 건축은 점차 내향성를 띄어간다. 공항에서 내려 고속도로를 타고 곧 바로 호텔로비로 들어가는 여행자에게 로마의 포폴로 광장이나 개선문은 그립엽서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빌리오나 제임슨의 진단이 모든 도시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것이라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들의 이론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도시에 대한 직,간접의 비판이다. 그리고 그들이 비판하는 도시는 실험을 100여년 이상 해오면서 하부구조가 이미 갖추어진 도시이다.

한국의 현대건축사에서 건축과 도시는 완전히 유리된 영역이었다. 근대건축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도시와는 관계는 간과된 채 형태와 기술의 문제로만 받아들여졌다. 1960년대 한국 건축가들이 작업을 시작할 때 도시를 움직이는 것은 군사독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국가가 총동원되어 개발의 박차를 가할 시기에 건축은 이론과 실험을 할 능력과 의지를 갖추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서구의 도시와 건축은 독자적 지식체계를 정립하면서 분리해 나간다. 도시가 경제학, 통계학, 지리학 등의 과학으로부터 수혈을 받을 때 건축은 역사, 철학, 미학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그러나 서구의 이러한 경향은 건축과 도시를 통합하는 작업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오늘의 우리에게 변명과 합리화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도시의 그늘에 가려져 온 소읍이 상업자본주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방관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건축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도시를 움직이는 정치, 경제의 메커니즘에서 소외되어 있는 건축가, 사회의 집합적 문제보다는 개인의 문제에 갇혀있는 건축가가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를 향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으며 왜 도시를 향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건축가는 사회와 소통하는 언어를 점차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변혁은 근대주의의 환상이 아닐까? 건축은 도시를 움직이는 힘을 통제할 수도 힘의 방향을 유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도시를 구체적 실체로 인간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은 건축이다. 건축이 만나는 모든 부분이 도시이다. 대문을 열고 만나는 길이며, 담을 맞대고 서 있는 주차장이나 놀이터도 도시이다. 주어진 대지를 나누는 방식도 도시적 사고이며 내부공간을 가르고 창을 내는 것도 궁극적으로 도시적이다. 그래서 건축은 도시를 움직이고 개조할 수는 없지만 충격과 파장을 일으킬 수는 있다.

모든 도시에 적용되는 一般解는 없다. 우리시대에 건축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큰 변화를 인정하는 범위에서 작은 실천전술을 찾는 것이다. 양평에서 분절되고 단절된 도시구조 전체를 잇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시구조 흐름이 경색된 부분을 찾아 건축적 스케일의 충격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이어지는 장소”의 2단계는 1단계의 거시적 분석, 해석을 바탕으로 건축적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다. 미래의 양근리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공공영역-물-역사적 장소를 잇는 두 개의 도시축을 복원하는 일이다. 첫 째 축은 양평의 관문인 역과 공공성의 상징인 군청, 그리고 남한강을 잇는 공공의 축이다. 둘째 축은 역사의 흔적과 상업가로를 결합한 官門거리 축이다. 오늘의 양근리에서 이 축의 일부는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있다. 공흥리로 주거지역의 중심이 옮겨지면 이 두 개의 축은 양평 읍의 삶을 공공, 소비, 물로 이어주는 동맥역할을 하게된다. 이 축선 상에 건축 프로그램이 채워질 포석을 설정한다. 포석은 오랜 시간에 걸쳐 채워져야 한다. 프로젝트에서 설정한 포석은 모두 7지점이고 이 지점을 연결하면 삼각형의 꼭지점이 잘려서 생긴 사다리꼴이 된다.

布石1: 철도교통의 관문으로 탈바꿈 할 선상역사이다. 역은 기차 여정의 종점이자 끊어진 남북을 연결하는 공로가 된다. 포석1의 주위는 주차장, 저지대의 미개발지이지만 양근리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도시설계가 가능한 곳이다.

布石2: 역에서 남으로 뻗은 길을 만나 왼쪽으로 꺾는 부분에 위치한 434-1번지로 공공성을 공고하게 하는 지점이 된다. 지금은 ㄷ字型 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한집 건너 오른 쪽에는 7리마을회관이 위치한다. 미래에 포석1-포석2를 잇는 길은 양근리의 새로운 등뼈가 된다. 6번 국도와 만나는 사거리 북쪽은 상업화되는 반면 남쪽은 군청과 이에 관련된 시설들이 자리를 지키면서 공공성을 유지할 것이다.

布石3: 조선시대 관문거리의 시발점이자 객사가 놓였던 양평경찰서의 마당과 테니스장의 일부이다. 관문거리는 강변으로 이어져 도시구조의 重心核이 자연에 닿는다. 경찰서는 흐름의 종점이 아니라 통로가 된다. 포석3은 강변도로가 관문거리 축을 만나 방향을 선회하는 전환점이다.

布石4: 강변도로와 양평교 북단이 만나는 269-24 번지의 공터와 맞은 편에 강과 만나는 삼각형의 좁은 땅이다. 바로 옆에 양평군수 관사가 있다. 포석4는 강변도로에서 오는 흐름과 삼거리에서 오는 흐름이 합류하는 곳이자 양평교를 건너 올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양근리 땅이다. 포석4는 현재 끝이 굽어진 강변도로가 직선으로 펴지면서 시각적 정점이 되는 지점이다.

布石5: 官門거리가 楊根川을 만나 끊어진 지점이다. 선상역사를 건설할 때 끊어진 관문거리는 철도 건너편까지 이어져야 한다. 포석5는 새로운 楊根川 다리가 놓이는 지점이다.

布石6: 철길을 넘는 다리와 계획도로가 만나는 지점까지이다. 철도이북에 사는 사람들이 시장을 가기 위해 이용하는 가장 중요한 보행자로의 결절점이 된다.

布石7: 양평역 북쪽이 계획도로와 만나는 지점이다. 철도이북의 사람들이 역과 읍내를 가기 위해 만나는 도시의 문이 될 것이다.

7개의 포석이 설정된다고 해서 끊어진 도시의 흐름이 복구되는 것은 아니다. 포석은 미래의 연결된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작은 충격일 뿐이다. 포석은 모든 사람이 통제와 차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공공의 프로그램으로 채워져야 하고 이것이 불가능 할 때 사유영역 내에 공공영역이 형성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 점 때문에 이어지는 장소는 공적자본, 공공기관의 의지와 실천, 민간단체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포석이 구축되고 보행자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시민, 문화단체가 읍내 밖에서 추진하는 축제와 행사를 안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의 속도에 퇴색되었던 균형을 잃었던 읍내는 사람과 정보가 흐르는 새로운 축 때문에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다음 세기에 도시는 새로운 역할을 하는 場으로 변할 것이다. 생산과 분배의 역할보다 문화와 소비의 공간으로의 역할이 커진다. 도심을 빠져나갔던 주거가 다시 도심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때 좋은 자연환경을 가진 도시는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호주의 시드니는 좋은 사례이다. 도시화는 전 세계적 추세이다. 서울을 지척에 둔 양평도 언젠가는 도시로 변모할 것이다. 물로 인해 개발에 묶여 있었던 양평이 도시화의 숙제를 다음 세기로 넘기는 것이 다행스런 일이다. 더 성숙된 의식, 더 우수한 기술이 양근리에 잠재하는 역사, 자연, 공공성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