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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omad의 글쓰기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2003.03)

공간, 0303, pp182-187.

정보화시대의 전통의 새로운 패러다임

2002년 12월 홍콩에서 열렸던 제 8회 IASTE(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Traditional Environments)의 주제는 ‘경계없는 전통([un]bounding tradition)’이었다. IASTE를 직역하면 ‘국제전통환경연구학회’이지만 미국 버클리 건축대학 중심의 건축역사학회이다. 2년마다 열리는 개최지역과 도시의 성격에 따라 주제와 성격이 조금씩 변한다. 1988년 버클리대학에서 열렸던 1차학회의 주제는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본 전통주거와 정주지”였다. 1990년의 2차학회 역시 버클리대학에서 열렸고, 주제는 “제1세계와 제3세계: 전통환경의 이중성과 부합성”이였다. 파리의 3차학회는 “개발 대 전통: 주거와 정주지의 문화생태학”, 튀니지의 4차학회는 “전통의 가치: 정체성과 지속가능성에 관한 연구의 효용”, 버클리의 5차학회는 “정체성, 전통, 건축: 계획과 개발에서 문화의 역할”을 주제로 삼았다. 카이로에서 열린 6차학회는 “전통의 생산과 소비: 지구화시대의 개발, 보존과 관광”, 이태리 트라니의 7차학회는 “전통의 종말?”이 주제였다. 14년간의 학회의 흐름을 보면 1차부터 5차까지는 전통의 가치, 정체성, 전통과 개발의 대립, 3세계문제 등 전통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바탕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발표된 논문도 고고학적 역사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6차부터는 전통의 소비, 전통의 종말과 같은 주제어를 내세우며 우리시대의 전통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고, 이번 8차학회에서는 드디어 전통을 경계가 없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기존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 학회는 보통 3-4일간 열리며 프로그램은 15여개의 세션으로 구성된다. 한 세션에 5편의 논문이 발표된다면 가정하면 최소 80여명의 학자가 모이는 셈이다. 구미의 건축관련학회는 대부분 이분야제휴(interdisciplinary) 성격을 갖고 있다. 특히 도시, 인문사회, 지리 등의 학자가 학회에 참가하는 것은 특이한 모습이 아니다. 경계를 그어놓고 한쪽에 분명하게 속하지 않으면 학문적 고아가 되는 한국학계와는 다른 점이다. 이번 학회에서 나는 스튜디오 메타의 이종호소장과 공저로 인터넷과 도시공간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나는 ‘정보화’, ‘지구화’와 같은 현상은 전통의 반대편에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우리의 도시건축공간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알게되었다. 이번 학회의 기조발표자로 나선 홍콩의 한 인문학자는 "전통은 비평이다 (tradition as a critique)"라는 정곡을 찌르는 표현을 사용했다. 전통은 빛이 바랜 공포나 고서적에 박제화 되어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2003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의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구화시대의 전통은 칼로 베듯이 명확하게 도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은 필연적으로 혼성(hybridity)일 수밖에 없다. 15세기의 궁궐과 종묘 건너편에는 정보화시대의 숨은 공장 청계천이 있고, 1930년대 지어진 종로 한복판의 한옥 옆에는 외국건축가가 설계한 유리와 철의 하이테크건축이 공존한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삶도 그렇다. 테헤란로는 벤처산업, 청담동은 패션과 같은 단순한 도식으로 우리도시의 모습을 그려내기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전통은 생산의 대상이기도하고 소비의 대상이기도하다. 문화자본의 가치를 일찍 깨달은 지방정부는 잊혀진 전통을 찾아내고 정리하고, 각종 축제와 이벤트, 관광산업을 통해 이를 소비한다. 이번 학회에서 절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압축하고 싶다. 소위 건축지식인이 지니고 있는 계몽주의적 가부장적 태도를 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찌꺼기는 분명 근대주의의 산물이다. 보다 정확히 서구의 근대주의를 왜곡한 한국근대주의의 산물이다. 이론은 책에서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러나온다는 명제를 확인한 것이다. 둘째는 전통적 학문의 경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건축가와 학자의 경계, 건축과 도시의 경계, 건축과 인문학의 경계, 건축과 기술의 경계, 이러한 모든 경계는 변화하는 시대의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위축시키고 고립을 자초한다. 분야별 정의와 경계는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학회에서 전통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우리 건축계에서도 이러한 학문과 직능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발표한 논문은 스튜디오 메타의 이종호소장의 흥미있는 프로젝트로부터 시작되었다. 국내의 정보통신의주자인 S그룹으로부터 정보화시대에 필요한 건축유형을 개발해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이종호소장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이동하는 한국네티즌의 특성을 분석하고 이를 공간유형(spatial morphology)으로 전환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나는 이 프로젝트와 병행하여 정보화시대의 서울의 도시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행태를 들여다보기로 하였고 이를 논문으로 발전시켰다. 프로젝트가 인터넷의 가상공간의 구성을 건축의 내부공간으로 전환한 실험이었다면 논문은 인터넷이 불러온 도시문화의 변화와 건축의 외부공간설계의 전략을 논의한 것이다.

* 발표한 영문논문을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줄여 의역하였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정보기술시대의 새로운 도시커뮤니티
From Online to Offline: The Emergence of a New Urban Community in the Age of Information Technology

8th Conference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Traditional Environments, 2002. 12.12 -12.15, Hong Kong

인터넷과 초고밀도 도시(Internet and Hyper-Density)

인터넷은 경계와 영역을 초월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등장시키며 도시문화지도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얼굴을 맞대는 만남이 사라진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닷컴의 거품이 빠지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의 중요성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이비지니스는 탄탄한 굴뚝산업 없이 생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온라인 커뮤니티 등장으로 사람들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도시건축공간은 달라지고 있는가? 정보화시대 도시건축공간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지는가? 이 질문은 매일매일 몸을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서울과 같은 동아시아의 초고밀도시에서 무척 중요하다. 서울과 수도권은 인구의 1/4이 밀집된 전 세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곳이다. 고밀도로 알려진 동경, 홍콩, 상해, 싱가폴보다 서울이 3배 이상 밀도가 높다는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서울 도심부의 아파트지역 중 1헥타르 당 거주민이 2,000명에 육박하는 곳도 있다. 미국의 교외주택지의 주민이 평균 40명이 안 된다고 보면 서울의 밀도를 가늠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인터넷이용률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2002년 5월 현재 인구의 51.5%에 해당하는 2천4백만이 인터넷을 이용하며 전 가구의 60%가 초고속 인터넷에 가입했다. 온라인쇼핑 인구는 인터넷사용자의 31%로 미국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이다. 이동전화사용자는 기존전화 사용자수를 훨씬 넘어섰다.

‘인터넷’과 ‘초고밀’의 결합은 독특한 사회문화환경을 만든다. 네티즌은 각종 온라인커뮤니티, 사이버카페, 채팅룸에서 활동한다. 2001년 3월 현재 다움, 아이러브스쿨, 프리챌, 세이클럽 등 4개의 포탈사이트에서만 160만개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 51%의 인터넷 사용자는 오프라인 모임에 참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수는 무려 인구의 8배에 이르는 3억7천만 명이다. 시장규모도 37억 달러에 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동창회, 향우회와 같은 연고, 친목모임이다. 둘째는 외국어, 컴퓨터, 문학, 학원과 같은 학습동호회이다. 셋째는 영화, 연극, 레포츠, 여행, 게임, 음식 등 취미모임이다. 넷째는 번팅, 또래모임, 사교와 같은 만남이다. 첫째는 학연과 지연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나머지 셋과 성격이 다르다. 아이러브스쿨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인이 집착하는 동창회와 정보화시대의 사이버커뮤니티를 결합하여 2000년 당시 열풍을 일으켰다. 2000년 9월에만 5백만이 사이트를 방문하였다. 회사측은 2002년 말 현재 1천만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러브신드롬은 동질성에 기대고 싶은 한국인의 정서를 극대화한 사건이다. 나머지 세 종류의 커뮤니티는 학연과 지연을 배제하고 개인의 참여의지와 서로간의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터넷은 이러한 비지연, 비학연커뮤니티의 범위를 확장하는 촉매역할을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강력한 결합은 작지만 밀도가 높은 도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두 가지 공간패러다임 (Two Social Paradigms of Space)

사회적 본질을 개인간의 연대나 결합이라고 주장했던 불란서의 근대 사회학자 에밀 뒤르카임(1858-1917)은 사회통합의 형태인 연대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기계적 연대(mechanical solidarity)는 동일한 가치, 동일한 신념, 동일한 행동양식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연대인 반면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는 이질적인 구성원들이 상호연관성에 기초하여 이루는 연대이다. 뒤르카임은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기계적 연대가 유기적 연대로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뒤르카임은 사회학자로서 두 가지 연대의 공간적 측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이를 다음과 해석할 수 있다. 유기적 연대는 구성원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결속되므로 이들의 공간영역은 인접(proximity)하거나 연속적(continuity)이다. 반면 기계적 연대는 동질적 집단이므로 굳이 붙어 있을 필요가 없다. 이들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영역을 넘나들면서 연대를 이룬다. 공간구문이론을 정립한 힐리어(B. Hilllier)는 첫째를 “空間依存(spatial),” 둘째를 “超空間(transpatial)”이라고 불렀다. 공간의존형 연대는 개방적이므로 타집단과의 경계가 약하다. 반면 초공간적 연대는 폐쇄적이며 경계를 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두 가지 성격의 연대는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문제는 이 두 연대가 도시공간과 어떻게 엮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가상공간은 우리가 살아 숨쉬는 세계와는 물리적으로 떨어져있는 완전히 독립된 세계이다. 인터넷으로 접속되는 온라인커뮤니티는 이점에서 ‘超空間(transpatial)’ 성격을 띈다. 그러나 온라인 커뮤니티가 일단 오프라인 만남으로 바뀌면 ‘空間依存(spatial)’이 될 수밖에 없다. 감각이 존재하는 경험의 세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프라인활동은 어디서 전개되는가? 강한 경계를 갖고 있는가 약한 경계를 갖고 있는가? 예를 들어 동문 혹은 동호인 사무소는 불특정 보행자에 의존하기보다는 분명한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굳이 눈에 잘 뛰는 임대로가 비싼 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 반면 상점은 고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시를 향하여 모습을 최대한 드러내려고 한다. 첫째가 대중공간과 거리를 둠으로써 정체성을 확보한다면 둘째는 도시공간과 밀접한 관계에 생존이 달려있다. 뉴욕의 두 서점 주인간의 사랑을 그린 1998년 영화 유브갓메일 (You've Got Mail)에서 두 사람은 온라인에서 서로를 알기 시작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결국 맨해튼의 카페에서 성사된다. 인터넷시대에서도 전통적 길이 도시문화의 촉매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거리문화의 중요성은 집단활동과 이벤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가상공간에서 현실공간으로(From Virtual Space to Real Space)

그룹이벤트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사건은 2002년 한일월드컵의 거리응원전이다. 경찰통계에 따르면 6월4일 한국과 폴란드전에 50만의 국민이 밖으로 나왔고, 한국팀이 상대를 무너뜨리고 결승에 다가가면서 그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6월10일 미국전에 1백만, 6월14일 포루투갈전에는 3백만, 6월18일 이태리전에는 4백만, 6월22일 스페인전에는 5백만, 독일전에 열렸던 6월25일에는 7백만이 거리로 나왔다. 이날 밤 인구의 1/7이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셈이다. 거리응원은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자발적 시민문화의 등장이었고, 세계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한 달간 계속된 축제의 주역이 붉은악마라는 데에는 한국민 모두가 이견을 달지 않는다. 붉은 악마는 축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거리응원에 참가하도록 유도했다. 정부가 상명하달식으로 주도했다면 한 행사에 7백만의 인파를 결코 응집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붉은악마의 눈부신 활동은 정부가 지난 몇 년간 추진한 정보기술인프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거리응원전을 뒤에서 조율한 붉은악마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조직의 구성과 의사결정 방법이다. 붉은악마의 역사는 인터넷상의 축구팬클럽으로 시작한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붉은악마라는 이름은 1997년 회원의 투표로 결정하였다. 2002년 7월 현재 회원은 12만 명이고 대다수는 20대와 30대이다. 축구팬의 자발적 참여로 구성되며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 광고의 유혹을 뿌리쳐왔다. 붉은악마의 조직은 수평적이며 그들의 활동은 비정치적이다. 회장과 스탭이 있지만 대부분의 활동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전개된다. 회비도 없고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역시 탈퇴도 회원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회원의 접촉과 의사결정은 모두 홈페이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때문에 모두가 서버(server)이며 동시에 모두가 고객(client)이다. 이러한 쌍방향의 소통은 텔레비전, 신문, 잡지와 같은 일방향의 매체와 달리 다양한문화의 역동성과 수평적관계를 포용하며 계층, 성, 나이에 대한 기존관념을 깬 점에서 신선하다. 클럽의 구조와 운영은 인터넷의 구조와 흡사하다. 넷공간([net] space)은 탈구조적(destructuralized)이고, 탈영토적(deterritorialized)이다. TCP/IP가 있는 곳이면 정보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이는 마치 섬유의 조직과 같다. 한 부분은 다른 부분과 연결되고, 다른 부분은 또 다른 부분과 연결되고 결국은 전체를 이룬다. 한 부분이 작동하지 않으면 주변에 영향을 주지만 전체 시스템은 작동한다. 위계적 구조에서 상부에 문제가 생기면 전체가 작동하지 않는 것과 비교된다. 네트워크는 계속 성장하거나 소멸된다. 인터넷 네트워크가 지닌 개방성과 다양성이 바로 젊은 세대에게는 매력이다.

空間, [非]空間, [超]空間 (Spatial, [A]spatial and [Trans]patial)

앞에서 유기적연대 - 공간의존적, 기계적연대 - 초공간적 관계를 언급했다. 붉은악마는 성, 나이, 직업 등 다양성에 대해 열린 커뮤니티이므로 유기적연대라고 할 수 있다. 유일한 공통점은 축구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유기적연대는 대면접촉을 통해 질서와 연대를 구축하고 공고히 한다. 그러나 10만이 넘는 온라인상의 붉은악마는 오프라인의 한 장소에서 만날 수 없을뿐더러 축구경기를 동시에 관람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조직은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스탭미팅은 소단위로 이루어진다. 그들이 만나는 장소는 물리적으로 모여있거나 인접하지 않고 산발적으로 분산되어 있다. 즉 온라인상의 유기적연대는 실제 도시공간에서는 [초]공간적으로 전개된다. 나는 유기적연대와 초공간성의 결합은 인터넷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독특한 사회공간의 패러다임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월드컵 거리응원전이 벌어졌던 장소는 어떤가? 주요거리응원 장소 역시 초공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타공간과 경계가 분명한가? 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였던 서울의 시청앞과 광화문사거리를 주목하고자 한다. 월드컵기간동안 한 인터넷사이트에서 거리응원 장소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곳을 설문조사했는데 광화문사거리가 1위, 시청앞 광장이 2위, 잠실야구장이 3위로 나타났다. 네티즌들은 월드컵 주경기장앞 상암월드컵공원이나 젊은이의 명소로 떠오른 코엑스보다도 압도적으로 두 장소를 선호했다. 수십만의 인파가  모일 수 있는 넓은 오픈스페이스, 그리고 대형 텔레비전이 직접적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두 장소가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이 근저에 깔려있다. 두 장소는 각종시위의 단골장소로 사용되어 공공공간으로서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주었지만 수세기 동안 자동차에 점유당해 왔다.

14세기 말 서울이 수도로 건설될 당시 정궁이었던 경복궁에서 남으로 뻗은 정치가로와 상업가로인 종로가 만난 곳이 광화문사거리이다. 최고의 권력공간과 백성의 공간이 만났던 접점이었던 셈이다. 반면 시청앞 광장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려고 했던 19세기말 대한제국이 덕수궁 앞에 만든 광장이었다. 기울어 가는 왕권을 수복하려는 상징적 의도가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방사형 도로로 나타났다. 1910년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했을 때 광장을 남으로 내다보도록 북쪽에 시청사를 세웠다. 시청앞 광장은 70년대와 80년대 학생과 민중의 시위와 이를 진압하려는 군사정권과의 대립이 표출된 곳이기도 하다.

월드컵기간동안 두 장소는 거리응원의 진앙지였지만 서로 위계 같은 것이 없었다. 거리응원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과 같은 계획된 이벤트가 아니었으므로 두 장소는 비록 인접해 있지만 선으로 연결되었다기보다는 점과 점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IP 주소처럼 각각의 장소는 네트워크의 한 부분이다. 물리적으로 연결되었다기보다는 개념적으로 묶어졌다는(conceptual cohesion) 표현이 정확하다. 대회가 끝난 뒤 정부는 한국팀의 성공을 축하하는 퍼레이드를 시도했지만 시민의 참여는 극히 저조했다. 강남의 테헤란로에서 강북에 도심에 이르는 긴 행진계획은 거리응원전이 보여준 새로운 공간의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한 구태연한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거리행진은 군사독재시대의 잔재다. 산발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거리응원의 장은  결코 線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점에서 거리응원의 장소는 [초]공간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초공간집단은 연대를 공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분명한 경계를 갖는다고 했는데, 이점은 거리응원의 장소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광화문사거리와 시청앞 광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경계가 느슨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도시계획가들은 커뮤니티가 형성되려면 도시공간에 장벽이 없어야하고 서로 원활히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의 제인 제이콥스가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반대의 주장은 안전한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도시공간의 경계와 영역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것이다. 오스카 뉴만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전자에 동의한다. 공간(space)이 사회(society)의 부대현상(epiphenomenon)이라면 도시의 분절과 파편화는 사회적 분열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만나면 이 논리의 기조는 유지하되 내용은 수정되어야 한다. 단절되고 이질적인 서울의 도시조직과 그 속에 담겨진 다양한 삶을 공통분모로 묶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터넷과 자동차시대의 도시 삶의 패턴은 제인 제이콥스가 상상하는 전통적 보행문화와는 거리가 있다. 자동차에 익숙한 도시민이 걷는 거리는 한정되어 있다. 서울시가 계획하는 걷고 싶은 거리를 일상생활의 경로로 이용하는 시민은 거의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지하철역이나 버스정거장은 걷는 행동반경의 마디(node) 역할을 할 뿐이다. 건축가는 도시를 외부공간과 건축물의 결합으로 인식하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도시가 사건과 행위의 네트워크라는 점은 간과한다. 청계천복원사업의 추이를 보면 물리적 변화에 따르는 산업구조와 도시문화의 파장에 대해서는 별로 준비하지 않는 것 같다.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의 전통적 사고방식은 정보화 시대에 걸림돌이다.

마이크로 도시건축전략 (Towards a Micro Urban-Architectural Strategy)

우리는 지금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도시개조가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땅에 얽힌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첨예하다. 막대한 돈과 노력을 들여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은 없다. 그러나 공공장소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컴퓨터와 자동차가 사람의 대면접촉을 대체하기 때문에 공공공간의 역할이 감소한다는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월크컵의 거리응원전은 정보화시대에 ‘장소’가 더욱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인터넷의 가상공간 때문에 현실공간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 장소는 빛을 발한다. 길과 광장은 마치 수면의 물결을 일으키는 진앙지와 같다. 이 곳은 계획된 공간이자, 계획되지 않는 만남과 사건의 현장이다. 도시전체를 공공장소의 축으로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거리응원처럼 거점방식의 확보는 가능하다. 데이빗 하비는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질수록 공간의 질에 우리는 더욱 민감해진다고 말하였다. 그렇다. 온라인커뮤니티의 사람들이 만나는 오프라인의 장소는 은둔지와 같은 특별한 곳이 아니다. 길모퉁이, 식당, 카페, 술집과 같은 그저 평범한 곳이다.

2000년 한일월드컵 거리응원전은 극단적 동질사회와, 극단적 밀도, 폭발적 인터넷 사용, 그리고 스포츠경기가 만들어낸 독특한 현상이다. 정보화의 선진국 미국이나 핀란드에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집단적 거리문화가 생겨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와 같은 조합이 없기 때문이다. 거리응원전은 가부장적 위계적 근대도시개념이 가상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의 역동성 앞에는 낡은 틀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터넷 시대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소통은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한국의 도시와 사회는 지금 다른 나라의 도시가 갖지 못한 독특한 것을 갖고 있으며 이번 학회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러한 현상이 전통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공공장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사건과 행위를 만드는 매개체이다. 극동아시아의 초고밀도시에서 공공장소의 확보는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건축과 도시를 가르는 기존의 학문분류법으로는 절대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건축이 도시의 영역과 거리를 두고 자기 길을 가는 한 건축은 오브제 이상이 될 수 없다. 현재 건축의 위기는 바로 도시를 포함한 다른 영역과의 소통의 길을 스스로 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느끼고 있는 동안 인터넷 시대의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은 이미 새로운 도시공간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